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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또 당첨자 전담 재무설계사의 하루

by 조우성 변호사 Feb 25. 2025


<어느 인생이야기> 로또 당첨자 전담 재무설계사의 하루


2024년 2월 17일 월요일 / 날씨: 겨울비가 내리는 흐린 날


새벽부터 내리는 차가운 비가 창가를 두드리는 소리에 잠에서 깼다. 알람이 울리기 10분 전, 항상 그렇듯 습관적으로 눈이 떠졌다. 15년차 로또 당첨자 전담 재무설계사로서, 오늘도 나는 누군가의 인생이 담긴 숫자들과 마주할 준비를 한다. 출근 전, 거울 속 내 모습을 바라보며 넥타이를 매만졌다. 흰머리가 조금 더 늘었지만, 눈빛만큼은 여전히 초심 그대로다.


아침 7시 30분, 여의도 국민은행 PB센터. 


나의 하루는 언제나 고객 파일 검토로 시작된다. 가죽 소파에 앉아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한 모금 마시며 서류를 펼쳤다. 오늘의 주인공은 지난 주 1등에 당첨된 김현우, 박미경 부부. 35년간 중학교 교사로 재직하다 얼마 전 은퇴한 62세 부부다. 35억이라는 금액 앞에서 그들은 어떤 마음일까. 파일 속 사진을 보니 단정하고 소박한 모습이다. 통장 잔고란에 적힌 숫자가 마치 타인의 것처럼 어색해 보였을 것이다.


"은행 문 앞에서 세 번이나 망설였어요. 처음에는 기뻤는데... 이제는 무섭기만 해요."


오전 9시, 상담실에서 만난 박미경 씨의 첫마디였다. 검은색 코트 주머니에서 꺼낸 메모장은 밤잠을 설치며 빼곡히 적은 걱정거리로 가득했다. 돈 빌려달라는 지인들의 끊이지 않는 연락, 사기를 당할까 하는 불안감, 갑자기 낯설어진 자녀들과의 관계...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이 느껴졌다.


"어제는 40년 지기 친구가 찾아와서... 급한 사정이라며... 제가 거절을 잘 못하는데..."


박미경 씨의 목소리가 흔들렸다. 옆자리의 남편 김현우 씨는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


"저는 모두 예금에 넣고 싶은데, 남편은 투자를 하자고 해요. 서로 의견이 달라 다투기까지 했어요. 35년 교직 생활 동안 한 번도 이런 적이 없었는데..."


나는 그들의 이야기를 경청하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책상 위에 준비해둔 포트폴리오 자료와 투자 상품 안내서는 잠시 서랍 속에 넣었다. 오늘은 그들의 마음부터 읽어야 할 때다. 때로는 침묵도 상담의 일부다.


"우리 막내가 어제 전화해서는... 갑자기 사업 자금이 필요하다고..." 


김현우 씨가 말을 이었다. 평생 교단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살아온 그들에게, 갑작스러운 돈의 무게는 너무나 버거워 보였다.


점심시간, 후배와 근처 일식당에서 메밀소바를 먹으며 10년 전 일이 떠올랐다. 50억 당첨자였던 한 사업가는 주식투자에 과도하게 집중한 나머지 심각한 우울증이 왔고, 결국 가족과도 멀어졌다. 한때는 매일 주가를 확인하며 웃던 사람이, 나중에는 하루 종일 커튼을 친 채 빛도 보지 않았다. 그때 나는 깨달았다. 우리의 역할은 단순히 돈을 불리는 것이 아닌, 행복을 지키는 것이라는 걸.


"선배님, 요즘은 어떠세요? 로또 당첨자들 상담하면서 가장 힘든 점이..."


후배의 질문에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15년간 수백 명의 당첨자를 만나왔다. 그들의 표정은 모두 달랐지만, 눈빛만큼은 비슷했다. 기쁨과 불안이 교차하는 그 미묘한 감정을.


"두 분, 지금은 아무 결정도 하지 마세요. 천천히 가보죠."


오후 2시 상담에서 나는 그들에게 제안했다. 3개월간은 기존 생활을 유지하면서 소액만 활용해보자고. 당장의 투자 수익률보다는 심리적 안정이 우선이니까. 레몬 티 향이 은은히 퍼지는 상담실에서, 우리는 천천히 이야기를 나눴다.


"은퇴하고 나서 처음으로 아이들한테 용돈도 좀 더 주고 싶어요. 그동안 너무 힘들게 살았거든요... 큰 애 결혼할 때도 제대로 해주지 못했는데..."


박미경 씨의 눈가가 촉촉해졌다. 나는 따뜻한 차를 한잔 더 권하며 이야기를 이어갔다. 돈이 행복을 살 수는 없지만, 현명하게 사용하면 행복을 지킬 수는 있다고. 


"선생님, 이런 말씀 드려도 될지 모르겠지만..." 김현우 씨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가끔은 당첨되기 전으로 돌아가고 싶어요. 그때는 적어도 마음이 편했으니까요."


저녁 6시, 사무실 창밖으로 도시의 불빛이 하나둘 켜지기 시작했다. 오늘도 나는 숫자가 아닌 사람의 이야기를 들었다. 로또 당첨의 설렘이 불안으로 변하지 않도록, 그들의 행복이 지속되도록 돕는 것. 그것이 바로 나의 일이다.


최근 한국도박문제관리센터의 자료에 따르면 로또 당첨자의 85%가 3년 내 우울증을 경험한다고 한다. 또한 당첨자의 62%는 가족 및 친구 관계가 악화되었다고 보고했다. 하지만 우리 은행의 전문 상담을 받은 고객들의 경우, 92%가 안정적인 삶을 유지하고 있다. 숫자의 힘이 아닌, 마음을 읽는 상담의 힘이다.


책상 위 달력을 넘기며 다음 주 일정을 확인했다. 김현우, 박미경 부부와는 이제 긴 여정이 시작될 것이다. 처음에는 기본적인 재무 교육부터, 그리고 점차 자산관리와 투자로 넘어가는 과정. 그 사이사이 그들의 불안과 걱정을 함께 나누는 시간도 필요할 것이다.


퇴근길, 여전히 비가 내리고 있었다. 우산을 펼치며 생각했다. 내일은 또 다른 인생이야기가 시작될 것이다. 그들의 행복한 결말을 위해, 나는 오늘도 재무설계사이자 인생의 동반자로 걸어간다.


"당신의 행복을 지키는 일, 그것이 바로 저희의 사명입니다."


매일 아침 나는 이 문구를 되새긴다.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오늘도 나는 누군가의 행복을 설계하는 사람이다. 지하철에 몸을 실으며 생각했다. 내일은 어떤 이야기가 나를 기다리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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