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at. 윤동주 <별 헤는 밤>
계절이 지나가는 책장에는
책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나는 아무 걱정도 없이
책장 속의 책들을 다 헤일 듯합니다.
가슴 속에 하나 둘 새겨지는 책을
이제 다 못 헤는 것은
언제 이 책을 사서 읽었는지 망각한 까닭이요,
과거의 내가 친 밑줄과 끄적거림을 읽으며 상념에 젖은 까닭이요,
아직 나의 청춘이 다하지 않은 까닭입니다.
책 한 권에 추억과
책 한 권에 사랑과
책 한 권에 쓸쓸함과
책 한 권에 동경과
책 한 권에 시와
책 한 권에 책갈피, 책갈피 (책장 사이에 끼워져 있는 책갈피가 너무 많아!)
윤동주 <별 헤는 밤>을 떠올리며.
책장이 꼭 머릿 속처럼 꽉 차 있었습니다.
생각은 너무나 많은 요즘이고 어제 생각과 오늘 생각이 확확 뒤바뀌는데 제 책장은 물이 꽉 차 고여있는 연못입니다. 막혀있는 물꼬를 터 주고 물의 드나듦이 있는 개울이 되었으면 합니다.
알라딘 중고셀러가 되어보기로 합니다. 판매자가 되어보는 건 당근마켓 말고는 경험해보지 못했기에 무척이나 결심을 요하는 일이었지만, 생각보다 알라딘 중고셀러가 되는 것은 어렵지 않았습니다. 책 정보를 찾아 검색하고 책의 상태를 선택하여 가격을 책정하여 올리면 끝.
알라딘의 직배송 중고샵보다 보유하고 있는 책의 종류에 빈틈이 너무 많기에 과연 구매자가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가격을 최저가보다 더 최저가로 낮춰 올려봤습니다. 누군가가 제 서가를 들여다보다가 탐을 내주었으면 좋겠습니다.
- 내가 이런 책도 가지고 있었어? (샀는데 산 것을 까 먹은 책)
- 도대체 언제 이렇게 열심히 읽고 밑줄을 쳐 댄거지? (열심히 읽었지만 까 먹은 책)
- 내가 이런 생각을 했었다고? (영감이 떠올라 끄적였지만 역시 까 먹은 책)
팔 책과 팔지 않을 책을 구분하는 작업이 생각보다 더뎌집니다. 유혹에 못 이겨 사게 되는 신간들과 도서관에서 대출하는 책들에 밀려 정작 책장을 묵묵히 지켜준 '나의 책'들은 관심을 받지 못했거든요. 상태를 살펴보기 위해 묵은 먼지를 조심스레 닦고 페이지를 촤라락 넘깁니다. 태그 포스트잇이 덕지덕지 붙어있는 책이 발견됩니다. 밑줄과 생각을 끄적거린 흔적들에 시선이 멈춥니다. 조금은 부끄럽고 민망합니다.
'과거의 나'와 조우하는 순간입니다.
잊고 있었던 제 모습을 마주하는 것은 마치 지난 연인과 마주하는 상황을 떠올리게 합니다.
시선은 자꾸만 땅으로 떨어지고 심장박동수가 살짝 빨라지는 걸 느낍니다.
'그래, 한 때 이런 적이 있었지. 여기에 관심을 가질 때가 있었지...'
'이 문장에 공감했었구나.'
마치 오래된 앨범을 꺼내보는 것처럼.
그렇게 오랜 시간 '나의 책'들과 재회를 하고 인사를 합니다. 너무 많은 흔적을 남긴 책은 중고로 팔 수 없습니다. 그 책은 너무 '내'가 되어 있어서 다른 독자에게 흘러 가기에 무리가 있거든요. 이런 책은 내밀한 일기장과도 같아서 남들에게 보여줄 수도 없습니다. 오래토록 함께 하기로 합니다.
흔적은 거의 없지만 인상 깊게 읽은 책들도 꽤 많습니다. 읽었던 시간, 장소, 심리상태, 어쩌면 그 때 들었던 음악까지 어렴풋이 떠오르는 책도 있습니다. 다시 읽기에는 숨 가쁘고 많은 글이 넘쳐나는 시대입니다. 아쉽지만 보내기로 합니다. 잘 읽어 낸 책과 나는 헤어지지만 어떠한 결정체는 분명히 남을 것입니다. 책 속 문장들이 몸을 통과하여 한 때 동맥과 정맥으로 흘렀다면 그것으로 되었습니다. 문장들은 숨죽이고 있다가 언젠가는 삶에 대한 태도로써 발현 될 것임을 압니다.
'아차상' 같은 책들도 물론 있습니다.
호기롭게 구입했다가 어떠한 피치 못할 이유로 읽지 못하고 시간과 일상에 묻혀버린 망각된 책들이지요. 먼 훗날이 된 지금 다시 읽기에는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는 많이 달라져 있네요. 안타깝지만 끝끝내 인연이 이루어지지 않은 책은 어느 누구와 좋은 인연이 되길 바라는 마음입니다. 신간과 새로운 정보가 넘쳐 흐르는 시장에서 이 책들이 관심을 받기에는 역부족일 수 있겠으나 옛 책들을 종종 중고로 구입하는 저와 같은 부류의 사람들이 있는 한, 책은 느릿느릿하게 흐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책장 정리는 아직 진행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