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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두지 Apr 11. 2021

트레킹에서 가장 좋은 순간은, 걷지 않는 순간이지

허머스, 바다, 그리고 사막: 이스라엘 내셔널 트레일 1,000km 8

- 잘 지내고 있어?     


예전 직장 동료에게서 문자가 왔다. 응, 잘 지내. 근데 지금은 좀 춥다. 나 지금 텐트 안이야. 빨리 일어나서 몸을 움직여야 덜 추울텐데. 너무 추워서 침낭 밖으로 나갈 마음이 전혀 들지 않는 이런 상태, 너는 아니?     

 

- 그래도 오늘은 쉬는 날이야. 텐트 정리하고 마을로 가서, 숙소에 처박혀서 먹기만 할 거야.     

동료에게 답장을 보내고도 한 시간이 지나서야 일어났다. 새벽보다 따뜻해지긴 했지만, 아침이 된 지금도 온 몸이 오들오들 떨리게 춥다. 하지만 어쩌나. 얼른 텐트 밖으로 나가야지. 텐트를 정리해야 여길 뜨지. 그래야 먹을 걸 잔뜩 사들고 숙소로 가지. 





이스라엘은 물가가 비싸다. 북유럽에서도 물가가 비싸기로 유명한 노르웨이의 물가 수준이라고, 북유럽을 여행해 본 여행자들이 말할 정도다. 당연히 숙소도 비싸다. 우리가 야영을 한 데에서 멀지 않은 도시 짜페드(Safed)는 관광지가 아닌지라 숙소 자체도 많이 없다. 에어비앤비에서 가장 저렴한 숙소를 검색해보니 7만 원이다. 10만 원이 넘지 않는다는 데에 안도하고 방을 예약했다. 숙소 소개에 따르면 방문을 열고 나가면 저 멀리 갈릴레호가 보이는 멋진 방이란다. 우리는 방문을 나갈 계획이 전혀 없어서 소용 없겠지만.   

   

짐을 챙겨 지도에서 찾은 마트로 걸어갔다. 상점 문은 9시에 여는데 8시 30분에 도착해버렸다. 뭘 먹을지 고민하며 마트가 문을 열 때까지 기다렸다. 소세지를 구워 먹을까? 술도 잔뜩 사고. 트레킹 식량도 좀 채워야지. 술은 와인으로 할까 맥주로 할까…. 문이 열리고, 출근하는 마트 직원들의 뒤꽁무니를 따라 상점 안으로 들어갔다.      


이 곳은 천국이다! 와인, 맥주, 소세지, 각종 채소, 크래커, 시리얼, 빵, 바나나…. 양말 한 짝도 들어갈 공간이 없는 배낭에 식량을 꾹꾹 쑤셔 넣고 짜페드의 언덕을 걸었다. 숙소가 더럽게도 멀다. 식료품까지 더해진 짐의 무게가 천근만근이다. 하지만 즐겁다. 이게 다 오늘 먹고 마실 것들이라고 생각하니. 배낭에 든 모든 것을 배 안으로 쑤셔 넣을 테다. 






리뷰에서 봤던 대로, 저 멀리 갈릴레호가 보이는 멋진 숙소다. 영광의 샤워를 하니 어느 정도 인간이 된 기분이 든다. 손빨래를 하고, 해 잘 드는 테라스에 잘 펴서 널었다. D가 요리를 시작했다. D가 요리하는 걸 구경하며 와인을 한 잔 마셨다. 그러다 빨래가 잘 마르고 있는지 확인도 할 겸, 테라스로 나가봤다. 갈릴레호에 석양이 아름답게 물들고 있었다. 길가를 서성대던 커다랗고 뚱뚱하고 늙은 개가 헉헉 차오르는 숨을 힘겹게 내쉬며 나에게로 걸어온다. 아이고 예뻐라. 아이고 예뻐. 예쁨 받고 싶구나? 쓰다듬어 주니 좋아한다. 요리하던 D도 테라스로 나왔다. D도 개를 쓰담쓰담. 개가 아주 드러누워 배를 깐다. 아이고 예뻐. 배 쓰담쓰담 해줘? D와 둘이서 네 팔로 마구마구 쓰담쓰담. 이렇게 예쁨 받는 거 오랜만이야? 너는 집이 어디야? 설마, 누가 너 버린 건 아니겠지? 너처럼 뚱뚱하고 귀엽고 사랑스러운 아이를. 매일 석양 아래서 너를 쓰다듬어 줄 수 있다면 행복할 것 같은데. 개를 쓰다듬고 나니 손이 새카매졌다.




D가 탁자에 소세지와 매쉬드 포테이토와 볶은 채소를 차렸다. D와 함께 다니는 건 즐겁다. 무거운 짐도 들어주고 요리도 해준다. 요리 실력이 좋은 포터를 데리고 다니는 거랑 비슷한데, 거기에 가끔 웃기기까지 한다. 게다가 술도 잘 마셔서 술친구도 해준다. 멋진 안주에 맥주와 와인을 신나게 마셨다.   

    

“좋다. 이런 하루. 그치 D야.” 

“어. 요리하는 거 조금 그리웠어.” 

“난 네가 해주는 맛있는 음식 먹는 거 그리웠어. 따뜻한 물로 샤워하는 것도.”

“언제든 내킬 때 화장실에 갈 수 있는 것도.” 

“손톱을 다듬을 수 있는 것도.”

“따뜻한 실내에서 자는 것도.”      


일상의 기쁨을 최대치로 느낄 수 있다는 것. 그게 트레킹의 큰 장점 중 하나인 것 같다. 고로, 트레킹에서 가장 좋은 순간은 걷지 않는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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