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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rchitect shlee Mar 07. 2016

음식문화 I 음식이란...

근현대 정책으로 만들어지고 언론과 SNS에의해 꾸며지는 최근의 음식문화

음식이란게 과연 무엇일까.


맛있는 음식을 먹는건 기다림이다.

쑥국을 먹기위해 봄을 기다리고 수박을 먹기위해 여름을 기다린다.

송이향을 맡기위해 가을을 기다리고 하얀 굴 빛깔을 보기위해 겨울을 기다린다.

그러다보면 계절이 바뀌고 해가 바뀐다.


맛있는 음식이란 단순하고 명료하다.

입을 즐겁게 해 주는 일.

사실, 가만히 따져 본다면 이는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정성드려 좋은 재료를 구하고, 정성드려 만들다보면 그 안에 자연스레 맛이 밴다.

인간은 누구나 맛있는 음식을 먹고 싶은 욕구를 가지고 산다.

맛있는 음식을 보는것만으로도 마음이 들뜬다.

이런 일반적인것 외에도 음식에는 많은것들이 숨어 있다.


음식에는 살아가는 환경이 담겨 있었다.

흑산도에는 홍어가 나고 지리산에는 산채가 나고 제주에는 귤이, 보르도에는 와인이 난다.

음식을 따라가다보면 삶을 볼수 있었다.

입맛의 맛만을 따지다보면 그 음식에 담긴 진정한 의미와 멋을 잃어버리기 쉽다.

맛이란 입안의 즐거움뿐만 아니라 시각과 후각이 같이 놀아야 그 느낌을 알 수 있고 음식이 갖는 유래, 함께 먹는 사람들, 분위기등이 어우러져 하나의 맛이 완성된다.

어떤 음식이든 결코 어느날 하루 아침에 만들어지는 법이 없다.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음식문화의 전통 속에 우리 밥상의 한 귀퉁이를 차지하게 되는것이다.

1900년대 이래 경성의 식당업은 세계화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일본요리집이 지금의 용산과 명동 일대에 자리를 잡았다.

청요리옥은 덕수궁 남쪽에서 남대문 사이에 자리를 잡았다.

이에 비해 조선요리옥은 종로 이북에서 성업을 했다.

물론 각종 국밥집이나 선술집들이 북촌 일대는 물론이고 멀리 신당동까지 진출하기도 했다.

그만큼 사대문 안의 한양에 비해 경성이 그 도시적 면모를 확장시킨 결과였다.


일본의 도쿄와 오사카를 경유해 경성에 도착한 카페의 붐도 1920~30년대 또 다른 한 면모였다.

같은 시기에 청진동엔 內外酒店내외주점이 성업을 이루고 있었다.

(내외주점은 여자가 영업을 하건만 남자 손님과 대면을 않는 곳이다.)

다방도 경성의 여러 곳에서 서양 클래식 음악과 함께 문인과 지식인을 매료시켰지만, 카페 역시 내외주점이나 선술집과 다른 묘미를 식민지 남성들에게 제공했지만 이는 오로지 도시의 신남,여성에만 한정됐다.

1939년부터 일본의 전쟁 야욕이 시작되자, 조선총독부는 절미운동을 시작했다.

비록 생활개선운동이란 이름으로 조선총독부는 농어촌의 증산에 박차를 가했지만, 사정은 그렇게 쉽지 않았다.

1920년대부터 농어촌은 경제적으로 피폐해져 죽으로 보릿고개를 넘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조선총독부의 절미운동은 쌀 이외의 곡물로 밥을 짓도록 하는 혼식 장려로도 이어졌다.

심지어 밀가루를 이용해 쌀알을 만들어 대용식으로 먹도록 권장하기도 했다.

해방이 되자 혼란한 틈새에서 쌀값은 하늘보다 더 높이 솟았다.  

미 군정청에서는 1946년 6월 미국 잉여농산물의 피점령지역 구호원조라는 명목으로 미국의 잉여농산물을 도입했다.

이때 들여온 밀은 서울과 인천 시민들에게 쌀 한 홉과 함께 매일 120g씩 배급되었다.

이때 설렁탕에는 밥이 들어가지 않고 밀국수만 들어갔다. 그렇다해도 정부수립 이후는 미국밀이 공짜가 아니었기 때문에 대량으로 들여올 수는 없었다.

결국 보릿고개때가 되면 절미운동을 계속해서 펼쳐야만 했다.  


1. 일반대중음식점, 식당, 요정 등에서는 백미 사용을 엄금하고 밀가루·메밀 등 잡곡 을 사용하도록 지도 장려할 것.

2. 백미로 엿· 떡 등을 만들지 못하게 하는 동시에 떡국집도 취체(관리) 하여 미곡 출처를 규명할 것.

3. 밀주 제조의 근절을 기하고 음식점·노점·병술집·식량 상을 취체하여 밀주를 발견하여 백미 출처를 추궁할 것.

