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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병한 Jun 20. 2019

신에게서 인간으로

넷플릭스 오리지널 : 블랙미러

* 이 글은 넷플릭스 오리지널 <블랙미러 시즌 4: 시스템의 연인>의 스포일러를 담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도대체 어디서 어떻게 만나서 연애를 하는 거지?" 하는 의문을 품어본 적이 있는가. 남녀가 연애를 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그 인연을 생각해보면 어떤 관계든 정말 놀라울 따름이다. 가끔 외로울 때면 연애를 하는 그들이 부럽기도 하고, 자신과 잘 맞는 사람을 어떻게 찾는 건지 궁금하기도 하다. <시스템의 연인>은 그러한 의문에 해답을 제시한다.


소개팅을 시켜주는 AI 서비스가 있다. 이 서비스는 하나의 시스템으로, 가입자의 취향과 선호를 바탕으로 이성을 소개해주고 그 만족도에 따라서 교제 기간을 지정해준다. 기간이 끝나면 다시 교제했던 데이터를 분석하여 새로운 이성을 소개해주고, 같은 작업을 자신과 최적의 상대가 나타날 때까지 반복한다.


겉으로 보기에는 아주 편리하고 좋은 서비스인 것처럼 보인다. 귀찮고 면이 상하는 작업을 시스템이 대신해주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있다. 당신의 마음에 드는 상대를 만나도 시스템이 허가하는 교제 기간 동안만 만날 수 있다. 그것은 AI가 당신보다 당신을 더 잘 알기 때문일 수도 있고, AI가 당신을 잘 모르기 때문일 수도 없다. 어떤 이유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당신은 통제에 따라야 할 뿐이다.


<시스템의 연인>의 주인공 남녀는 위와 같은 문제에 직면한다. 서로 직감적으로 운명의 상대라는 것을 알아챘지만 시스템은 그들에게 하룻밤만을 허락한다. 그들은 서로에게 가벼운 육체적 쾌감으로 남고 싶지 않았기에 성관계를 맺지 않는다. 그리고 아침이 되자, 시스템은 정확하게 이별을 선고한다. 그들은 다른 사람을 소개받는다. 새로 소개받은 사람은 때로는 별로이기도 했고 나름대로 괜찮기도 했다. 그러나 그들은 서로를 잊지 못한다. 그들은 시스템에 저항하고, 결국 사랑을 쟁취한다.




우리의 운명은 정해져 있을까? 고대로부터 이런 질문에는 다양한 답변들이 있었다. 우선 운명이 정해져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결정론자'다. 극단적인 결정론자는 이런 말을 하기도 한다.


당신이 질병에서 치유될 운명이라면, 의사의 진료를 받건 받지 않건 간에 치유가 될 것이다. 하지만 치유되지 않을 운명이라면, 또한 의사의 진료와 상관없이 치유되지 않을 것이다. 결국 질병에 치유되거나 아니면 치유되지 못할 운명 둘 중 하나이므로 의사의 진료는 쓸모없다.

오리게네스(185?~254?)


정말 터무니없는 소리로 들린다. 오래된 결정론은 대부분 신과 관련이 있다. 모두 결정된 운명에 따라 살아간다면 그것을 결정해주는 존재, 즉 '신'을 상정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의 합리적 이성과 자유의지를 높이 평가하게 되면서 신과 관련된 결정론은 힘을 잃게 되었다.


근대에 이르러 인간의 이성은 과대평가되기 시작한다. 합리성으로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과학기술은 세계를 재창조하는 것처럼 보였고, 산업 혁명은 삶의 질을 획기적으로 개선하는 것처럼 보였다. 자연과학이 힘을 얻게 되자 세상은 자연의 인과 법칙에 의해 구성된다는 인식이 자리 잡게 된다. 기존과는 다른 결정론이다.


그러나 인간의 합리적 이성에 대한 믿음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끔찍한 전쟁과 학살을 겪으며 인간은 합리성에 대해 의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진짜 중요한 것은 신이나 어떤 합리적 선택이 아니라 개개인의 선택에 대한 존중임을 알았다. 사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은 고대, 중세, 근대에 빠져 살기도 한다. 그러나 정확하게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은 신이나 합리적 선택이 초래한 비극적 결말을 잘 알고 있다.


무엇보다 실존하는 주체로서 인간에 대한 존중이 중요하다. 그것은 각자의 상황에 맞는 스스로의 판단과 자유의지를 기반으로 한다. 우리에게는 어떤 본질도 주어져 있지 않다. 자유의지에 근거하지 않는다면 어떤 것도 정당화될 수 없을 것이다.


나는 모든 것이 운명적으로 예정되어 있고 그것을 조금도 바꿀 수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조차 길을 건너기 전에는 주위를 둘러본다는 것을 알아버렸다…. 우리는 모든 것이 이미 결정되어 있다는 생각에 근거해서 행동할 수 없다. 왜냐하면 어느 누구도 무엇이 미리 결정되어 있는지를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대신 우리는 우리가 자유의지를 갖고 있으며 우리 행위에 책임이 있다는 유용한 이론을 따라야만 한다.

스티븐 호킹(1942~2018)




<시스템의 연인>의 그들은 운명적인 사랑을 주체적으로 쟁취해냈다. 시스템이 결정해둔 운명에서 벗어나서 말이다. 결국 시스템의 운명은 쟁취해낸 그들의 사랑을 가리키게 된다.


당신은 어떤 사랑을 하고 있는가? 운명적인 사랑인가. 혹은 주체적인 사랑인가.

운명적인 사랑을 기다리고 있는가?

아니면 주체적인 사랑을 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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