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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병한 May 27. 2019

아이언맨

인피니티 사가

토니 스타크와 아이언맨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 저서 <시학>에서 비극과 희극의 차이를 말했다. "희극은 우리만 못한 인간을 모방하려 하고, 비극은 우리보다 더 나은 인간을 모방하려 한다." 그가 세상을 떠난 지 2000년이 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명제는 보편적인 이야기에 적용된다. 웃기고 재미있는 캐릭터는 보편적인 사람보다 못한 경우에 인기를 끌고, 삶의 수렁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캐릭터는 보편적인 사람보다 더 나은 경우에 인기를 끈다. 물론 예외는 있다. 지금 소개할 <아이언맨>이다.


스타크 인더스트리의 신형 미사일을 시연하는 토니 스타크


주인공 토니 스타크는 군수 사업으로 엄청난 돈을 버는 스타크 인더스트리의 CEO로 아버지에게서 회사를 물려받은 재벌 2세다. 이것만 봐도 이미 잘났다. 하지만 돈이 다가 아니다. 토니는 MIT를 수석으로 조기 졸업했고 수여한 학위만 4개가 된다. 그러니까 엄청나게 똑똑한 부자다. 보편적인 사람보다 훨씬 낫다. 이런 캐릭터는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비극의 주인공으로 적절하다. 그렇다면 <아이언맨>은 비극인가? 별로 그렇지 않아 보인다.


흔히 슬픈 이야기를 비극으로 웃긴 이야기를 희극으로 볼 수 있지만, 엄밀히 이야기하자면 그것은 옳은 방법이 아니다. 서구 철학 전통에서 이야기는 모두 주인공과 세계의 갈등이다. 이때 갈등에서 누가 승리하느냐에 따라 해당 이야기는 비극 또는 희극으로 분류된다. 주인공이 승리하면 희극, 세계가 승리하면 비극이다. 우리는 주인공의 입장에 자연스레 이입하기에 주인공의 승리를 기쁘게, 세계의 승리를 안타깝게 생각하게된다. 이러한 관점에서 굳이 분류하자면 아이언맨은 희극이다. 그것도 우리보다 나은 인간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희극이다.


그러나 감독 존 파브로는 캐릭터를 조금 다르게 바라보고 있었다. "토니 스타크라는 주인공 자체가 그리 호감 가는 인물이 아니다. 예를 들어 <스파이더 맨>의 피터 파커는 학교에서 왕따라 관객이 감정을 쉽게 이입할 수 있고, 다른 히어로들도 원래부터 영웅적인 사람들이다. 하지만 토니 스타크는 아이언맨으로 변화하기 전까지는 버릇없는 애처럼 구는 남자다. 그러나 자신을 재창조하면서 점점 마음을 바꾸어 나간다. 철갑 슈트를 만드는 게 바로 그것의 메타포다. 그리고 아이언맨은 마블 코믹스계에서 드물게 슈퍼파워가 없는 히어로다. 그는 자신을 스스로 히어로로 창조한 남자다."


존 파브로가 본 토니 스타크는 '엄청나게 똑똑한 부자'라기보다는 '애처럼 구는 남자'다. 또 '슈퍼파워가 없는 히어로'다. 심지어 영화 초반 신체적 결함까지 생긴다. 실제로 영화에서 토니는 아무리 돈이 많아도 해결할 수 없는 문제에 직면하기도 하고, 아무리 똑똑해도 해결할 수 없는 문제에 직면하기도 한다. 정말로 '슈퍼파워가 없고 애처럼 구는 남자 히어로'다. 게다가 토니의 앞에 놓인 문제는 자신에게만 국한된 문제가 아니다. 비록 의도한 결과는 아니지만 도덕성을 상실한 자신의 비즈니스로 인해 고통받는 사람들이 생겼고 괴물이 나타났다. 이에 책임감을 느낀 순간, 캐릭터는 변화했다.


MARK-3을 개발 중인 토니 스타크


'애처럼 구는 남자'와 '슈퍼파워가 없는 히어로'는 사라지고 엄청난 지능을 가진 슈퍼 히어로 '아이언맨'이 탄생한 것이다.


역설적이게도 우리가 아이언맨의 탄생 순간에 쾌감을 느낄 수 있는 이유는 토니 스타크가 '슈퍼파워가 없고 애처럼 구는 남자 히어로'였기 때문이다. 반대로 토니 스타크가 똑똑하고 돈도 많은 데다 도덕적이고 예의 바르며 첫사랑과 결혼에 성공하여 슬하에 1남 2녀를 둔, 말 그대로 완벽한 인간이었다면 어땠을까? 문제 상황을 설정하는 것부터 어렵다. 모든 것을 다 갖춘 사람 앞에 무엇이 문제가 될 수 있겠는가? 또 설령 어떤 문제 상황에 직면하더라도 그것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캐릭터의 성장이 일어나기 어렵다. 아무리 수를 써도 어린아이처럼 굴던 토니가 슈퍼 히어로로 탄생하는 장면에 미치지 못할 것이다.


존 파브르는 또 다른 인터뷰에서 이렇게 덧붙였다. "그는 부유하고, 잘나 보이며, 이성에게 인기 있으며, 재미있는 것들에 둘러싸인 상태에서 이 모든 책임감을 부여받았다. 어른이 될 시간이 온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우리가 이미 성인이지만 미성숙한 그를 만난 직후 그 매력적인 존재가 사라진다는 점이다."




