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현재의 개신교 교파는 어떻게 나뉘었을까?
Go into the whole world and proclaim the gospel to every creature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하라
예수의 지상명령이라고 하는 마가복음 구절에만 집중한 기독교는 로마를 통해 성장했고 종교로서 자리를 잡습니다.
그로 인해 예수가 이야기한 하나님의 나라와 사랑을 잃게됩니다.
기독교가 전세계적으로 부상한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습니다.
처음부터 복음전파를 중시하는 발산의 종교로 근대이전의 기독교는 유럽에 국한되어 있었습니다.
제국주의시대 선교사와 상인과 군인은 각자 역할은 달랐지만 자국의 세력팽창이라는 목표는 동일했고 기독교를 자발적으로 수용하는 경우에도 기독교 자체의 매력 외에 유럽 문화에 대한 동경도 대단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발산은 결국 무모한 분출로인해 스스로의 함정에 빠지기 시작했고 결국 끝없이(?) 퍼져나가기는 하지만 반대론을 계속해서 키워나가면서 수렴하지 못하는 종교의 한계를 보이고 있습니다.
문제점이 발생하는 지점마다 기독교는 분열과 쇄신을 추구했지만 역부족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종교 개혁 이전의 카톨릭의 분열
종교개혁 이후 완벽하게 갈라선 Roman Catholicism 카톨릭 교회와 Protestantism 개신교 교회가 있기 전에도 초기 교회에서는 2세기 급진적 바울주의, 3세기 배교자의 회개, 4세기 예수의 격이나 5세기 마리아의 정체성, 11세기 성령의 해석 문제로 분열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한국에서 개신교 교단 232개로 분리(2013년 현재)된 이유와는 사뭇 다르게 성경 해석의 차이로 갈라서거나 축출되었습니다.
2세기 중엽에 직통계시, 금욕주의, 종말론을 앞세우며 급진적 바울주의가 등장하는데 구약의 하나님은 진노와 심판이 많아 신약의 하나님과 차이가 크므로 바울서신과 누가복음만 정경으로 인정 할 수 있다고 주장했던 Marcion of Sinope 마르시온은 교회에서 방출되어 추종자들은 유럽과 소아시아에서 2,300여년간 활동하다 소멸하고 직통계시를 받고 Montanus 몬타누스는 그의 고장 페프자에 예수가 재림하여 나라를 세운다는 시한부 졸말론 제기하다 축출당하게 됩니다.
이어서 교회 박해 기간 이었던 3세기까지는 로마의 기독교 박해중 고통으로 배교한 사람들을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회개를 하면 받아들이자는 신앙을 끝까지 지킨 고백자들과 엄격한 기준으로 심사해야 한다는 교회 성직자들간의 대립이 분열을 가져옵니다
313년 Constantinus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Edictum Mediolanense 밀라노 칙령을 반포해 그리스도교를 공인하며 유대 식민지 백성의 종교가 세계 제국의 종교가 되고, 노예의 종교가 황제의 종교가 됩니다.
이 시기에 대두된 문제는 Homoousios 호모우시오스 ( 동일한 본질의란 뜻으로 성부 하나님과 로고스-아들-의 관계를 동일본질론이라고 풀이)로 성부하나님과 성자 하나님의 동일격 여부로 오늘날까지 이단 논쟁의 화두죠.
당시도 알렉산드리아의 입장은 예수가 완전한 신이 아니면 십자가에 달린 그의 죽음이 인류의 죄를 씻어내기에 부족하다는 ‘예수=성부하나님’를 주장한 반면 Antioch 안디옥의 Arius 아리우스는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로 아버지와 아들이 같지 않다고 주장 합니다.
이러한 예수의 정체성에 대한 아리우스의 주장을 콘스탄티우스 1세는 이단으로 규정하고 배척하지만 여전히 전 로마제국을 지배할 만큼 세력을 떨쳤고 콘스탄티우스 2세 때 아리우스파는 ‘성자는 성부와 같지 않다’라고 과격한 입장을 선언하여 온건파를 자극하기도 하였으나 황제의 죽음으로 급속도로 몰락하고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서기 381년)는 니케아 신경을 재확인하고 아리우스파 문제에 종지부를 찍게 됩니다.
