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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 건축가의 건축 이야기 III 국립민속박물관

국립이라는 말이 무색한 拙作졸작.

by Architect Y Feb 10. 2016

경복궁 오른쪽 삼청동길로 이어지는 갤러리 골목으로 올라가다보면 담장안쪽으로 멀리 보이는 어디선가 본듯한 기와 건축물이 빼곡이 앉아 있다.

뭔가...어색하기도 하고, 어쩌면 익숙하기도한 그런 그런 건축물 .

sign을 확인해 보면, 국립민속박물관이라 하고...

건축전공자나, 디자인, 미술 전공자들은 익히들어 알고 있.

몇개 고건축을 짜집기해서 만든 것이라는걸.

이야기 열어본다.


해방과 더불어 민속학자 송석하(1904-1948)는 중구 예장동 始政記念館시정기념관 건물에 민속품 몇 점 모아 놓고 국립민속박물관이 시작된다.

조선시대때 이 동네에 무예훈련장인 藝場예장이 있었다.

그래 예장동이 된거다.


始政記念館시정기념관.

1894년 일본인들은 남산성벽을 멋대로 헐고 일본대목장 나카무라신고를 불러 2층 목조건물을 짓고 일본공사관으로 사용한다.

1904년 이건물은 통감관저가 된다.

1907년 방문한 일본 왕세자 요시히토가 여기서 자고 가기도 하고.

1939년 현 청와대에 총독관저가 신축되면서 구총독관저를 역대 통감과 총독의 업적을 기리는 '시정기념관'으로 전용한다.

지금의 남산 유스호스텔 앞 공원터에 있었지만 지금은 흔적도 없다.

1950년 남산 국립박물관에 흡수 통합된다.

1966년 경복궁 수정전으로 이사하면서 한국민속관이 된다.

집현전으로 사용하던 수정전은 임진왜란때 불타 훼철된것을  1867년 고종이 다시 지은것이다.

정사를 닦는 큰 집이라 修政殿수정전이다.


1966년 대한민국 최악의 현상설계인 국립민속박물관 현상설계가 시행된다.

설계지침은 조선시대 최고의 건축을 그대로 베끼고 섞어 만드는데 조금도 변형시키면 안되고 공사비절감차 원래의 목구조 대신 콘크리트로 재현할 것.

대한민국 현대건축은 조선시대의 작품을 따라 갈 수 없다는게 조선시대를 베끼는 이유라는것이다.

군인정신의 박통.

김수근을 비롯한 많은 건축가들이 보이콧하지만 강봉진이 나선다.

우선 불국사의 청운교와 백운교를 재현한다.

통일신라 750년(경덕왕 10년)에 만들어진 국보 제23호를 베낀것.

아래 17단의 청운교와 위 16단의 백운교 33단을 오르면 부처님의 세계로 든다는 뜻으로 만들어진것이다.

불교에서 33은 부처의 경지에 오르지 못한 회한을 의미한다.

창작과 모방의 경계.

더구나 올라가지 못하게 막아 놨는데 이 계단을 왜 만들었을까


중앙에는 법주사 팔상전을 베낀다.

국내 유일의 목조 5층탑으로, 높이는 22.7m.

553년(신라 진흥왕 14)에 창건되지만 정유재란때 불에 타 없어진 후 1605년(인조 4년) 사명대사가 재건한 국보제55호.

벽의 사방에 각 면 2개씩 모두 8개의 變相圖변상도(불교 경전의 내용을 알기 쉽게 상징적으로 표현한 그림)가 그려져 있어 팔상전이란 이름이 붙었다.

돌계단 6단 위 90cm 높이에 앉아 날아갈 듯 가벼웠던 목구조의 팔상전은 20m의 기단으로 대체되면서 대한민국 최고작품을 바보로 만든거다.

내부공간은 기능도 없다.

당연히 변상도도 필요 없게 된것이다.

20m 콘크리트 기단위의 22.7m 콘크리트 팔상전은 군사정권의 폐해가 얼마나 심각한지 알려준다.