아이언맨 슈트


아이언맨 슈트는 캐릭터의 변화를 나타내는 노골적인 상징물이다. 슈트는 미성숙한 토니 스타크로부터 슈퍼 히어로로 아이언맨을 창조해낸다. 어떻게 슈트가 사람을 창조하냐고 물을 수 있다. 물론 슈트는 토니 스타크의 창조물이다. 그러나 토니 스타크는 슈트 없이 아이언맨이 될 수 없다. <아이언맨 3>는 이 사실로부터 한 가지 의문점을 제시했다.


"슈트가 토니 스타크를 만드는가? 토니 스타크가 슈트를 만드는가?"


쉬운 답변은 다음과 같다. "토니 스타크가 슈트를 만들었고, 이후 슈트가 토니 스타크를 만들었다. 그러나 이후 토니 스타크는 또다시 슈트를 만들었다. 그리고 서사가 전개되며 슈트는 또 토니 스타크를 만들었다." 아마도 영화가 원한 답변은 적어도 이런 식은 아닐 것이다. 질문의 요지는 아이언맨의 정체성이 어디에 있는지에 대한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철학적 접근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사과 - 로봇 - 인간


어떤 대상의 본질에 대해 생각해보자. 먼저 사과를 예로 들어보자. 사과의 본질은 무엇인가? 사과의 본질은 먹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과가 썩어 더 이상 먹을 수 없는 상태가 되면 그것을 주저 없이 버리게 된다. 다음으로 로봇의 본질을 생각해보자. 로봇의 본질은 무엇인가? 로봇의 본질은 사람을 돕는 것이다. 로봇이 오류를 일으켜 사람을 해치는 상황이 닥치면 로봇을 파괴하는 행위는 정당해 보인다. 다음으로 당신의 본질을 생각해보자. 무엇이든 당신의 본질을 가정해보자. 그리고 당신이 그 본질을 수행할 수 없는 상태에 이르렀다고 생각해보자. 이때 당신은 살해되어도 무방한가? 아무래도 그렇다고 보기 어렵다. 사람은 단순히 기능을 수행하는 본질이 아니라 자신의 선택에 따라 살아가는, 실존하는 주체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생각을 실존주의라고 부른다.


실존주의의 맥락에서 다시 원래 질문으로 돌아와 보자. 아이언맨의 본질은 무엇인가? 슈퍼 히어로 아이언맨의 본질은 사람들을 위기에서 구하는 것이다. 만약 전투에서 부상을 입게 되어 아이언맨이 더 이상 사람들을 위기에서 구하지 못한다면 그를 살해해도 무방한가? 동의하기 어렵다. 그것은 토니 스타크가 아이언맨이기 때문이다. 아이언맨은 토니 스타크가 선택한 삶의 방식일 뿐이다. 때문에 그 방식을 이행하지 못한다고 해서 주체를 훼손하는 것은 용납될 수 없다. 그렇다면 아이언맨의 정체성은 어디에 있는가? 슈트인가? 토니 스타크인가? 실존주의의 관점에서는 아무래도 토니 스타크인 것으로 보인다. 정체성이란 실존하는 주체에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본질로 존재하는 객체에게는 자의식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정체성이 존재할 수 없다.


하지만 여전히 의문스러운 점이 남아있다. 토니 스타크가 더 이상 슈트를 만들 수 없는 상황에서 슈트가 망가진다면? 슈트가 없는 토니 스타크는 더 이상 아이언맨이 아니다. 어쩌면 토니 스타크는 토니 스타크일 뿐이고 슈트가 아이언맨을 만드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모두 다르게 생겼는데 왜 같은 사과일까?


다시 사과로 돌아가 보자. 여기에 사과가 많이 있다. 사과 A는 색깔이 좀 푸르스름하다. 사과 B는 빨갛게 잘 익은 사과이고 사과 C는 다른 것들에 비해 크기가 조금 작다. 사과 D는 누가 집어던졌는지 한 귀퉁이에 멍이 들어 물러져있다. 이때 사과 A, B, C, D는 모두 다르게 생겼음에도 왜 사과라고 부를 수 있을까? 어떤 철학자들은 우리가 '사과'라는 단어를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들은 구조주의자다. 구조주의자들에게 세상은 의미와 구조로 양분되어 있고, 의미는 구조의 지배를 받는다. '사과'라는 같은 단어를 공유하기 때문에 사과 A, 사과 B, 사과 C, 사과 D가 각각 의미하는 것이 다르더라도 같은 '사과'로 인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번에는 구조주의적 시각으로 생각해보자. 아이언맨은 어떤 방식으로 표현되는가? 그것은 너무나 명쾌하게도 슈트다. 포털 사이트 검색창에 아이언맨을 검색하면 슈트의 이미지가 나타나는 것이 그 증거다. 의미는 구조의 지배를 받기에 구조주의적 시각에서 아이언맨은 슈트다. 하지만 역시 어딘가 꺼림칙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토니 스타크가 없다면 슈트는 애초에 만들어질 일이 없지 않은가?


슈트를 모두 잃은 토니 스타크


슈트인가? 토니인가? 정답을 알 수 없는 문제에 대해 <아이언맨 3>는 어떠한 해답도 제시하고 있지 않다. 다만 이러한 아이디어를 영상으로 적실히 재현해냈다. 영화를 보며 직접 고민해보자. 아직 영화를 접하지 않은 사람이 있다면 <아이언맨>부터 차례로 볼 것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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