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희섭 Sep 26. 2015

모든 살아있는 것들이

"마당에 설거지물 받아 놓지 마요 수미, 파리들 빠져 죽어요."

    

햇살이 히말라야를 녹슨 양동이 안에 쓸어 담은 칠월의 오후. 나는 마당의 해먹에 누워 해발 3,300m의 태양욕을 즐기며 게스트하우스를 운영하는 게쵸와 수미 부부의 대화를 엿듣고 있었다.

티베트 불교의 가르침을 따르는 라다크 청년 게쵸는 수미에게 마당에 있는 양동이에 물을 받아놓지 말라고 말했다. 햇살이 매우 강하여 고인 물에 세상에 또렷이 비치니, 파리들이 물인 줄 모르고 빠져 죽는다는 것이었다.

수미는, "오케이"라 짧고 굵게 대답했다.



영화 <티베트에서의 칠년>의 한 장면이 떠오른다.


오스트리아인 브레드피트는 달라이라마의 지시로 티베트의 수도 라싸에 작은 건물을 하나 짓게 되는데, 생각만큼 건설이 원활히 진행되지 않는다. 삽질을 하다가 지렁이나 개미를 죽이게 될 수 있다는 생각에, 공사에 투입된 티베트인들이 한 삽 한 삽 조심스럽게 공사를 진행하기 때문이다.


들은 모든 살아있는 것이 전생에 자신의 어머니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기 때문에 모든 생명을 귀중히 생각한다. 그들에게 ‘하찮은 생명’은 없다.


브레드 피트가 이 고충을 털어놓자,

"Never never hurt anything that lives", 극중 달라이라마는 말한다.

 

결국 그들은 지렁이 보호조를 따로 만들어 한쪽에선 삽질을 하고 한쪽에선 지렁이를 구조하며 안전한 땅으로 옮기는 방법으로 공사를 진행한다.    



'생명존중'이라는 단어가 문득 낯설게 들리는 날.


"공무원이 부인 토막살인…."

"아내 살해, 시신 유기 혐의 40대…."

"아버지가 초등생 의붓딸 성추행…."

"골목길에서 여성 상습 성폭행 30대 조폭 구속"

"새벽 조깅하던 70대 男 흉기에 찔려 숨져"     


사람의 생명이 사람에 의해 지렁이의 목숨보다 더 하찮게 다뤄지는 사건들로 가득 찬 조간신문을 훑으며 나는 잠시 히말라야의 화창한 오후로 피신했다.


문화는 상대적이라, 이 문화는 옳고 저 문화는 그르다 말할 수 없다. 지렁이 목숨까지 걱정하여 작은 건물 하나 뚝딱 짓지 못하는 것이 그들의 문화라면, 한 집 건너 서너 집이 고기집인 종로 2가의 풍경은 우리의 문화다.


채식도 육식도 하나의 문화이고 식습관일 뿐 우열을 가릴만한 것이 아니다. 살아있는 모든 생명이 소중하다는 이유를 들어, 모든 사람에게 당장 고기 먹는 일을 중단할 것을, 모피를 입지 말 것을 요구할 수는 없다. 하찮은 동물들의 생명만큼 ‘만물의 영장’인 인간의 습관과 취향은 소중하다.      


그러나 좁은 닭장 안에서 스트레스를 참지 못하고 서로의 눈알을 쪼아대는 식용 닭의, 자신의 신체를 보호하겠다며 생각 없이 소비하는 동물 가죽으로 만든 신발, 가방, 옷이 되기 위해 아무 것도 모른 체 생명을 빼앗기는 그들의 고통을 누구라도 한 번쯤은 생각해보아야 하는 게 아닐까.

동물들이 불쌍하기에 앞서, 타인의 고통을 공감하는 능력이 결여된 사회에서 살아간다는 사실이 두렵기 때문이다.


내 목숨도, 미래의 내 아이의 생명도 이 사회에선 참을 수 없이 하찮을 것 같기만 하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