그뒤로도 아리우스파는 제국의 북쪽 게르만인들 사이에 널리 퍼져 게르만인의 민족적 종교라고도 할 만한 위치를 얻습니다.
5세기가 되자, 이번에는 태중 예수를 인태중인 마리아의 정체성분제가 도마위에 오릅니다.
Alexandria 알렉산드리아 대주교 Kyrillos 키릴로스는 성모 마리아는 하나님의 어머니라는 의미로 마리아 태중 존재는 당연히 하나님을 주장하고 이에 맞서는 Constantinople 콘스탄티노플 대주교 Nestorius 네스토리우스는 인간인 마리아의 뱃속에 ‘성육신’한 인간이라고 주장합니다.
결국 네스토리우스파 사람들은 콘스탄티노플에서 축출되어 현재 튀르키에 아래 이란 지역에 자리를 잡으며 현재 ‘동방교회’ 라고 부르는 시리아 교회(오리엔트 교회, 앗시리아 교회)로 정착하게 됩니다.
이제 카톨릭이 가장 큰 분리를 하게되는 시기는 1054년으로 동, 서방 교회의 분리합니다.
제국이 날로 쇠퇴해가던 394년,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두 아들에게 제국을 동로마와 서로마로 분할하여 동로마는 콘스탄티노플을 수도로 하여 중세 말까지 1,000년 동안 이어졌으나, 서로마는 476년 게르만인 용병대장 오도아케르에 의해 멸망합니다.
Nicaea 니케아(현재, 튀르키예 북서부에 있는 이즈니크 Iznik), Ephesus 에베소, Chalcedon칼케돈 모두 같은 입장을 공유하지만 이후 (니케아 신경 중) 성령이 존재하는 이유에 대해 미세한 입장차를 보이며 벌어지기 시작합니다.
성자는 성부로부터 낳음을 얻으시고 성령은 성자로부터 발출 되었다.
즉, 성자는 사람이 아이를 낳는 형태로 잉태되어 태어난 것이고 성령은 마치 가스가 분출하듯 발출된다고 주장한 이래로 서방교회가 동방교회와 상의 없이 ‘Deum de Deo 데움 데 데오(하느님에게서 나신 하느님)’, ‘Filióque(성자에게서라는 뜻으로 이 단어의 삽입으로 해당 문장은 성령이 성부에게서 뿐만 아니라 성자에게서도 발하신다는 뜻)’라는 말을 신경에 삽입합니다.
데움 데 데오은 본래 325년 니케아 신경에 있던 구절을 되살려 놓은 것이므로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필리오케는 성령은 성부하나님과 성자하나님 모두에게서 발출되어 급이 정해지는 상황입니다.
이러환 틈은 콘스탄티노폴리스가 뭐라고 하건 말건 처음부터 끝까지 교황의 수위권만을 주장하는 서방교회와 강력한 권력을 가진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의 동방교회는 1054년의 상호 파문 사건으로 분열하여 로마카톨릭과 동방정교회로 분열되어 오랜시간 서로의 교류가 이전처럼 지속되지 못해 결국 완전한 분열로 이어지게 됩니다.
카톨릭과 개신교 분리와 기억해야 할 3인의 종교개혁자
중학교에서 고등학교까지 중등교육과정에서 종교개혁하면 떠올르게 배웠던 인물이 루터인데 이 사람과 더불어 생각해야 할 사람은 쯔빙글리이고 두 사람보다 현대 개신교의 입장에서 강력한 위치를 차지하는이는 칼뱅입니다.
18세기 본격적인 교파분열 전 카톨릭에서 일어난 종교 개혁은 14세기 르네상스로 부터 시작이 됩니다.
14세기~15세기 르네상스시대에 각나라사람들이 자신의 나라에 대한 자의식이 생기기 시작합니다.
