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오주미 Oct 01. 2021

02 언어는 흔해서 전문성을 인정받기 어렵구나

[인터뷰] 언어를 관찰하는 사람, 최수근

02

언어는 흔해서 전문성을 인정받기 어렵고

국가는 귀해서 희생을 요구받기 쉽더라

(이 대화를 끝까지 읽기 위해 5분의 시간을 내어주세요.)



노조 일에 대해 좀 더 얘기해 볼까요? 지금 연세대 한국어학당의 지부장을 맡고 있죠?

수근: 응, 노조 업무 때문에 방학인데도 매일 출근하고 있어. 한글날에 맞춰 파업을 준비 중이거든. 한국어 강사들로선 처음으로 하는 파업이 될 거야.


한국어 강사들의 노동 현실에 대해선 간간이 들어온 것 같아요. 한국어 교육에 대한 인기가 높아져서 여기저기서 자랑스럽다는 말들이 많지만, 한국어 강사들의 고용 조건이나 처우는 너무 열악하다구요. 요즘 상황은 어떤가요?

수근: 코로나 이후로 학생 수가 40% 정도 줄어든 것 같아. 작년 같은 경우 강의도 절반 정도 줄어들었는데, 그러면서 생계가 어려워져 그만둔 분도 계시고, 치안이 덜 좋은 쪽으로 집을 옮긴 선생님도 계시고, 혼자 나와 살다가 부모님 집으로 다시 돌아간 경우도 꽤 있어. 
  

연세대 한국어학당 강사들이 최근에 무기계약직으로 전환되었다는 기사를 봤어요. 무기계약직이 되었다는 건 어떤 의미인가요? 정규직만큼 만족스러운 옵션은 아니지만, 지금 추구할 수 있는 최대치의 목표인 걸까요?  
수근: 기한이 없는 계약직이니까 어떻게 보면 말장난이고 법적인 용어도 아니지만, 어학당 강사들 중엔 아직 무기계약직이 되지 못한 사람들도 많지. 처음에 계약직으로 채용되었더라도 업무 자체가 일정적으로 지속된다면 그 사람은 정규직으로 봐야 한다는 게 법원의 해석인데, 그 기준이 주당 15시간 이상, 그리고 1년에 80%인가 근무했으면 그 사람은 계약서 상에 계약직으로 명시되어 있더라도 계약 기간의 끝이 없다고 보자는 거지. 사측이 정기적인 업무를 계약직으로 고용할 위험을 막기 위해서이기도 하고. 아무튼 그런 취지에서 무기계약직이 생기긴 했지만 정규직은 아니니까 갈등도 있고, 해고는 안되는데 정규직만큼 처우를 할 필요는 없는 사람이 되어버렸어.  

정규직과 가장 큰 차이는 결국 처우에 있겠군요.  
수근: 그렇지. 그리고 일단 채용의 과정이 다르지. 계약직으로 들어왔다가 무기계약직으로 전환되었다는 건 정규직이 봤을 때는 채용 과정에서 자신들만큼 고생을 안 했다고 볼 여지가 있는 거고. 그런 갈등이 있어, 무기 계약직과 정규직 사이엔. 그리고 한국어 강사들의 경우, 강의 외에 수업 준비나 행정 업무 같은 데 쓰이는 시간을 인정받지 못하고 강의를 한 시간만큼만 급여가 나오는데, 다시 말하면 학교가 강의를 안 준다는 건 사실상 해고나 다름없다는 뜻이야. 그러니까 결국 고용 안정은 보장되지만, 임금 안정은 보장되지 않지. 계속 이렇게 빈틈들이 나와.  
 
아까 노조 일을 하다 보니 또 다른 종류의 언어 사용이 필요하다는 걸 알게 됐다고 했잖아요. 그 얘기도 좀 더 듣고 싶어요. 

수근: 여기서는 사람들을 선동하는 언어가 필요한데, 우리 조합원들이 아마 그것 때문에 나한테 좀 불만이 있을 거야. ‘우리 지부장은 사람들의 피를 뜨겁게 하지 못한다’라면서. 그런 류의 언어를 내가 잘 못하는 것 같아. 


