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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우성 변호사 Dec 02. 2024

절차와 양심 사이, 12년차 교사가 마주한 어려운 시험

제가 운영하는 로펌 머스트노우가 처리했던 사건들을 모티브 삼아, 드라마 형태로 작성해 보는 글입니다. 많은 성원 바랍니다. - 조우성 변호사 올림 - 


[9편]  절차와 양심 사이, 12년차 교사가 마주한 가장 어려운 시험


#1 절박한 호소: 침묵 속 울리는 교실의 진실


상담실 시계가 3시를 가리켰다. 박준서 교사의 손끝이 테이블을 두드리는 소리만이 공간을 채웠다. 그 빛 속에서 12년차 교사 박준서의 목소리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책상 위에는 학교폭력 사안조사 보고서가 놓여 있었다.


"전학생이 죽어야 조치를 할 거냐는 학부모님의 말씀에... 답을 드릴 수가 없었습니다."

나는 잠자코 그의 이야기를 들었다. 중학교 2학년 담임을 맡은 그는 지난 3개월간의 고뇌를 털어놓았다.

"처음에는 새로운 환경 적응의 문제라고만 생각했습니다만...“


박준서는 휴대폰을 꺼내 SNS 캡처화면들을 보여주었다. 전학생 서민지를 향한 은밀한 조롱과 따돌림의 흔적들이었다. '전학생 주제에', '시골냄새'와 같은 악의적인 댓글들이 시간순으로 정렬되어 있었다.


양 변호사가 'Risk Assessment Matrix'를 펼쳤다. 그의 듀얼 모니터에 학교폭력 사건들이 빠르게 스크롤되었다. Risk Matrix 수치를 확인했다. '심각' 단계였다.


"학교폭력 사안의 경우, 증거와 절차의 문제가 복잡하게 얽혀있습니다. 특히 SNS상의 따돌림은 증거 확보와 인과관계 입증이 쉽지 않죠."

그는 말을 멈추고 왼쪽 주머니에서 볼펜을 꺼내 긴장된 손길로 만지작거렸다.


허 변호사는 검은색 수첩을 꺼내들었다. 그의 수첩에는 이미 몇 줄의 스케치가 그려져 있었다. 아마도 상담실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그의 분석은 시작되었을 것이다.


"절차적 정당성과 실질적 구제의 균형이 관건입니다. 하지만..." 그가 잠시 망설였다. "시간이 많지 않네요. 자치위원회 구성이 이미 진행 중이라면, 우리가 개입할 수 있는 여지는 점점 좁아질 겁니다."


양 변호사와 허 변호사의 시선이 마주쳤다. 양 변호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허 변호사도 동의했다. 이것은 단순한 학교폭력 사건이 아니었다. 한 학생의 인생이, 그리고 어쩌면 더 많은 학생들의 미래가 걸린 사건이었다.

박준서가 어깨를 움츠리며 덧붙였다.


"어제는 서민지가 보건실에서... 보건 선생님 말씀으로는 등교 거부 증세도 보인다고..."

시계가 4시를 가리켰다. 자치위원회까지 남은 시간은 48시간이었다.


포커스룸의 전자게시판에 새로운 보고서가 떴다. 박 과장이 막 업데이트한 내용이 우리의 시선을 붙잡았다.

"가해지목학생 측에서 S로펌의 박성민 변호사를 선임했습니다. 전 교육청 법무담당관 출신에... 학폭 사건 승소율이 상당하더군요."

박 과장의 보고서 마지막에는 붉은 밑줄이 그어져 있었다. '피해학생 2주째 무단결석 지속 중‘


허 변호사가 안경을 고쳐 쓰며 우리의 생각을 끊었다.

"더 심각한 건 피해학생 상황입니다. 서민지가 2주째 무단결석이고, 학부모 민원도 들어온 상태예요."

"피해사실이 지나치게 포괄적입니다. '지속적인 따돌림'이라는 표현만으로는 구체적 행위 유형을 특정하기 어려워요."

회의실 창밖으로 하교하는 학생들이 보였다. 교복을 입은 그들의 뒷모습이 서민지와 겹쳐보였다.


#2 증거의 그림자: SNS에 감춰진 아픔의 기록


박 과장이 시그널 메신저로 새로운 정보를 전했다.

"교육청에서 입수한 정보입니다. 학교 측이 민사소송을 우려하고 있답니다. 최근 유사 사건에서 학교의 관리감독 책임이 인정된 사례가 있어서라고..."

"신중함이 지연으로 이어져서는 안 됩니다."