각 나라 말로 문학뿐 아니라 성경번역, 예배를 하며 민족주의가 드러나게 되지만 여전히 로마교황청을 위시한 절대권력이 존재하기에 각 나라마다 존재하는 교회들과의 틈이 벌어지게 되는데 이 선봉에 나섰던 사람이 14C 영국의 신학자, John Wycliffe 존 위클리프입니다.
영국 교회와 왕실이 로마 교황청으로부터 모욕을 당하는 모습을 보면서 영국인 입장에서 신학의 경향을 가지고 있었던 위클리프는 그러한 관점으로 보니 교회의 부패가 보이는데 가장 심각한 문제가 사제의 타락 이었다고 생각하며 타락의 주요 원인은 성경을 읽지 않기때문이라고 주장합니다.
당시 성경은 있었지만 성경은 라틴어로 쓰여 있었고 모두 양피지에 필사하던 상황으로 성경 1권 150마리 양의 양피지가 들어갈 만큼 필사 자체는 엄청난 재정이 필요한 일이었죠.
위클리프 사망 후 그의 생각을 잇는 사람들을 Lollards 롤라드파로 영국 내에서 개혁을 주장 했고 이는 후에 Puritans 청교도로 발전 하게됩니다.
이와 함께 당시 영국 왕실이 보헤미아(지금의 체코)와 혼례가 이루어지며 보헤미아의 청년들이 영국으로 유학을 하며 위클리프의 사상을 자국에 전하게되며 위클리프파가 이를 이어가고 이와 함께 타락한 성직자들에 대해 부패와 타락을 비판하던 신학교수이자, 신부였던 얀 후스 역시 꾸준히 교회개혁을 주장하다 이단으로 몰려 화형 당합니다.
체코에서는 얀 후스의 영향을 받은 이들이 새로운 교회를 설립-보헤미안 형제회(Böhmische Brüder-Unität)-하여 그 정신이 이어오다 18세기 Moravian 모라비안 교회와 경건주의에 영향을 미치게 되고 위클리프와 얀 후스의 정신은 16세기, 1517년 마틴 루터에 의해 새롭게 각인 됩니다.
16세기 Martin Luther 마틴루터는 면죄부와 교황권에 대해 꾸준히 문제를 제기합니다.
그리고 이 모든 타락의 원인은 성경을 상실했기때문이라고 주장 합니다.
그러면서 유클리프가 했던것처럼 독일어로 성경을 번역하고 그를 예배시간에 가르쳐야 한다고 주장하며 독일교회가 종교개혁의 선봉에 서게 됩니다.
반면, 스위스 제네바를 중심으로 인문주의에 영향을 받은 Ulrich Zwingli 울리히 쯔빙글리는 시의회를 동원해 카톨릭 사제들과 신앙논쟁을 하며 스위스에 개혁교회를 출연시킨다.
루터에게는 독일농민운동을 이끌며 저항한 토마스 뮌처 Thomas Müntzer가 있었고, 쯔빙글리에게는 개혁의 투명성을 강력히 요구하고 나선 소장파 급진 개혁그룹 ‘스위스 형제회 the Swiss Brethren'가 있었습니다.
루터와 쯔빙글리와이 차이는 성경의 해석에 있는데, 쯔빙글리는 성경이 하라고 한것만 하고 언급이 없으면 하면 안된다고 해석한 반면, 루터는 하지말라는 말이 없으면 해도 된다고 해석해서 종교 음악도 쯔빙글리를 계승한 교회는 뛰어난 음악성을 지닌 바이올리니스트였지만 이를 접었던 것만큼 단조로운 음악이 주를 이루고 반대로 루터파는 화려한 종교음악을 발전시켰습니다.
쯔빙글리의 영향을 받은 Conrad Grebel 콘라드 그라벨, Felix Manz 펠릭스 만츠는 쯔빙글리의 성경 읽기를 극단적으로 끌고가 정부 관리들은 당시 세금 징수를 위한 신생아 출생의 유일한 근거로 삼아온 '유아 세례'를 부정하며 성경에 없는 유아세례를 반대하는 Anabaptists 재셰례파(스위스 형제단)는 정부와 카톨릭으로부터 핍박을 받아 연명하다 미국, 러시아로 넘어가 Menno Simons 메노시몬스의 Mennonite 메노나이트, Amish 아미쉬 공동체(필라델피아 중심), Hutterite 후터라이트 교회로 이어집니다.