비슷한 얘기일지 모르겠지만 얼마 전 인스타에 남긴 ‘오늘도 나쁜 말을 했다’라는 문장이 기억에 남아요. 제가 봐왔던 최수근이라는 사람에게서 상상하기 쉬운 장면은 아니었거든요. 10년 이상 교육 현장에서 언어를 고르고 또 골라온 사람일 텐데, 노조 활동을 할 때는 어떤 표현이 불편할 걸 알면서 의도적으로 더 선택해서 해야 하는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수근: 그렇지, 알기 때문에 하는 경우도 있지. 죄책감을 심어 주기 위해서. 아, 나 되게 나쁘다.ㅎㅎ
 

교육의 언어와 투쟁의 언어는 어떻게 다르던가요?   
수근: 한국어를 가르치는 교실에선 소통을 위해 서로가 최선을 다한다는 걸 전제로 하지만, 투쟁 현장에서는 의도적으로 소통을 단절시키는 용어를 쓰기도 해. 일부러 상대방의 언어 능력 밖의 어휘를 선택해서 기를 꺾으려 애쓰기도 하고. 예를 들면 학교 측을 상대로 대화할 때 이렇게 말하지. '노조 측에서 지금 주장하는 이 조항은 근참법(근로자참여 및 협력증진에 관한 법)에 이미 보장된 거라 합법 거부를 할 수 없습니다’라고 한다면 나는 ‘근데 근참법이 뭐의 줄임말인지 모르죠?’라고 하는 거야. 

 

그게 노조식 투쟁의 문법이라서요? 

수근: 그냥 내가 그렇게 해야 한다고 생각해서. 상대가 얼마나 준비 없이 나오는지를 계속 지적하고 싶었는데, ‘준비하세요’라고 말하는 건 의미 없거든. 그리고 다음 교섭 땐 ‘혹시 공부하고 나오셨나요?’ 이런다 내가. 누가 나한테 시킨 것도 아닌데 내가 상대방을 공격하는 방식이 그렇더라고. 나도 이런 말을 할 줄 알아야 한다는 걸 배워가고 있어. 욕도 조금씩 늘고 있고.  
 
결국엔 그런 말을 할 줄 알아야 한다고 주변에서 얘기하나요? 아님 오빠 나름의 전략이라고 해야 하나?  
수근: 전략이지. 하지만 주위에서 이런 표현을 권하진 않아. 노동 운동을 많이 해보신 분들 중에도 안 좋게 보는 사람들도 있고. 근데 할 줄 몰라서 안 하는 것과 할 줄 아는데 안 하는 건 다른 것 같아서… 내가 좀 할 줄 알아야 된다는 생각은 들어. 아직 어느 타이밍에 해야 할지는 나도 잘 모르지. 그래서 실수는 있겠지만 좀 다양하게 써보고 싶어. 억지로 하는 말도 아니고, 사실은 이상한 해방감이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야. 왜냐하면 평생 나의 상사로 군림하던 사람들 앞에서 내가 노조 대표자로서 머리 숙이지 않고 위에서 누르는 모습을 조합원들에게 보여줘야 하는 거지. 내가 이만큼 무례하게 해야 조합원들이 조금이라도 더 앞으로 나가. 그런 말들도 내가 지부장이기 때문에 가지는 권리거든. 그래서 못 되게 말하는 걸 연습하기도 하고, 때로는 우리 조합원들한테 야단칠 때도 심하게 말하기도 하고.    


노조 조직 내 멤버들에게도 그렇게 세게 말할 필요가 있을까요?  

수근: 어학당 강사들 사이에서도 선배와 후배의 기수 문화가 있는데, 내가 노조의 대표라면 나는 조합원들 앞에서 선배인 사람도 야단쳐야 할 때가 있어. 선배들은 되게 싫어할 거야. 그런데 내가 선배들에게 야단치지 못하면 후배들이 내 말을 듣지 않고 선배 말을 듣거든. 그러면 노조 조직이 잘 운영이 안 되더라고.  


학교 측과 교섭을 할 때든 조직 내 선배들에게 얘기할 때든 강하게 말해야 하는 것에 대해 내적 갈등을 느끼진 않는 상태인가요? 누가 시킨 건 아니고, 스스로 결정해서 말한다고 하긴 했으니까요. 