내 말에 박준서는 한숨을 내쉬었다.


"교감 선생님은 자치위원회 소집을 더 미루자고 하시는데..."

양 변호사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왼쪽 주머니의 볼펜을 차례로 꺼내 검토했다. 파란색, 빨간색, 검은색. 그의 트레이드마크인 삼색 분석이 시작될 참이었다.


"우선 목격자 진술부터 확보해보죠. 긴급조치도 고려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잠시만요."


박준서가 휴대폰을 꺼냈다.

"서민지 옆자리 친구가 보내준 겁니다. 어제 밤 단체 채팅방 내용입니다."


태블릿에 캡처본이 떴다. 시간은 어제 23:17.


[강준호] 야 내가 생각해보니까...

[진수] ?

[강준호] 솔직히 나도 작년에 전학왔을 때 적응 진짜 힘들었어

[진수] 갑자기 무슨...

[강준호] 서민지 보면서 자꾸 그때 생각나

[진수] 그래서 서민지한테 그런 거야?

[강준호] 나도 모르게... 내가 너무했나...

[진수] 솔직히 좀 심했지

[강준호] ...

[강준호] 야 내가 생각해보니까...

[진수] ?

[강준호] 솔직히 나도 작년에 전학왔을 때 적응 진짜 힘들었어

[진수] 갑자기 무슨...

[강준호] 서민지 보면서 자꾸 그때 생각나

[진수] 그래서 서민지한테 그런 거야?

[강준호] 나도 모르게... 내가 너무했나...

[진수] 솔직히 좀 심했지

[강준호] ...


양 변호사가 태블릿을 넘겨받아 자세히 살폈다.

"이 대화가 진정성이 있다고 판단되는 게, 심야 시간대의 즉흥적인 대화라는 점입니다. 그리고 상대방이 강준호의 오랜 친구로 보이는데..."


허 변호사가 안경을 고쳐 쓰며 말을 이었다.

"게다가 이 대화 내용이 강준호의 전학 시기와 정확히 일치합니다. 교무실에서 받은 학생 기록을 보면, 강준호도 작년 2학기에 전학 왔더군요."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한비자의 말처럼, 때로는 가해자의 내면에도 또 다른 상처가 숨어있는 법이다. 하지만 그것이 현재의 잘못을 정당화할 순 없다. 다만...

"증거로서의 가치를 떠나서," 내가 입을 열었다. "이 대화에서 우리는 중요한 실마리를 발견했습니다. 바로 해결의 실마리를...“


#3 숨겨진 이야기: 가해자의 내면에서 발견한 희망


Morning Brief가 시작되자마자 나는 결단을 내렸다.


"학교폭력예방법 제17조 제2항의 조치유예 제도와 함께, 화해권고제도도 검토해봅시다. 교육적 선도가 필요한 경우, 처벌이 아닌 화해와 관계회복에 중점을 둘 수 있어요."


키케로의 『베레스 논고』 중 한 구절이 떠올랐다. '정의는 각자에게 그의 몫을 주는 것이다.' 하지만 그 '몫'이라는 것이 반드시 처벌일 필요는 없다.

양 변호사가 판례를 인용하려다 말고 고개를 끄덕였다.


"대법원도 교육적 해결의 우선을 강조하고 있죠."

허 변호사는 이미 화이트보드에 중재안을 스케치하고 있었다.

"3단계로 접근하면 어떨까요? 첫째, 강준호의 자발적 사과. 둘째, 급우들과의 관계 회복 프로그램. 셋째, 전학생 적응 지원 시스템 구축..."


나는 박준서를 바라보았다.

"선생님의 판단은 어떠신가요?"


그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한번 해 보겠습니다”


결의에 찬 어조로 그는 말했다.


다음날 아침, 강준호가 VIP실에 들어왔다. 그는 의자 끝에 걸터앉았다. 박준서 선생님의 제안으로, 강준호와의 면담을 학교가 아닌 이곳에서 진행하기로 했다.

"때로는 장소를 바꾸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열린다더군요."

박준서의 말이었다.

강준호가 VIP룸의 문을 열었을 때, 조명이 그의 창백한 얼굴을 비췄다. 강준호는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이 달라져 있었다. 평소 기록에 있던 '반항적이고 날카로운' 인상은 온데간데 없었다. 그저 열다섯 살 소년이 서 있었다. 교복 넥타이가 비뚤어져 있었다. 그는 주머니를 만지작거렸다.


허 변호사가 따뜻한 코코아를 내왔다. 예전 자신의 아르바이트 경험에서 우러나온 특별 서비스였다.