종교 개혁을 하며 카톨릭과 싸우게되면서 새로운 이슈들이 터져 나오고 각 사안에대해 많은 글을 장황하게 쓰며 논쟁을 버렸던 이전 개혁자들과 달리 Jehan Cauvin 쟝 칼은 개혁의 이슈(카톨릭과 개신교가 무엇이 다른가?)를 수 많은 종교 개혁자들의 글을 정리해서 모든이가 1시간이면 읽을 수 있게 하나의 참고서인 「기독교 강요 Christianae Religionis Institutio」를 집필하게 됩니다.(1541년)
그렇게 스위스 제네바에서는 쯔빙글리 외에 법학에서 신학으로 전향한 천재 프랑스인, 쟝 칼뱅이 기독교 강요를 통해 일약 스타덤에 오르면 종교개혁의 중심으로 자리 잡습니다.
이 가이드와 함께 1559년 Université de Genève 제네바 대학을 설립해 전 유럽에서 종교개혁을 공부하려고 몰려든 사람들에게 이를 가르쳐 영국, 네덜란드, 프랑스에서 이를 전파해 이 전의 루터, 후스, 유클리프등이 가졌던 문제의식을 가지고 각자 나라의 카톨릭안에서 Nederlandse Hervormde Kerk 네덜란드 개혁교회, Huguenot 위그노(프랑스 개혁교회), 스코틀랜드 장로교회, 잉글랜드 청교도운동등 새로운 교회를 설립하게됩니다.
∨ 1534년 프로테스탄트와 로마카톨릭의 중간, Anglicanism 성공회
잉글랜드의 헨리 8세는 처음에는 종교개혁을 강하게 반대한 신실한 카톨릭 신자였습니다.
아내 Catherine 캐서린의 불임과 캐서린의 시종을 들던 Anne Boleyn 앤불린과의 불륜등으로 로마 교황청에 혼인 무효를 요청했으나 거절되자, 당시 루터, 쯔빙글리의 새로운 개혁을 표방하며 스텝들은 헨리 8세를 부추겨 성공회의 탄생을 합니다.
개인적인 이혼문제로 시작되었지만 로마 교황청과의 관계를 단절하고 영국 교회를 관리하는 모든 권한이 국왕에게 있음을 선포한 Acts of Supremacy 수장령을 발표함으로 Church of England 영국국교회가 탄생된것입니다.
제도적으로 로마 카톨릭을 따르고 신학과 교리적으로는 칼뱅과 루터 신학을 받아 들입니다.
이어 여왕으로 등극한 엘리자베스 1세는 극단적 카톨릭과 극단적 개신교를 탄압하는 중도 노선(Via Media)을 걷게 됩니다.
하지만 이런 중도정책은 칼뱅신학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려던 사람들에의해 청교도를 만들게 됩니다.
칼뱅의 중심사상에는 교회 전부를 성직자가 끌고 가는것이 아니라 성직자외의 일반성도가 함께 하는것인데 영국국교회의 제도는 카톨릭의 것과 같기때문이죠.
(총대주교-주교-사제-부제)
Puritan 淸敎徒 청교도는 다시 교회운영 정치체계의 형태로 장로와 목사 중심의 당회가 교회를 이끄는 Presbyterianism 장로교, 목사와 회중이 함께하는 Congregational Church 회중교, 회중교의 운영을 따르지만 세례는 고백자만이 받을 수 있다는 baptist 침례교로 분화하게 됩니다.
본격적인 개신교의 분열
옥스포드 출신 성공회 사제였던 Fr. John Wesley 존 웨슬리는 영국 성공회가 침체되었다고 판단하여 영적 각성의 복음주의 운동을 일으킵니다.