수근: 모험이랄까? 한 번도 써보지 않은 언어를 사용하게 되는 낯설음.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길을 앞이 안 보이는데 가는 느낌. 그 정도의 갈등은 있어. 내가 한 번도 써 본 적 없는 언어를 쓰고 있다는 두려움과, 설렘과, 긴장감과, 미안함. 다 섞여 있지. 


가보지 않은 길에 대한 두려움 중에서도 언어가 큰 부분을 차지하네요. 

수근: 되게 크지, 되게 커.

 

역시 언어 중심으로 사고하는 사람이구나.  
수근: 선동은 어떻게 해야 할까, 내가 이 말을 했을 때 저 사람 마음속에서 어떤 작용이 일어날까, 그런 것들을 고민하게 돼. 그런 걸 잘 못하는구나 느끼게 되고. 
 
잘 하는 사람이라는 게 따로 있나요? 참고하고 있는 사람이라던가요.   

수근: 이 사람한테 이런 태도를 배우고 저 사람한텐 저런 태도를 배우고 그런 건 있지만, 언어적 샘플은 따로 없어. 다 처음이야. 사실 어느 정도가 언어의 문제고 어느 정도가 지식의 문제인지도 잘 모르겠다. 노동법도 내가 조합원들보다 조금 더 아는 정도이고, 어쩌면… 문제는 내 언어가 아니라 나에게 콘텐츠가 없다는 점인지도 몰라. 내가 그런 걸 솔직하게 까발리는 걸 못한다는 생각. 


콘텐츠가 부족한 사람이라는 걸요?  

수근: 콘텐츠가 없다는 점이나, 거기에 따르는 내 감정을 드러내지 못한다는 것. 문제는 그걸 수도 있지. 내 철학을 채워가야 하는 문제일 수도 있어. 하면 할수록 느끼는 건 내가 노동법을 잘 모른다는 것, 투쟁 경험이 없다는 것, 심지어 정의감도 없다는 것, 하하. 하다못해 정의감이라도 있어야 할 텐데, 아무것도 없다는 게 하면 할수록 드러나고 있다. 근데 이런 걸 또 노출하면 안 되는 자리이기도 하고. 노출해야 되나? 그냥 어쩌면… 말 같은 건 안 하고 혼자 있고 싶은 건지도 몰라. 
 
근데 어떻게 이 모든 걸 시작하게 됐을까요? 오빠는 노조를 설립하던 시기부터 참여한 걸로 알고 있는데요.      

수근: 강사 측과 학교 측 사이에 임금 체불 건이 있었는데, 그걸로 협상을 하면서 다들 노조가 필요하구나 하는 인식이 생긴 거야. 근데 대체 일은 누가 할까? 고양이 목에 방울 달기처럼 됐더라고. 근데 나는 못할 건 없다고 생각했거든. 다들 그 일을 안 하려고 하는 걸 보니 그게 어떤 일인지 잘 알고 있나 보다 했지. 근데 지금도 신기한 건 나중에 가서 보니까 다들 뭔지도 모르면서 그냥 왠지 안될 것 같다고 했던 거더라구. 근데 나는 잘 모르면 호기심이 좀 생기는 편이야. 그래서 한 거야. 난 그때 학교에 불만이란 것도 별로 없었거든. 왜 뜨겁고 불만 많고 목소리 큰 사람들은 앞으로 안 나서는 걸까 하는 생각을 했었는데, 나한테 왜 지부장을 했냐고 물으면 결과적으론 못 할 이유가 없으니까 했어. 특별한 정의감이나 책임감도 없는데 어쩌다 보니.
 
정의감이 꼭 있어야 할까요? 책임감은 있어야 될 것 같은데 정의감은 잘 모르겠다. 내 밥그릇을 지키기 위한 목적으로 싸우는 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나, 거대한 정의나 선을 위한다는 게 가능한 건가 싶네요.  

수근: 근데 또 정의감이 있다는 이미지는 줘야 돼. 그래서 솔직하게 얘길 못하지. 노조 활동이라는 게 비겁한 선택도 많이 해야 되거든. 예를 들면 우리한테 차별 금지에 대한 조항이 있어. 결혼 여부를 이유로, 학력을 이유로 차별하지 않는다 등등의 조항이 있는데, 학교 측에선 ‘이거 이거 이거를 빼죠’… 


구체적으로 어떤 것들이죠?