"제가 고등학생 때 편의점에서 일했거든요. 이럴 때 달콤한 게 최고더라고요."

강준호는 잠시 머뭇거리다 코코아를 받아들었다. 그의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침묵이 이어졌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말했다. 정의는 산술적 비례가 아닌 기하학적 비례를 따른다고. 하지만 지금은 정의를 논할 때가 아니었다. 한 사람의 내면을 들여다볼 때였다.


"학교는 어때?"

박준서가 물었다.

강준호는 고개를 떨구었다.

"그냥요..."

'그냥'이란 말 속에 네가 겪은 모든 일이 담겨있는 듯 했다.


강준호의 어깨가 미세하게 떨렸다. 코코아 잔을 내려놓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작년... 저도 전학왔을 때..."


그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아무도 저한테 말 걸어주지 않았어요. 점심시간마다 혼자... 체육대회 때도..."

잠시 말을 멈추더니 갑자기 터져나왔다.


"근데 제가... 제가 왜 서민지한테... 저도 모르겠어요. 처음엔 그냥 장난으로... 근데 자꾸... 자꾸..."

강준호는 코코아 잔을 손에 쥔 채 고개를 떨구었다. 그의 어깨가 미세하게 떨리는 것이 보였다. 박준서는 아무 말 없이 티슈를 밀어놓았다. 때로는 침묵이 최선의 위로다.

강준호가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에서 보이는 것은 두려움이었을까, 희망이었을까.


#4 화해의 순간: 교실에 피어난 용기의 꽃


일주일 후, Triple Check System의 마지막 단계로 나는 박준서의 요청으로 학교를 찾았다.. 점심시간이 막 끝난 교실에서 특별한 순간이 펼쳐지고 있었다.

강준호가 교실 앞에 섰다. 반 아이들과 서민지 앞에서.


“저... 그러니까...” 강준호가 말을 더듬었다. “정말... 죄송합니다.” 어색하지만 진심이 묻어나는 사과였다.

"저도 작년에 전학왔을 때 힘들었는데... 그 아픔을 잊었나 봐요. 제가 겪은 일을 다른 친구한테 똑같이 한다는 게... 이제 보니 정말 부끄러워요."

서민지는 고개를 숙였다. 교실이 조용했다.


"앞으로는..."

강준호의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서민지가 고개를 들었다. 처음으로 급식실에서 다른 아이들과 같은 테이블에 앉았다. 그리고 처음으로, 작은 미소를 지었다.


#5 새로운 시작: 변화하는 교실, 자라나는 희망


일주일 후, 교실의 변화는 미묘했지만 분명했다. 서민지의 책상 주변으로 몇몇 아이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녀의 필기가 반에서 제일 깔끔하다는 게 알려진 것이다. 강준호는 의외로 수학을 잘했다. 서민지의 국어 필기와 강준호의 수학 문제 풀이가 오가기 시작했다.

"변호사님."

퇴근길에 박준서에게서 문자가 왔다.

"오늘 서민지가 처음으로 수업시간에 손을 들었습니다."


3개월간의 시범운영과 수정을 거쳐, 교육청이 새 매뉴얼을 채택했다. 다른 학교들도 이 방식을 따르기 시작했다. 법과 교육의 조화로운 만남이었다. 법적 절차의 엄격한 준수와 함께, 교육적 해결을 위한 단계별 접근법을 제시한 점이 높은 평가를 받았다.


1단계: 피해학생 보호조치와 상담

2단계: 가해학생과의 대화와 자발적 개선 기회 제공

3단계: 관계회복 프로그램 운영

4단계: 학급 공동체 회복 활동


사건은 끝났다. 하지만 교실의 변화는 이제 시작이었다. 우리는 그 말의 의미를 이번 사건을 통해 다시 한 번 확인했다.


교실에는 이제 새로운 바람이 불었다. 서민지와 강준호는 이제 같은 모둠에서 공부했다. 매주 금요일 마지막 교시, '우리 교실 희망 이야기'라는 공동체 회복 시간이 신설됐다. 서민지와 강준호는 이제 같은 모둠에서 발표 준비를 한다.


3개월 후, 박준서 교사가 보내온 학급 단체사진을 보며 생각했다. 서민지와 강준호가 같은 줄에 서 있었다. 아직은 어색한 미소였지만, 그 작은 시작이 교실을 바꾸어가고 있었다.



덧.


"得道者多助,失道者寡助"

"바른 길을 걷는 자는 돕는 이가 많고, 바른 길을 벗어난 자는 돕는 이가 적다."

『孟子』 公孫丑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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