사람이 거듭나고난 후에 성화를 위해 더욱 달려야한다
즉, 거듭남의 고백에서 멈춰서는 안되며 성화 혹은 성결, 완전한 성화, 완전한 성결을 추구해야한다는것 입니다.
당시, 영국이 미국 식민활동 중이라 웨슬리의 후예들이 다수 넘어가 조지아나 버지니아등의 남부에 주로 정착해서 활동을 하다가 1775년 독립전쟁이 시작되자 미국의 독립을 반대하던 왕당파 성공회 사제들이 본국으로 돌아가면서 영국 국교회와 단절하며 미국 성공회를 설립하거나 많은 이들은 미국 성공회를 따르지 않고 1784년 미국 감리교를 탄생시킵니다.
그리고 미국 감리교는 100년뒤 미국내 최대 교단이 되죠.
하지만 미국의 감리교는 웨슬리가 주창했던 모습과는 다른 모습으로 정착하게 되는데 원래 웨슬리는 성화를 강조하여 성화를 위해 성경의 역사를 비중있게 다루고 특별히 가난한 사람들, 사회적 약자에 대한 관심이 컸지만 미국의 감리교는 급격히 성장하는 과정에서 이 부분이 희석되어 버리는데 가진자들의 교회가 되어갔기때문입니다.
미국 남부에 정착한 미국 감리교는 이 지역이 전 세계에서 목화 농장이 가장 발달한 지역으로 그 농장의 노동자들은 서아프리카에서 강제로 끌고왔던 흑인 노예였고 그것이 미국남부경제의 근간인지라 처음에는 노예제도를 반대하던 목소리를 내던 감리교가 시간이 흐르며 사회분위기에 압도되어 노예제도에 침묵하고 노예제도를 정당화하게되는 설교를 하게됩니다.
이것에 대해 Orange Scott 오렌지스콧 목사를 중심으로한 감리교 목사들이 노예제도 옹호는 감리교 중심이 왜곡된것이라 주장하자 파송제도로 목사들을 파소했던 감리교는 이 목사들을 오지로 보냅니다.
하지만 여기서 중단된것이 아니라 이 모임은 감리교 본래정신인 노예제도를 반대하는 교회인 웨슬리안 감리교(Wesleyan Methodist Church)가 만들어 집니다.
다른문제로 교회를 운영하는데는 운영비가 필요한데 잔 세계에서 헌금을 가장 많이 거둬들이는 우리나라에서는 별 문제가 되지 않지만 헌금을 잘 하지않는 미국에서는 교회의 운영비가 교회운영에 큰 이슈중 하나였습니다.
그러다보니 미국은 교회운영자금을 교회의 회중석을 극장식으로 분할해서 렌트를하는 회중석 대여제도가 있었습니다.
연말이되면 다음해의 좌석을 돈을 내고 사게되는 구조로 이러한 모습은 19세기 미국의 모든 교회들이 채용했던 방식으로 미국의 감리교회도 수용하고 이있었는데 Benjamin Titus Roberts B. T. 로버츠라고하는 감리교 목사가 이것이야말로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에게 복음을전하는 웨슬리로부터 벗어난것으로 회중석 대여 운동을 전개하자, 교회입장에서 불편한 사람으로 간주하여 쫓아내었고 그는 Free Methodist Church 자유감리교를 결성하게 됩니다.
같은 이유로 Church of the Nazarene 나사렛 성결교가 새롭게 결성되는데 나사렛이라는 말 자체가 가난한 사람들이 살던 동네라는 메타포이고 그래서 이 교회의 사람들은 교회에 올때 화려한 옷이나 장신구를 배제하고 헌금도 상한선을 두게 됩니다.
비슷한 시기에 영국에서는 감리교 운동을 하던 분들 중 런던의 가장 빈민들이 모여 살던 곳에서 그들을 대상으로 복음을 전하는 일종의 민중교회가 만들어지는데 바로 The Salvation Army 구세군입니다.
빈민가는 매우 험하고 위험한 곳으로 교회시스템을 군대제도로 만들었는데 홍회장을 총사령관으로 칭하고 성직자들을 사관이라 칭하며 군복을 입고 복음을 전하게 되는데 이 역시 웨슬리 정신이라 할 수 있습니다.
