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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 뒷담화 할 거면 나는 빠진다

by 강작

잠깐, 뒷담화 할 거면 나는 빠진다



쉬는 시간에도, 복도에서도, 하굣길에서도 그 애들이 내 뒷담화하는 소리를 들었다. 그들은 지들이 하고 싶지 않아서 뽑아놓은 반장 노릇 좀 잘 못했다고 나를 매 순간 조롱거리로 만들었다. 나보다 몸이 두 배나 큰 애, 머리가 남자처럼 짧은 애, 자기 말로 골반에 타투가 있다는 애 등등이었다. 서울 소재의 모 명문 고등학교에서 평균 95점을 맞으며 전교 10등을 놓치지 않았던 내 점수는, 평균 60점대 나락으로 떨어졌다. 그러나 나는 계속되는 괴롭힘 속에서도 웃었고, 그래야만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최근 모 사랑 찾기(?) 방송 프로그램을 보다가 한 출연자 여성이 그때의 나와 비슷한 걸 겪고 있는 꼴을 발견했다. 그녀가 이성을 선택하는데 시간을 들이고 행실을 똑바로 하지 않았다고 나머지 출연자들이 뒷담화하는 것이 그대로 방송에 담겼다. '와.. 미성년자도 아니고 다 큰 성인들이 저렇게 미성숙할 수가 있는가?' 하면서 나는 TV를 껐다.


대학생 시절에 아르바이를 여러 곳에서 했는데 그중 사회생활을 어떻게 해야겠다 하고 많이 배운 곳이 있었다. 치킨집도 아니고(치킨집에서 하진 않았지만), 영화관도 아니고, 전단지 알바도 아니었다. 그곳은 바로 약국이었다.


여러분이 좀 규모가 되는 약국에 들어가면 가장 먼저 보는 사람이 아마 아르바이트생일 것이다. 그는 환자에게 처방전을 받고 약국 전용 전산 프로그램에 처방전을 입력한 뒤, 그것을 약사에게 건넨다. 그럼 약사가 뒤에서 약을 조제하고 앞으로 넘긴다. 아르바이트생은 약을 받아 환자에게 계산을 요청하고 약사가 약에 대해 설명한다. 이것이 대표적인 루틴이고 그밖에 그들은 재고 정리, 청소 등등 잡다한 일을 한다. '내가 일했던 약국에서는' 잡다한 일 중.. 대표적인 것이 바로 약사들의 험담을 들어주는 일이다. 아, 그 약국은 대형 규모였고 연중무휴로 운영됐기 때문에 시간별로 많은 약사들이 일했다는 특징이 있었다. 또 동일한 특징을 가진 약국이라고 해도 뒷담화 없는 청정구역일 수 있다는 점, 그러므로 이것은 개인적인 경험에서 비롯된 개인적인 생각일 뿐이라는 점을 언급해 둔다.


스물두 살인 어린 아르바이트생은 다행히 그들의 타깃이 아니다. 더욱이 주말만 일을 했기 때문에 얽히고설킨 평일 직원들의 관계에 무지했다는 게 이유이기도 했다.


- 지혜 씨, 그거 알아? 김 약사 말이야. 진짜 너무 싫어.

- 이번에 들어온 남자 약사 있잖아. 냄새 너무 나지 않아? 나이트 하는 건 알겠는데, 씻곤 와야 할 거 아니야.


약이 만들어지는 분단의 벽. 그 너머에서 약을 설명하는 약사의 뒷담화가 이어졌다. 속삭였지만 김 약사는 다 알고 있었을 것이다.


아르바이트생은 나를 포함해 총 다섯 명이었다. 그런데 딱 한 달 뒤, 나만 살아남고 네 명은 잘렸다. 모두 본인이 그만둔다고 말했지만 거의 퇴출당한 거나 마찬가지였다. 왜 그들은 잘렸을까? 그들은 모두 뒷담화에 나와 다른 방식으로 대응했다. 뒷담화를 주도하는 약사의 말에 맞장구쳐 주며 급속도로 친해졌다. 그 모습은 필시.. 고등학생 때 나를 뒷담화하던 무리들의 모습 같았다. 끈끈하지 않고, 끈적한 관계.


반면 나는 가장 어리고 주말 알바라는 핑계로 내게 뒷담화를 해대면 모르쇠로 일관했는데, 그게 아마 살아남은 비결이지 않을까 싶다. 이를테면, '지혜 씨, 앞에 김 약사 있어? 뻔뻔하다 정말 너무 싫어.'하고 말하면 나는 웃으며 바쁘게 일을 해댔고 아무렇지 않게 앞에 있는 김 약사 옆에 가 다시 일을 했다. 그건 '여기는 일하는 곳이고 뒷담화 하는 곳이 아닙니다. 저는 중립을 지키고 싶어요.'라는 무언의 메시지였다.


그날은 김 약사와 나, 둘만 남아 저녁 마감을 하는 날이었다. 쓰레기통을 비우는 나에게 김 약사가 말했다.


- 나 다 들려.

- 네?

- 뒤에서 하는 얘기 다 들려.

-... 아 네.

- 지혜 씨한테 고마워.

- 뭐가요?

- 동참 안 하잖아. 다른 애들처럼. 그리고 내 옆에 와서 일부러 앉아 있는 거 알아.

-....

- 나한테 그거 엄청 힘이 돼. 고마워 지혜 씨.


고2 하굣길에 내 뒤를 낄낄거리며 걸어오는 아이들 앞에서 나는 당당하게 걸을 수 있었다. 애써 아무렇지 않게 웃고, 애써 당당하게 걸을 수 있었던 건 내 옆에 '조용하고 약해빠진 무리들'이라고 불리던 친구 셋이 함께 있어줬기 때문이었다. 당시엔 자존심이 상해서 왜 왕따인 내 옆에 있냐고 묻지도 않았고, 고맙다고 말하지도 못했지만 나는 그 애들이 아니었다면 아니었다면.. 무너졌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살다 보면 여러 이유로 남들에게 미움받는 사람들이 있다. 오해일 수도 있고, 성숙하지 못해 실수를 했을 수도 있고, 아무런 잘못이 없을 수도 있다. 그 어떤 이유든 그게 언젠가 당신이 될 수가 있다. 당신은 당신이 완벽하게 착한 사람이라고 생각해도 누군가는 당신에게 상처를 받았을 수 있고, 미워할 수 있다. 그 반대일 수도 있고. 그러니 우리는 뒷담화를 하는 순간부터 뒷담화를 당하는 꼴이 되는 것이다. 정말로 언젠가 그렇다.


그렇게 미우면, 차라리 앞에서 얘기하자.


- 나 네가 그런 행동을 보여서 불편하다.


만약 그게 안 통하면 그래서 더 미워지면 손절하자. 그 사람이 내가 손절하는 동안 부디 관계에 대해 성숙해지길 바라자. 그렇게 안된다면 그의 한계를 안타깝게 여기면 되는 것이다. 이러면 깔끔한 것을 내 입을 더럽게 만들고 사람들에게 그 더러움이 번지게 만들어 다시 자신에게 돌아오게 하는가.


ISTP인 남편에게 뒷담화의 심리에 대해 논의하니, 조용히 한 마디 던진다.



'참 사람들 피곤하게 산다'



그러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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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강작



故 백세희 작가님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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