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숙종의 변덕 로맨스

by 조우성 변호사

[조변호사의 톡스토리] 숙종의 변덕 로맨스


조선 제19대 왕 숙종의 재위 기간(1674~1720)은 조선 후기 정치사에서 이른바 '환국(換局)'이라 불리는 극단적 당파 교체의 시대였다. 환국이란 국왕이 집권 당파를 급격히 교체하며 반대 세력을 대거 숙청하거나 등용하는 정치적 전환을 의미하며, 숙종대에만 경신환국(1680), 기사환국(1689), 갑술환국(1694) 등이 연이어 발생했다. 이 과정에서 왕실 내부의 왕비 교체 역시 정치적 도구로 활용되었는데, 인현왕후 민씨의 폐위와 복위는 그 대표적 사례이다.


1681년, 숙종은 첫 왕비 인경왕후 김씨가 사망한 후 여흥 민씨 가문의 민씨를 계비로 맞이하였다. 민씨는 서인 세력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그러나 숙종은 후궁 장옥정(張玉貞)을 총애하였고, 1688년 장옥정이 아들(훗날 경종)을 낳자 남인 세력은 이를 정치적 기회로 삼았다. 1689년, 소위 '기사환국'이 발생하며 남인이 집권하였고, 숙종은 인현왕후 민씨를 폐위시켜 사가(私家)로 내쫓았다. 이는 조선 역사상 매우 이례적인 사건이었다. 폐비된 민씨는 궁 밖에서 평민처럼 지내야 했으며, 그녀의 폐위를 반대하던 송시열 등 서인 대신들은 숙청당했다. 장옥정은 희빈(禧嬪)에서 중전(中殿)으로 승격되었다.


그러나 숙종의 정치적 판단은 다시 한번 급변했다. 1694년 갑술환국을 통해 숙종은 남인 세력을 축출하고 서인을 재등용했다. 이와 동시에 폐비 민씨를 복위시켜 다시 중전으로 삼았고, 장씨는 희빈으로 강등되었다. 학계에서는 이러한 환국이 단순히 숙종 개인의 변덕이 아니라, 왕권 강화를 위해 양 당파를 견제하고 균형을 맞추려는 의도적 전략이었다는 해석이 지배적이다. 그러나 일부 연구자들은 숙종의 감정적 변화와 측근의 영향력 역시 무시할 수 없다고 본다.


인현왕후는 복위 후에도 장희빈의 아들인 원자(훗날 경종)를 차별하지 않았다는 기록이 『인현왕후전』과 『숙종실록』에 나타난다. 이는 그녀의 인품을 강조하기 위한 서사일 수도 있으나, 당시 왕실 내부의 복잡한 정치적 고려가 반영된 것으로도 볼 수 있다. 한편 장희빈은 1701년, 인현왕후를 저주하는 무당 굿을 행했다는 혐의로 사사(賜死)되었다. 같은 해 인현왕후 역시 병으로 사망하였다.


숙종대 환국 정치는 조선 후기 당쟁이 국왕 중심의 권력 구조와 결합하며 극단으로 치달았던 사례로 평가된다. 왕비라는 지위조차 정치적 수단으로 전락했으며, 이는 이후 영조대까지 이어지는 정치적 불안정의 씨앗이 되었다. 현대 사극과 드라마는 이를 로맨스나 질투의 서사로 재구성하지만, 실상은 권력의 냉혹한 논리가 지배한 시기였다.



환국.jpg
숙01.jpg
숙02.jpg
숙03.jpg
숙04.jpg
숙05.jpg
숙06.jpg
숙07.jpg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콜럼버스와 스폰서의 대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