즉, 성공회에서 감리교와 구세군을 파생 시키고 감리교는 다시 웨슬리안교회와 자유감리교회, 나사렛 성결교로 분화했는데 모두 사회적 약자에 대한 관심이 흐려지면서 분열하게 된 것입니다.
성령을 즉각적으로 받을 수 있고 즉각적으로 성화될 수 있다
19세기 말 감리교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 안에서 성령을 강조하는 사람들이 나타나는데, Phoebe Palmer 피비 팔머는 자신의 집에서 기도회를 열고 기도회는 일종의 부흥운동의 진원지가 되면서 미국과 전 세계로 확장됩니다.
그렇게 팔머를 따르는 사람들이 성결 운동을 하게 됩니다.
성결운동은 결과적으로 「성령세례를 받으면 즉시 성화 될 수 있다」
심지어 「우리안에 있는 죄성의 뿌리들을 제거해서 온전한 성화가 이루어 질 수 있다」 고 주장합니다.
이러한 운동이 장로교, 침례교로 확장되면서 한편으로 감리교 주류의 입장과 충돌하게 됩니다.
후에, 이 그룹은 세대주의적 전천년설(대혼란 이전에 휴거가 일어나고 예수재림 후 처년왕국이 도래)이라고 하는 급진적 종말론도 받아들이고 믿음으로 병을 고친다는 신유교리도 받아들이며 편향이 심화됨을 이유로 1894년 감리교 주류로부터 방출되면서 Pilgrim Holiness Church 필그림 성결교회등 수 많은 파생 교회가 생기고 이 교회 중 일부가 후에 한국으로 넘어와 성결교회가 됩니다.
성결교회는 감리교와 같은 뿌리를 가지고 있지만 성령을 더욱 강화하고 즉각적 성화와 예수의 즉각적 재림, 믿음을 통한 질병치유라는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성결운동 중 새로운 가지가 나오는데, 성령을 강조하는 사람들 중에 기도집회를 하다가 방언이 터집니다.
1901년 새벽 토파카라는 지역에서 베델 성서대학을 설립한 감리교 출신 목사, Charles Fox Parham 찰스팔머가 집도한 송구영신예배에서 기도하던 학생들 중 성령을 받게 해달라는 한자매의 이야기에 안수하자, 자매는 중국어로 기도를 하게 됩니다.
파럼은 성경 연구를 통해 「성령을 받으면 권능을 얻고 권능을 받으면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되고(…) 그런데 성령을 받은지 받지 않았는지를 알 수 있는 방법은 사도행전 2장 1~4절에서처럼 방언을 하게 된다」 고 정리하게 됩니다.
이를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늘어나게 되고 성결교회안에서 방언을 성령세례의 증거로 인정하는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간 분열이 생깁니다.
성령세례를 받으면 죄성이 제거되어 성결한 사람이 된다는 것까지 주장하는 이들은 성결교인으로 남게되고 이에 더불어 이것이 성화, 성결이고 성령세례는 다르다(성화후 성령 세례를 받으면 권능을 받고 복음 전하는 사람이되는데 그것의 증거가 방언)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새로운 교회(Church of God 하나님의 교회, Pentecostalism 오순절교회, Assemblies of God 하나님의 성회)를 만듭니다.
그리고 이 중 가장 큰 하나님의 교회는 기독교 하나님의 성회(순복음 교회)가 됩니다.
⭑ John Wycliffe 존 위클리프 - 영국의 선구적 종교개혁자. 교황에 대한 공세(貢稅)를 반대하고 특히 교회령 재산에 대해 공격하였다. 성직자의 악덕을 비판하는 등 교회개혁 운동에 앞장섰다.
