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리함의 가스라이팅에서 벗어나는 사치
[매거진 : 가난한 프리랜서의 소심한 사치생활]
갑자기 전기가 끊기면 어떻게 될까?
수도가 끊기면 어떻게 하지?
예전에 만났던 귀농인에게 들었던 말이다. 귀농하기 전 도심의 고층 아파트에서 살았던 그녀는 어느 밤 침대에 누워 있을 때 이 질문이 떠올랐고 순간적으로 심한 공포가 느껴졌다고 한다. 그리고 그 공포가 귀농을 결심하는데 결정적이었다고도 한다. 솔직히 ‘너무 오버하는 거 아닌가’ 싶었다. 침대에 누워 TV를 보다가 전기가 끊기는 공포를 느꼈다고 해서 굳이 시골로 내려가 낫과 호미를 들 필요가 있을까? 하지만 최근 ‘쿠팡 사태’를 겪으며 나는 그녀가 느꼈던 공포의 정체를 비로소 이해하게 되었다. 그것은 시스템에 영혼을 저당 잡힌 ‘의존성’에 대한 자각이었다.
나는 본래 느긋하고 단순한 삶을 지향한다. 수입은 들쭉날쭉하고 통장 잔고는 늘 아슬아슬하지만, 내일 아침 당장 샐러드가 현관 앞에 놓여야 할 만큼 급박한 인생도 아니다. 하지만 '무료 배송'과 '무료 반품'이라는 마법의 주문은 내 소비의 문턱을 한없이 낮춰놓았다.
무엇보다 무서운 건 내 손가락이 이미 그 앱의 UI(사용자 환경)에 완벽히 길들여졌다는 사실이다. 립밤 하나를 샀는데 세수대야가 들어갈 법한 거대한 봉지에 담겨 올 때의 당혹감도, 물건을 꺼내는 시간보다 박스를 해체하고 분리수거장에 가져가는 시간이 더 오래 걸리는 귀찮음도, '싸고 편하니까'라는 본능의 외침 앞에서는 충분히 외면할 수 있는 사소한 감정일 뿐이었다.
과거 새벽 배송 기사님들의 안타까운 비보를 접했을 때도 나는 미적거렸다. "여기가 제일 싸고 편리하잖아"라며 알뜰주부인 척 했지만. 사실은 새로운 앱의 낯선 UI에서 본인인증을 거쳐 회원가입을 하고 주소를 입력하고 결제수단을 등록하는 '낯선 귀찮음’을 이길 의지가 없었을 뿐이다. 내가 지향하는 가치보다는 당장 내 손가락의 편안함을 선택하는 본능이 훨씬 강력했던 셈이다. 그러다 최근 수면 위로 드러난 쿠팡이라는 기업의 경영방식을 직면했을 때, 나는 깨달았다. 이 달콤한 늪에서 발을 빼는 것이야말로 지금 내가 부릴 수 있는 품격 있는 사치라는 것을.
잘 가라 쿠팡! 멀리 안 나간다.
이 결단과 탈퇴의 과정에서 코칭 수업 때 배웠던 '역본능'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코칭의 세계에서 코치는 상대에게 조언하고 싶은 본능을 철저히 억제해야 한다. 남의 말을 듣기보다 내 말을 하고 싶어 하는 인간의 원초적 본능을 거스르는 연습. 그 '역본능'의 경지를 지나야 비로소 상대의 주파수에 나를 맞춘 온전한 경청이 가능해진다.
쇼핑도 마찬가지다. 본능은 언제나 에너지를 덜 쓰는 쪽, 즉 ‘효율’과 ‘편리’를 향해 흐른다. 하지만 그 흐름을 거슬러 자발적으로 불편함을 선택하는 것이야말로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상위 가치를 수호하는 길이다.
통장 잔고가 넉넉지 않은 프리랜서에게 '최저가'와 '무료 배송'은 포기하기 힘든 유혹이다. 하지만 나는 글씨 없는 타월을 고르듯, 내 생활의 방식 또한 '내가 고른 것'들로 채우고 싶어졌다. 쿠팡을 탈퇴하며 감수하기로 한 번거로움은, 내 영혼이 아직 자본의 편리함에 마비되지 않았다는 자존감의 표현이자, 돈이 없어도 취향과 가치는 포기하지 않겠다는 소심한 저항이다.
사람들은 쿠팡 없는 세상을 전기가 끊기거나 수돗물이 안 나오는 재난 상황처럼 받아들인다. 아이가 있어서, 부모님께 보내드려야 해서, 장 볼 시간이 없어서.... 입장 바꿔 생각하면 어느정도 이해 가능한 각자의 맥락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이 공포의 근원은 우리가 기업이 설계한 정교한 ‘가두리 양식장’에 너무 오래 갇혀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편리함에 취해 스스로 대안을 찾는 ‘선택의 근육’을 퇴화시켰다. 동네 마트까지 걸어가기, 장바구니 무게를 어깨로 견디기, 배송 기간을 기다리며 설렘을 유지하기, 그리고 반품의 번거로움을 피하기 위해 물건을 신중하게 고르는 그 모든 과정이 실은 우리 삶을 지탱하는 근력이다. 이 근육이 사라지면 우리는 기업의 부도덕함 앞에서도 “어쩔 수 없잖아”라며 고개를 숙이는 무력한 포로가 되고 만다.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시스템에 내 일상을 100% 맡겼을 때, 우리는 그 시스템의 인질이 된다.
가난한 프리랜서에게 품격이란, 거창한 명품을 두르는 것이 아니라 내 삶의 통제권을 놓지 않는 것에서 온다. 오늘 나는 조금 더 걷고, 조금 더 기다리겠지만, 그 어느 때보다 가볍고 자유로운 숨을 쉰다. 시스템이 정해준 '빠른 길' 대신 내가 선택한 '바른 길'을 걷는 것. 이것이 내가 도심 속에서 누리는 가장 소박하고도 위대한 사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