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두지 Apr 11. 2021

태어나서 두 번째로 무서웠던 날

허머스, 바다, 그리고 사막: 이스라엘 내셔널 트레일 1,000km 9

D가 넘어졌다. 좀 심하게 넘어졌다 싶더니, 무릎에 새끼손톱만한 깊이의 큰 상처가 났다. 상처를 보고 놀랐는지 D가 눈을 감아버린다. 그리고 뜨지 않는다. 야, 눈 떠봐. 기절한 거야? 뺨을 마구 때리며 그를 깨운다. 일어나지 않는다. 오만가지 생각이 머리를 스쳐간다. 구급차를 부를까. 구급차가 이 깊은 숲 속까지 어떻게 들어오지. 구급대원들도 우리처럼 깊은 숲 속을 걷고 걸어서 와야 하는 건가. 그들이 올 때까지 하염없이 기다리다 D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어떡하지. D의 몸을 어떻게든 질질 끌어서라도 도로까지 나가야 하나. 두려움, 놀람, 계획, 대비가 마구 섞인 채 머릿속에서 빠르게 회전한다.      


D가 경기를 일으킨다.    

  

장난치지 마! 지금 장난칠 때가 아니야! 그의 뺨을 더욱 세게 때린다. 그가 눈을 살며시 뜬다. 그의 몸을 일으켜 세운다. 물 마셔. 얼른. 물을 마셔.     

 

"눈이 안 보여. 온 세상이 하얘."

    

이게 무슨 일인가. 무섭다. 너무 무섭다. D가 잘못되면 어떡하지. 여기까지 와서 트레킹을 하자고 한 나 자신을 평생 용서하지 못하겠지. 마음을 가다듬자. 내 머리에 꽂혀있던 선글라스를 그의 눈에 씌운다. 그에게 물통을 쥐어준다. 가방에서 클렌징 티슈를 꺼내 D의 무릎에 난 상처 주위를 닦는다. 연고를 바르고 반창고를 붙인다. D의 얼굴에서 식은땀을 닦아낸다. 


D가 기절하기 전 걸은 트레일도 험난했다.



“이제 좀 괜찮은 것 같아.”

“정말이야? 눈은?”

“보여.”

“물을 더 마셔. 지금이라도 구급차를 부를까? 어떻게 될지 모르잖아.”

“아냐. 괜찮은 것 같아. 그리고 구급차는 불러서 뭐해. 언제 올 지도 모르는데.” 

“너 경기 일으킨 거 기억나?”

“경기? 내가? 아니?”

“기억이 안 나? 너 기절했었나봐.”     


경기를 일으켰다고 내가? 전혀 기억이 안 나는데…. 왜 기절을 했을까. 상처가 생각보다 너무 깊어서 놀랐나. 아드레날린이 솟구쳤나. 아무튼…. 괜찮을 거야. 머리를 박지는 않았거든. 오른쪽 볼로 넘어지긴 했는데 볼이 막 아프지는 않아. 목이 삐끗했다면 큰일 났을 텐데 목에 별 느낌은 없어. 잘못 넘어졌으면 정말 큰일 날 뻔했지…. 머리가 좀 멍하긴 한데…. 괜찮은 것 같아.      


“그러고 보니 너 지금 좀 멍청해 보여.”

“그래?”

“어. 정신을 잃으면 안 되니까 아무 말이나 계속 지껄여.”

“괜찮아.”

“노래를 하든가.” 

“아냐 괜찮아. 이제 식은땀도 안나. 무릎만 좀 아프지. 네가 선글라스를 씌워준 게 도움이 된 것 같아. 정말 순간 온 세상이 하얗게 변했는데, 선글라스를 끼고 나서 조금씩 돌아왔어. 물마시라고 한 것도 도움이 됐고. 고마워…. 위급한 순간에, 누군가 내 옆에 있다는 느낌이 들었어.” 

“그걸 말이라고 하냐. 당연히 내가 옆에 있지. 아까는 진짜 얼마나 무서웠다고. 태어나서 두 번째로 무서웠던 순간이었어. 우리 엄마 중환자실에 있었을 때 다음으로 무서웠어. 네가 정말 어떻게 되는 줄 알았어.”    

  

미그달(Migdal) 마을까지는 아직 두 세 시간은 더 걸어야 한다. 오후 3시가 다 되어 가는데. 5시가 지나면 해가 질 텐데. 길 양쪽으로 웅장한 절벽들이 솟아있지만, 바쁘고 어지러운 마음이라 하나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얼른 사람이 사는 마을로 가고 싶다. D는 괜찮다고 하지만, 만에 하나 다른 증상이 생기면 도움을 구해야 하니까. 오늘은 절대 외진 곳에서 야영하지 말자. 마을로 가자. 트레일 엔젤에게 도움을 구하자. 도움이 절실한 날이다. 




