<갈 곳 잃은 미운 오리 새끼들 in 프라하>
아름다운 도시!
동화 같은 건물!
한 번 가면, 매료되어 다시 가기를 손꼽아 기다리는 도시!
이것은 체코의 수도 프라하를 다녀온 대부분의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물론 위의 묘사도 느낄 수 있었지만 원래 고통스러운 부분이 더 기억에 오래 남는 법이다.
우리 여행의 대미를 장식한 체코는 말 그대로 ‘막장’ 이었다.
우리 여행에서 티켓의 날짜가 잘못 끊은 것은 이제 불행의 축에도 끼지 못한다.
결과를 얘기하자면, 노부부의 자리에서 비켜야 했고, 대신 비수기였기 때문에 가까스로 예약이 되지 않은 자리에 대신 앉아서 갈 수 있었다.
고속버스 안은 와이파이도 있고 콘센트도 각 자리마다 딸려있어서 가는 내 내 지인들께 안부를 전할 수 있었다.
“난 그동안 언니가 쓴 여행기나 봐야겠다.” 수영이가 아이폰을 충전하며 말했다.
“그러던가.. 근데 체코 많이 춥다고 하지 않았나? 걱정이네.. 독일보다 추우면……”
벌써 12월이었기 때문에 날씨는 걷잡을 수 없이 추워지고 있었다. 그리고 나의 유일한 아이템은 중국에서 호민 군에게 받아온 노란 오리털 잠바가 끝이었다.
“에이, 우선 가자마자 게스트 하우스 가서 가방 놓고 옷 좀 더 껴입어야지 뭐..”
“아차, 우리 숙소는 안 알아봐도 돼?”
“내가 주영이랑 저번에 체코 갔을 때, 한국인 게스트 하우스에 있었거든? 근데 거기 아저씨 식사도 정말 잘 해주시고 진짜 최고야. 내가 어딘 줄 아니까 거기로 가자!”
“예약 같은 거 안 해도 돼?” 창 밖을 주시하면서 얘기했다. 춥고 이른 아침이라 그런지 돌아다니는 사람도 없었고 단단하고 일정하게 생긴 빌딩들이 정렬되어 파노라마처럼 지나가는데 짙은 안개까지 더해져 도시는 무거운 침묵에 잠긴 듯했다.
“그때 받아왔던 번호로 카톡 했는데 아직 답이 없네..” 수영이는 여행기 1화를 펼치면서 말했다.
벌써부터 불길하다.
“그래.. 아무튼 이번엔 네가 가이드하는 대로 그냥 따라갈게..”
입이 심심할 때마다 집어먹어서 이미 반 정도밖에 남지 않은 해바라기 씨앗을 식사대 앞에 펼쳐놨다. 이태리에서부터 배고플 때마다 먹겠다고 산 쌀 한 되 정도 되는 해바라기 씨앗은 정말 탁월한 선택이었다.
그런데 봉지를 열자마자 해바라기 씨앗이 담겨 있던 비닐이 뜯어져서 씨앗들이 탱탱볼이라도 된 냥 우리 자리를 중심으로 사방팔방으로 뛰쳐나가 버렸다. 또다시 불길하다.
담아낼 통도 없어서 열심히 해바라기 씨앗을 주어먹었다. 한 움큼 먹으면 금세 목이 말라서 물을 마시고 코딱지 초콜릿을 집어먹고 해바라기 씨가 아몬드라도 된 냥 야금야금 먹다가 또 목이 말라서 물을 마시고.. 4시간 동안 이걸 반복하다 보니 체코에 도착할 때 즘, 나의 위장 어딘가에서 해바라기 새싹이 피고 있는 느낌이었다. (화알~짝!)
체코의 통화는 ‘코로나’라고 불린다.
우리 수중에는 유로가 전부였으므로 40유로 정도를 코로나로 바꾸기로 했다. 체코의 수도이기도 한 프라하는 도시 자체가 유네스코가 지정한 문화유산이다. 프라하는 블타바 강이 신도시와 구도시를 나누고 있는데 수영이가 작년에 머물렀던 한국 게스트 하우스는 신시가에 있었으므로 지하철을 타고 프라하 언저리에서 프라하 중심으로 이동했다. 아, 프라하 지하철이나 기차역 안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광합성을 충분히 못해서 그런가 생각보다 친절하지 않았다. 수영이가 언성을 높이면서 티켓 판매원과 실랑이를 한 건 묻어두기로 하자. 그리고 도시 지도마저 돈을 내고 사야 한다. 하지만 프라하 광장으로 나오면 공짜로 지도를 얻을 수 있다는 건 팁!
“우와! 여기 무슨 크리스마스 마켓 같은 거도 하나 봐!”
