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희섭섭 Sep 17. 2015

지중해의 햇살은 매우 강렬했고

복작복작한 도시에 나만의 비밀 공간을 만들어 감춰놓는 일은 세상에 몇 안 되는 짜릿한 일중 하나다. 

바르셀로나에 도착한 지 며칠 되지 않았던 날, 세계 최고의 관광 도시 중 하나라는 바르셀로나에 온 만큼 유명 관광지들을 우선 둘러보자는 마음에 메트로를 타고 바르셀로나의 중심 리세우역에 내렸다. 


현지인과 관광객이 한 데 모여 북적북적 걷기만 해도 흥이 나는 람블라스 거리를 혼 빠진 채 지나 바르셀로나 시내 관광의 메카 고딕 지구와 바르셀로네따 해변 사이에서 길을 잃었을 때, 그 이름난 관광지들을 무심하게 가로지르는 Marqués de l'argentera 대로에서 정신을 차렸었다. 

거리에는 누구를 대상으로 하는지 알 수 없는 한적한 바와 카페가 대여섯 사이좋게 일렬로 늘어져 있었다. 그날 이후 매일 점심 식사를 위해 찾는 카페 아드리아티코도 그중의 하나.

 

주인 아가씨가 굉장히 친절한 카페 아드리아티코는 몬타디토가 매우 맛있다. 몬타디토는 작은 바게트 조각 위에 토마토 햄 참치 치즈 등을 조합하여 깜찍하게 올린 음식으로, 이 예쁘고 맛있는 음식 세 조각과 와인 한 잔(런치세트)이 내 점심이다.

     

군중으로부터의 기분 좋은 해방감을 느끼기에 더할 나위 없는 장소. 하지만 마음만 먹는다면 언제든 다시 군중 속으로 숨을 수 있는 절묘한 위치. 광장과 밀실 사이 어디쯤 위치한 이 카페는, 광장과 밀실 사이의 적당한 어딘가를 찾아 세계를 헤매는 나에게 이 도시에서 가장 마음 가는 장소가 되었다.


야외 테이블에 앉아 릴케의 <말테의 수기>를 읽었다. 

말테는 죽음의 공포에 대해 서술하다가, 이웃집 말단 공무원 이야기를 한다. 그 이웃은 어느 날 자신이 아직 50년은 더 살 수 있을 거라고 가정을 하고는, 넘치는 시간에 대한, 그보다 더 넘치는 분과 더, 더 넘치는 초에 대해 사색을 한다. 

그 부분에서 나는 갑자기 어지러워졌다. 지중해의 오후 세시 햇살은 매우 강렬했고, 나는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하나 모르겠다,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어느 날은 그게 굉장히 간단해 보이기도 하다가, 가끔은 또 말도 안 되게 어려워 보이는 것이었다. 대강 살다 가기에 나는 엄청난 시간과 그보다 더 엄청난 분과 끔찍하게 엄청난 초를 살아내야 했다.


곱슬머리가 냄새나게 떡 진 아저씨가 비닐 가방을 어깨에 메고 티슈를 팔러 다닌다. 그는 젊은 프랑스 여행자들이 희덕거리고 있는 테이블에 가서 판매를 시도하다가 "노!"라는 단호한 대답을 듣고 자리를 떠야 했다. 그중 한 명은 어떻게 그렇게 냉정하게 말할 수 있냐며, '너도 참 너다.' 하는 표정으로 "노!"를 흉내 내며 고개를 절레절레 거렸는데, 아저씨는 분노 반 서러움 반의 알 수 없는 표정으로 테이블을 돌아보고 자리를 완전히 떴다.


다음 목표는 마음씨 좋아 보이는 노부부의 테이블. 마음씨 좋은 부부는 돈을 몇 유로 지불하고 티슈는 필요하지 않다며 돌려준다. 아저씨는, "아닙니다, 이것은 당신의 것입니다." 라 말하며 다시 한 번 티슈를 권하고 "필요하지 않아요." 라 다시 한 번 거절당한 후 결국엔 다시 비닐 가방에 넣는다. 마음씨 좋은 노부부는 티슈를 필요로 하지 않았고, 아저씨는 감사 반 서러움 반의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자리를 떴다.


그걸 보고 있던 나는 오줌이 너무너무 마려웠는데, 와인을 두 잔이나 마셨기 때문인 것 같았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도대체 모르겠다, 하고 생각했다. 

번쩍번쩍 복잡한 도시에 나만의 공간을 만들어 놓았지만, 그 다음에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나는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알고 보니 내겐 너무 많은 시간과 그보다 더 심하게 많은 분과 억 소리 나는 초가 주어져 있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더는 그런 것들이 존재하지 않는 세상에서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