수근: 간단하게 말하면 ‘법에서 정해진 거 외엔 다 빼자’. 법으로 금지하고 있는 것만 유지하고 추가하진 말자. 예를 들면 학력이나 결혼 여부에 따른 차별 금지 조항도 학교 측에선 빼자고 해. 
 
지금 추진하고 있는 차별금지법안과 거의 비슷한 것 같은데… 

수근: 그 차별금지법도 아직 통과는 안 됐잖아. 기존 차별금지법에 이미 규정된 조항들이 있어. 예를 들어 ‘성별에 의한 차별을 금지하는 조항은 이미 있으니까 오케이, 그건 우리 조항 안에도 넣자’ 그런데 ‘결혼 여부나 학력에 의한 차별 금지 조항은 현행 법에 있나? 없으면 우리도 안 돼’ 이런 식이야.   
 
현행법 수준으로만 맞추자는 건가요. 더 나아가진 말자? 

수근: 그렇지. 근데 교섭은 원래 더 요구하기 위한 거거든. 비정규직과 정규직의 차별 금지 조항도 우리가 넣었지만 그들은 빼려고 하고. 처음엔 막 화가 났어. ‘아니 그럼 결혼 여부를 가지고 차별을 하자고?’ 이해가 안 됐지. 하지만 결과적으로 사인을 하기 전에는 ‘오케이, 이거 이거 이거 뺍시다. 대신 다른 거 받아요’ 하는 거래 대상이 되지. 거기서 오는 스트레스가 있어. 네 말대로 실제로 정의감은 중요하지 않아. 오히려 일에 방해가 되지. 옳고 그름에 대한 확실한 기준이 있으면 오히려 협상이 안돼. 과연 뭐가 옳은 일일까 잘 모르겠어.
 
나이가 들수록 그냥 회색의 상태로 둬야 하는 일이 많아진다는 생각이 들어요. 

수근: 맞아, 뭐가 뭔지 잘 모르겠는 일들이 정말 많다고 느껴. 그래서 더 뜨거워지기 힘들고, 차분히 가라앉기를 지켜보며 이해하는 데까지도 시간이 걸려서… 노조일 하면서 그런 일 많이 겪는 것 같아. 


그런 상황이 성장인 건가 후퇴인 건가도 애매할 것 같아요. 아주 여러가지를 협상 테이블에 놓고 폭넓게 보면서, 옳은 것만 밀고 가는 게 아니라 어떨 땐 밀고 어떨 땐 당기고 하는 것들. 그런 걸 넓게 보는 시야가 생겼으니 성장했다고 볼 수도 있고, 밀고 나갈 에너지가 줄어들어 후퇴했다고 볼 수도 있고. 답이 없는 고민일 것 같네요. 

수근: 후훗 맞아. 고맙다 야, 그렇게 말해줘서.

 

어떤 부분이요? 답이 없다고 말하는 게요? 

수근: 오히려 많이 듣는 말은 ‘그러면서 크는 거야’인데, 그렇게 말해줘서 고맙다. 


그러면서 크는 거야’라는 말을 들을 땐 기분이 어때요? 
수근: 글쎄, ‘이런 건방진!’ 하하. 사실 고맙기도 하고 어리둥절해. 그런 말은 주로 선배들이 해. 후배들도 ‘끝나면 오빠는 많이 달라져 있을 거야’라고 하는데, 더 시야가 넓어져 있을 거라는 그들 나름의 응원이지. 굳이 그렇게 위로 안 해줘도 되는데. 


와, 어두워졌구나! 와, 저기 감이다, 감. 맛있겠닷.      

(다음 글로 이어집니다.) 


<우리가 나눈 이야기들 전체 보기>

01 엄격하게 때로는 유연하게, 언어를 탐구하는 마음으로 

02 언어는 흔해서 전문성을 인정받기 어렵구나 (현재글)

03 엄마 아빠는 내 나이 때 뭐 했을까? (다음글)


인터뷰이: 최수근 (인스타그램 ID: @sukunch)

인터뷰: 오주미 (인스타그램 ID: @fayetree)

대화 시기: 2021년 8월

사진 제공: 최수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