절미통 節米桶

1949년 12 월20일 서울시 경찰국에서는 다음을 지시하며 식량부족을 타개하려 했다.

그러나 한국전쟁은 식량 부족을 극단으로 몰고 가게되고 미군이 버린 쓰레기에서 먹을 만한 것을 골라 만든 꿀꿀이죽을 먹고 연명한 사람도 많았다.  

1954년 6월. 수복된 서울에는 피란민이 모여들면서 서울에 인구가 집중됐기 때문에 음식점수가 전쟁 전보다 무려 3~4배로 늘어나게 되었다. 여전히 부익부의 음식점 영업이었다.

한국전쟁 이후 미국 정부는 MSA 402조(상호안전보장법중 원조를 제공받는 국가가 원조액의 일정 비율로 미국의 잉여농산물을 구매하도록 한 규정인 402조가 삽입되어 생겨난 이름)를 근거로 그들의 농부들이 과잉생산한 농산물을 강제로 사도록 강요했다.  

사실 미국 정부는 제2차 세계대전 발발 전에 농촌의 생산시 스템을 대량체제로 전환시키다보니 예상치 못한 과잉 생산이 발생했고 마침 전쟁에 참전하면서 군인들 식량으로 이것들이 소비되었다.

전후에는 서유럽에 군사동 맹을 내세워 농산물 수입을 강요했던 것이다.

한국전쟁도 예외없이 잉여 농산물의 또 다른 소비처였지만 휴전 이후 잉여생산물 소비를 보완할 강제구매조항이 있는 MSA가 생겨 났고 이를 개정해 PLO480법(통칭 잉여농산물처리법)을 성립시켰다.  

1955년 이후 한국의 국민학교에 식빵과 밀가루가 무상으로 공급되었다.

이로부터 밀가루를 재료로 한 수제비·칼국수·잔치국수와 같은 음식이 가정에서는 물론이고 식당에서도 끼니를 해결하는데 쓰였다.

더욱 이 PLO480법에는 구입한 잉여농산물을 효과적으로 소비시키기 위해 영양교육을 시행해야 한다는 내용도 담겨 있었다. 이와 맞물려 관련학과 교수들은 쌀의 양을 줄여서 영양가를 높이자는 주장을 펴기도 했다.

미국의 잉여농산물 전입은 밀가루·설탕·면직물의 삼백산업이 경제의 중심축이 되도록 만들어 지다보니 우리나라의 식품산업도 제분업과 제당업을 통해서 그 기반을 다졌다.

1960년대에 들어오면 그러한 사정은 더욱 강화되어 인스턴트 라면이 1963년에, 인스턴트 칼국수가 1969년에 상품으로 나왔다.

제3공화국이 줄기차게 추진한 혼분식 장려운동은 밀가루 음식의 소비를 더욱 부추겼다.

1980년대가 되면 한국 경제의 성장만큼 먹고 마시고 노는 산업도 대단한 성황을 이루었다.

그러한 열풍은 사람들이 말하고 있는 음식문화까지도 동질적인 것으로 만들어 어디를 가나 설렁탕·냉면·비빔밥이 판을 치고 손님대접을 위해서는 서울이나 지방이나 불고기를 최고로 여기게 되었다. 그래 서서히 전국민의 입맛이 일체화가 된다는 기사도 보이게 된다.

더욱이 음식의 세계화 체제는 음식업을 외식산업으로 만드는 데 일조했다.  


1950년대 이후 미군부대를 통해서 전달된 미국식 피자·햄버거·소시지·콜라 따위가 1980년대 이후 더 이상 한반도에서 특수하지 않게 되었다.

여기에 1970년대 초반부터 이루어졌던 각종 육류의 수입은 날이 갈수록 증가했다.

건강에 대한 관심은 육류 소비와 함께 고조되고 도시의 번화가에는 생선 횟집과 스시집이 줄줄이 자리를 잡았다.

1990년대 이후 한국인의 외국관광 경험은 2000년 이후 한국의 어느 도시에서도 외국음식을 본토처럼 맛보게 만들어주었다. 그러자 한식을 세계화하자는 주장이 구호를 넘어서 정책으로 구현되기 시작했다.

그 틈바구니에 한국의 농어촌과 농수산물은 고사할 지경에 이른다.


2000년대를 지나며 외식산업은 그 성장세가 엄청날 정도로 가속화 되고 있지만, 근 100년간의 모습에서 보여주듯 획일화되고 고유의 전통을 잃어버린 음식문화를 다시 주워 담기에는 역부족이다.


더욱이 쓰나미처럼 일고 있는 미디어와 소셜네트워크의 속도감은 어쩌면 한세기를 잃어버린 나라의 음식문화를 왜곡된 역사처럼 정체성을 잃고 방황하게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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