좌측에 화엄사 각황전이 복사되어 있다.

통일신라 때 창건되지만 임진왜란 때 소실된 걸 1703년 숙종이 재건하면서 친히 각황전이라는 현판을 내린 2층 목구조의 웅장한 대웅전으로 국보 제67호다.

부처가 覺皇각황(깨달음의 황제)이다.

300년이 넘은 각황전은 10m 높이의 콘크리트 기단위에 역시 콘크리트로 올라타며 꿔다놓은 보릿자루가 된다.

팔상전 우측으로는 금산사 미륵전이 올라탄다.

미륵전은 599년 백제 법왕 1년에 창건되지만 정유재란 소실된걸 1635년(인조 13년) 재건한 3층 목구조 건물로 국보 제62호다.

미륵존불을 모신 3개 층이 시원하게 뚫린 대한민국 최고의 명품을 역시 콘크리트로 발라버린다.

조선시대 왕궁 13,000평에 안에 들어가 있는 것도 어처구니가 없는데 그것도 가짜 모조품으로 민중의 눈을 현혹시키고 있는것이다.

공사비를 콘크리트 모사품을 만드는데 써 버려 실제 전시공간은 답답하고 불편하기 짝이 없다.

매일같이 초딩들 태운 관광버스는 밀려들어오는데 애들한테 뭘 가르칠까.

조선시대 건축이 감동적인 문화재로 우리에게 가르침을 주는 건 목구조일 뿐 아니라 그 지역의 산세에 어울리는 건축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이 세 건물은 도대체 쓸모가 뭘까.

비워져 있는 공간을 사용하려고 건물 짓는것인데, 공간이 없는 건축.  

현관 들어서면 각황전 아래가 1전시관, 미륵전 아래가 2전시관, 청운교, 백운교 아래가 3전시관이고 중앙 팔상전 아래가 기획전시관이라한다.

위층의 모조품들 때문에 학생들은 올라가지도 못하고 단층의 5천 평을 헤매고 다닌다.

 


덧붙임

요시히토 (嘉仁 1879-1926).

연호는 다이쇼(大正). 일본의 제 123대 왕. 메이지(明治) 일본 왕의 셋째아들로 태어났으나 2명의 형이 모두 죽자 1889년 왕세자가 된다. 뇌막염이 악화되어 1921년 장남 히로히토(裕仁 1901-1989)를 섭정에 임명하고 물러난다. 한국을 못살게 군 대표적인 원수다. 왕을 이어받은 아들 히로히토는 제 2차 세계대전을 일으키고. 지금의 일본 왕 아키히토(明仁 1933- )의 할아버지다.


금산사(金山寺).

전라북도 김제시 금산면 모악산(母岳山)에 있는 절. 599년(백제 법왕 1)에 왕의 만수무강을 비는 자복사찰(資福寺刹)로 창건했다는 소문이 있지만 확실치 않음. 신라의 승려 진표(眞表)가 766년(신라 혜공왕 2) 중건(重建 보수하거나 고쳐 지음). 1598년 임진왜란 때 왜놈들의 방화로 미륵전(彌勒殿), 광교원(廣敎院) 등 40여 개 건물 전부 소실. 1635년(인조 13) 수문(守文)이 재건축. 1934년 대적광전, 금강문(金剛門), 미륵전 중수(重修 낡고 헌 것을 손질하여 고침).


법주사(法住寺).

충북 보은군 속리산에 있는 절. 의신(義信) 화상(和尙 수행을 많이 한 스님)이 천축(天竺 인도)으로 건너가 불교경전(佛敎經典 부처님의 말씀을 기록한 책)을 얻어 귀국. 나귀에 싣고 속리산으로 들어가 553년(신라 진흥왕 14) 법주사 창건. 법(法)이 안주할 수 있는 탈속(脫俗)의 절이라 법주사라 부른다. 법주사의 정신적 지주는 미륵(彌勒 석가모니의 뒤를 이어 57억 년 후에 세상에 출현해 석가모니가 구제하지 못한 중생을 구제할 미래의 부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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