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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혜영 Aug 29. 2022

동네의 기억


++ <월간 에세이> 2022.8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어른이 된 이후에도 꿈속에 등장하는 집은 늘 어릴 적 살던 집이다. 서울 변두리, 낮은 언덕에 자리한 오래된 단독주택. 다섯 살에 이사 와 서른이 다 될 때까지 그 집에서 살았다. 어릴 적에는 낡은 우리집을 창피해하며 아파트에 사는 친구들을 부러워했는데, 꿈에 어린 시절 그 집이 나오는 날에는 어쩐지 따뜻하고 평온한 기분으로 아침을 맞이하게 된다.


얼마 전, 일 때문에 우연히 예전에 살던 동네를 지나게 되었다. 낯익은 육교와 언덕을 올라 좁은 골목으로 들어서는데 우리집은 온데간데없고 그 자리에 새로 지은 빌라가 우뚝 솟아있는 게 아닌가. 불과 십여 년 전까지만 해도 우리 가족이 함께 살았던 방과 마루와 부엌, 마당의 장독대와 라일락 나무가 이제 내 마음속 기억으로만 존재한다는 사실에 왠지 모르게 서글픈 감정이 밀려왔다. 아쉬움을 달래며 돌아서는데 발길이 저절로 익숙한 방향을 향했다. 할머니와 엄마를 따라 종종거리며 들렀던 시장. 어린 시절 즐겨 먹던 호떡의 달짝지근함과 갓 튀겨낸 어묵의 구수함이 나를 그곳으로 이끌었다. 


손에 잡히지 않는 아득한 추억을 좇아 잠시 몽롱해지던 찰나, 나도 모르게 정신이 든 것은 발길이 시장 입구에 막 다다랐을 때였다. 시장으로 향하는 횡단보도 앞에 그 아주머니가 십 년 전, 아니 이십 년 전 모습 그대로 앉아계셨기 때문이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더운 날엔 더운 대로, 추운 날엔 추운 대로 노상에서 달걀을 팔던 아주머니. 돌아가신 할머니는 늘 그 아주머니에게서 달걀을 사곤 했는데, 제법 머리가 커져 짐꾼 역할로 시장을 따라가는 일이 달갑지 않았던 나는 할머니가 달걀을 사며 그 아주머니와 이런저런 사는 얘기를 나누는 시간이 지루하게 느껴졌고 할머니가 쓸데없이 말이 많다며 속으로 불평했다.


그러던 어느 날, 예기치 않게 장대비가 쏟아지던 여름날이었다. 미처 우산을 준비하지 못한 나는 지하철역에서 나와 걸어서 15분 거리의 집까지 비를 맞으며 뛰기 시작했다. 그야말로 물독에 빠진 생쥐처럼 정신없이 뛰어가고 있는데, 갑자기 우산 하나가 내 머리 위로 다가왔다. 


“아이고, 학생 다 젖었네. 얼른 뛰어요. 내가 집까지 데려다줄게.”


작은 우산을 내 머리 쪽으로 받친 채 옆에서 같이 뛰기 시작한 사람은 바로 달걀 장수 아주머니였다. 당황한 나는 고맙다는 말을 얼버무렸다.


“젊은 학생이 할머니랑 같이 장 보러 오는 게 보기 좋더라고…”


엄청나게 쏟아지는 빗속을 뛰어가느라 아주머니와 어떤 대화를 나누었는지는 생각이 나지 않는다. 다만, 기억나는 것은 이인삼각 달리기를 하듯 집까지 함께 뛰었던 아주머니와 내 발의 분명한 리듬, 그리고 가쁜 호흡… “어서 들어가요”라고 말하고는 오던 길을 돌아가던 아주머니의 다 젖어버린 등…


생각해보면 참 이상하다. 우산을 썼는데도 아주머니와 난 왜 계속 뛰어갔을까? 아주머니가 나에게 우산을 씌워주며 달리던 사이, 달걀 좌판은 누가 보고 있었을까? 돈도 안 내고 누가 달걀을 훔쳐 가면 어떡하려고? 아주머니는 달걀 좌판도 내버려 둔 채 왜 나에게 우산을 씌워준 걸까? 어차피 홀딱 젖어버려서 우산조차 필요 없었는데 말이다. 


그날 이후, 지하철역에서 집까지 걸어갈 때면 달걀 장수 아주머니를 피해 돌아가는 길을 택했다. 수줍음을 핑계로 세상에 마음을 닫고 살던 나는 아주머니와 다시 마주치는 게 왠지 불편했다. 그냥 인사만 하기엔 무례한 것 같았고, 살갑게 말을 걸기엔 어색했다. 아주머니를 피해 다른 길로 돌아갈 때마다 알 수 없는 죄책감이 밀려왔다. 


우연히 찾은 옛 동네에서 이십여 년 만에 그 아주머니를 다시 보게 된 나는 조용히 다가가 달걀 한 판을 샀다. 그날의 일에 대해선 말하지 않았다. 아주머니가 나를 기억하지 못할 수도 있으니. 대신 마음으로 아주머니의 건강과 행복을 빌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나도 모르게 코끝이 시큰해졌다. 만약 다시 그 동네에 갈 일이 생기고, 달걀 장수 아주머니가 여전히 그 자리에 계신다면 그때는 꼭 고마웠다는 말을 전해야지. 


그날 이후로 아직 예전 동네에 다시 가보진 못했다. 요즘에도 달걀을 먹을 때면 불쑥 그때 그 장대비 내리던 여름날이 떠오른다. 달걀은 비교적 자주 먹게 되는 음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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