중세 교회개혁 운동이 신비주의건 수도회주의건 간에 기존질서를 인정하며 도덕성회복에 치중한 반면 위클리프와 그의 뒤를 이은 얀 후스와 마르틴 루터는 중세 신학이 잘못되었고 잘못된 신학이 교회를 잘못된 방향으로 이끈다고 주장함으로 종교개혁 운동을 이끌었다. 1384년 사망
⭑ Jan Hus 얀 후스 - 보헤미아 왕국의 체코인 종교개혁자로, 16세기에 활동한 마르틴 루터보다 100여 년 앞서 활동한 종교개혁의 선구자격인 인물이다.프라하 카렐 대학교의 신학교수 및 총장을 역임했던 그는 당대 가톨릭 교회의 문제와 부패를 비판하며 이에 대한 대안으로 성경의 절대적 권위를 강조하였다. 얀 후스는 콘스탄츠 공의회에서 이단으로 낙인찍혀 화형당했지만, 그의 사상을 계승한 후스파(Husité)는 지금까지도 현존하고 있다.
⭑ Pietism 경건주의- 17세기 형성된 유럽 개신교회의 종교운동이다. 16세기 종교개혁 이후 유럽 사회는 정치, 경제, 문화에서도 로마 가톨릭과 개신교의 대립으로 구분되었다. 이 상황에서 대부분이 기독교인이었던 유럽사회에서 교인이 교리적으로 어디에 속하는지에 대한 질문은 매우 첨예화하였다. 로마 가톨릭 교회와 개신교 교회의 대립은 점차 개신교회에도 교리적 강조에 중점을 두게 되었고, 제도중심화 과정을 겪게 하였다 (개신교 정통주의). 이런 개신교회의 제도 중심화, 교리 중심화에 대한 반성이 나타났고, 이 반성은 독일 개신교회인 루터교회의 내부에서 발생하여 점차 전 유럽의 개신교회로 퍼져갔다.
⭑ 칼뱅 사상의 특징 중 하나로 다섯 솔라(Five Solas)
오직 성경으로만 (Sola Scriptura) 오직 그리스도로만 (Solus Christus) 오직 은혜로만 (Sola Gratia) 오직 믿음으로만 (Sola Fide)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 (Soli Deo Gloria)
칼뱅의 독자적인 내용은 아니며 루터의 세가지 솔라 오직 믿음, 오직 은혜, 오직 성경을 받아들였고 츠빙글리의 오직 그리스도를 받아들여 이에 더 추가하여 개신교 교리의 핵심을 이루는 부분. 정확히 말하면 다섯 솔라는 원래 루터가 주장한 것을 칼뱅이 받아들인 것이라 튤립 교리와는 달리 다른 개신교 교파들도 동의한다. 바흐와 헨델이 악보 맨 밑에 서명과 함께 S.D.G.라고 적었다는 유명한 일화도 있다.
⭑ 니케아 신경 Symbolum Nicaeano-Constantinopolitanum
우리는 한 분이신 하느님을 믿는다.
그분은 전능하신 아버지이시며, 유형무형한 만물의 창조주이시다.
그리고 우리는 한 분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
그분은 하느님의 외아들이시며,
아버지에게서 나셨으며,
곧 아버지의 본질에서 나셨다.
하나님에게서 나신 하느님이시며,
아버지와 본질에서 같으시다.
그분으로 말미암아 만물이,
하늘에 있는 것들이나 땅에 있는 것들이 생겨났다.
그분은 우리 인간을 위하여,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내려오시어 육신을 취하시고, 사람이 되셨으며,
고난을 받으시고,
사흗날에 부활하시고,
하늘로 올라가셨으며,
산 이와 죽은 이들을 심판하러 오실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성령을 믿는다.
“그분이 존재하지 않은 시대가 있었다.”, “나시기 전에 존재하지 않았다.”하고 말하는 사람들을,
또는 비존재에서 생겨났다거나, 다른 히포스타시스(hypostasis) 또는 우시아(ousia)에서 존재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또는 하느님의 아들은 창조되었으며, 변할 수 있으며, 달라질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보편되고 사도로부터 이어오는 교회에서 파문한다. - 이단 파문에 관한 신학적 선언(밑줄)은 최초의 니케아 신경에는 없었던 것이나, 후대에 추가된 것으로 추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