일인용 통나무집처럼 생긴 상점들이 광장 중앙에 12월을 맞아 급작스럽게 이사 온 커다란 크리스마스 트리를 중심으로 둥글게 자리 잡고 있었다. 상점 주위를 배회하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두꺼운 옷과 털모자, 그리고 부츠를 신고 있어서 이것만으로도 겨울을 실감하기엔 충분했다. 반면에 내 하늘색 형광 운동화는 보는 사람도 오들오들 떨게 하는 능력을 보여주었다.
이 운동화를 샀을 때 “초 경량 워킹화! 발이 숨 쉴 수 있는 운동화!”라는 문구에 확 꽂혀서 샀는데, 지금은 제발 발이 잠깐 숨 쉬는 것을 멈춰도 좋으니 운동화 전체적으로 난 샤프심 만한 구멍들을 좀 막고 싶다.
통나무집 중 하나는 체코의 전통 빵, 뜨르들로를 팔고 있었다. 이 빵은 기다란 나무 봉에 반죽을 빙빙 감아 숯불에 구운 다음 계핏가루와 설탕을 뿌린 빵인데 시나몬빵의 탈을 쓴 중간이 뚫린 원통 모양 건빵이라고 생각하면 되겠다.
“어.. 어!! 저거 저거 저거!! 주영이랑 왔을 때 먹고 싶었는데 못 먹었던 빵! 언니, 우리 저거 사 먹자”
“그래 뭐.. 먹고 싶음 사 먹어야지..”
“한, 이쯤이었던 것 같은데..” 어떤 백화점의 뒷문으로 나오더니 수영이가 거의 다 찾아온 듯 얘기했다.
“여기다!” 프라하의 초인종은 아파트에 있는 모든 집의 초인종을 한 곳에 모아놓기 때문에 흡사 계산기 비슷한 모양을 띠고 있다.
초인종을 누르고 10분 정도 대기를 했을까, 30대 중반의 주인아저씨가 왼 팔에는 갓 한 살 넘긴 듯 한 사내아기를 앉고 내려오셨다.
“네, 무슨 일이시죠?”
“게스트 하우스에서 하루 머물고 싶은데 가능한가요?”
“혹시, 예약하셨어요?”
“아니요.. 프라하에 올 계획이 없었는데 갑작스럽게 여행을 하게 돼서.. 작년에 여기에 동생이랑 같이 왔었거든요.”
“죄송한데, 저희 지금 빈 방이 없어요.”
뚜…둥…!
“아, 그럼 혹시 주변에 다른 한국인 게스트 하우스가 있나요?”
“저희가 알기론, 이동네는 저희밖에 없는 걸로 알거든요? 다들 한국으로 돌아가셔서..”
“아……. 네…. 감사합니다..”
“네, 수고하세요.” 그렇게 아저씨는 뒤도 돌아보지 않으시고 올라가 버리셨다.
내 동생의 절망적인 눈망울이 참 딱하긴 했지만 나도 화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스페인에서 몸이라도 사리고 놀았으면 이렇게 힘들진 않았을 텐데, 괜히 젊음의 패기를 외치다가 감기까지 걸려서 억울해 죽겠다.
“어쩔 거야.. 그러니까 버스에서 미리 알아보자고 했지.”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바람도 세지고 있고 해님도 슬슬 퇴근 준비를 하시는 것 같다.
“어떡하긴, 여기 근처에 여행객 가이드하는 회사 있는 것 같던데, 거기서 물어보자.”
“그냥 와이파이 터지는 대서 이른 저녁 먹으면서 알아보는 게 좋지 않을까?”
“돈도 없으면서 무슨 와이파이 터지는 대서 밥을 어떻게 먹어. 우선 그 사무실 들어가서 물어보고”
방황에 방황을 거듭하고, 심지어는 방황 중에 발견한 케리어를 끌고 다니는 외국인 부부 뒤를 몰래 밟으면서 어디로 들어가는지 따라가 보기도 했다. 우리끼리 공작 요원이라도 된 듯 부부가 이상한 낌새를 채고 뒤를 돌아보면 재빨리 벽 뒤에 몸을 숨기고, 우리 딴에 말도 안 되는 ‘사정거리 유지’도 해야 눈치를 못 챈다며 재미있게 따라갔다. 이런 엉뚱한 것에서라도 재미를 찾지 않으면 야무지게 앞뒤로 때려대는 바람에 넉 다운 (Knock down)을 당했을 것이다. 아무리 목을 접고 접어서 패딩 속에 쑤셔 넣어도 틈새를 놓치지 않는 바람은 그야말로 강적이었다. 그래도 틈틈이 예쁜 곳을 발견하면 사진 찍는걸 잊지 않았고 그 덕에 프라하 구석구석을 다닐 수 있었다.
그리고 약 두 시간 후, 프라하 중앙 광장에 돌아와 없는 돈으로 저녁도 먹고 와이파이도 쓸 수 있는 곳을 발견했다. 동화 같은 도시 프라하에서 맥도날드 치킨버거를 먹게 될 줄이야. 둘 다 코찔찔이가 되어 햄버거를 먹으면서 숙소를 찾고 있는 게 가관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