절벽 위로 노란 해가 물들어간다. 언덕 위로 바위너구리들이 보인다. 야생 토끼를 만났다.


절벽 위로 노란 해가 물들어간다. 언덕 위로 바위너구리들이 보인다. 독일 셰퍼드 같이 생긴 개도 한 마리 지나간다. 독일 셰퍼드가 아니야, 늑대야. D가 말한다.      


“뭐, 늑대?”

“어. 늑대가 분명해. 아까 안내판 보니까 이 숲 속에 야생 늑대도 산다고 하더라고. 신난다. 야생 늑대를 보다니!”

“뭐? D 너는 지금 상황에서 어떻게 신이 나? 지금 늑대 따위가 문제냐고!”     


동굴이 난 절벽. 홀로 높이 솟은 절벽. 괴이하게 생긴 거대한 절벽들 사이를 걷고 걸으니 숲의 끝자락이다. 저 멀리 마을이 보인다. 왼쪽으로 바나나 밭이 넓게 펼쳐져 있다. 그 너머로 갈릴레호가 보인다. 이제 한 시간을 더 걸으면 미그달이다. 미그달에 있다는 트레일 엔젤에게 전화를 걸었다. 4시가 다 되어간다. 트레일 엔젤에게 2시 정도에는 전화를 하는 게 예의일 것 같지만 오늘은 어쩔 수 없다. 너무 늦게 전화해 미안하다고 사과를 하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오늘 당신의 공간에서 머물 수 있겠느냐고.       


“지금 운전중이라서. 다시 전화 해줄게.”     

이따 전화해서 안 된다고 하면 어떡하지. 오늘 밤 야영하는 건 너무 불안한데.      


한참을 걸어 마을에 가까워졌다. 전화가 없다. 마을을 지나 한참 더 걸으면 야영할 수 있는 곳이 있긴 하지만, 거기까지 가려면 어둠 속에서 걸어야 할 테다. 해가 저물어간다. 멀리 보이는 갈릴레호, 그리고 갈릴레호를 내려다보고 있는 산맥이 아름답다. 그 위로 노랗게 저물어가는 하늘의 색깔도 말로 표현할 수 없이 아름답다. 마음은 바쁘고 불안한데, 세상은 우리와 상관없이 자기 나름대로 이토록 아름답다. 



마음은 바쁘고 불안한데, 세상은 우리와 상관없이 자기 나름대로 이토록 아름답다.


- 확인해봤더니 오늘 공간이 비어있네. 집은 아니고 트레커들이 머물 수 있게 마련한 헛간이야. 내가 지금 마을 밖에 나와 있어서, 동생에게 부탁할게. 공간으로 안내해달라고


마을 입구에 도착했을 무렵, 문자가 왔다. 다행이다. 진심으로 감사하다. 어둑해진 길가에 앉아 엔젤의 동생을 기다렸다. 어둠이 짙게 내려앉았지만, 조금도 불안하지 않다. 생전 처음 보는 낯선 이가 건네는 안전과 평온에 이토록 마음이 놓인다. 10여 분을 기다려 엔젤의 동생을 만났다. 동생과 함께 어둠이 내려앉은 미그달의 마을길을 걸었다. 도착한 곳은 작은 집. 동생이 열쇠를 주고는 편히 쉬라며 돌아갔다.   

   

헛간이라지만 있을 건 다 있다. 침대도 있고, 화장실도 있고, 작은 부엌도 딸려있다. 엔젤에게 문자를 보냈다. 늦은 시간에 귀찮게 해서 미안하다고, 고맙다고. 걱정하지 말고 편히 쉬라는 답이 돌아왔다. 감사하고 또 감사하다. D가 기절한 날. D의 무릎에 깊은 상처가 베인 날. 트레킹을 시작한 걸 처음으로 후회한 날. 이런 날, 우리를 위로해 준 건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낯선 이의 선의다. 다짐을 하게 된다. 우리도 이렇게 베풀고 살아야겠다고. 


“이 정도면…. 병원에서 꿰매야 할 정도의 깊이 같은데….”

샤워를 하고 나온 D 무릎의 상처를 클렌징 티슈로 한 번 더 닦아냈다. 새 반창고를 붙였다.      

“흉터가 크게 날 것 같아. 내일이라도 병원에 갈까?” 

“아니. 흉터야 뭐. 흉터인 채로 남기면 되지. 나중에 흉터를 보면서 오늘을 기억할 수도 있고” 

“으이그…. 난 싫은데. 네 무릎에 흉터나는거…. 아깐 정말 무서웠어. 오늘 정말 무서운 날이었어. 네가 어떻게 될까봐 무섭더라고. 크게 다치지 않아 다행이야.”     


정말 다행이다. 


D가 작게 코를 곤다. 

그의 숨소리에 마음이 놓인다. 


오늘의 쉴 곳


이전 08화 트레킹에서 가장 좋은 순간은, 걷지 않는 순간이지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