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징어 게임’ 시즌 2가 어떤 스토리인지 예상하기 위해 프론트맨의 고시원에 무슨 책이 있나 살펴봤어요. ^^
왼쪽에서 두 번째 책은 니체의 ‘자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입니다.
한때 니체를 엄청 좋아해서 ‘자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세 번 읽고, ‘도덕적 계보’,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들어라. 이 위대한 사람의 외침을’ 등을 읽었어요. 너무 좋아하다 보니 니체의 여성 관련 글은 ‘니체가 상처가 커서 이런 말도 안 되는 글을 썼구나’ 하고 니체를 이해하려고 했어요.
‘자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마음에 드는 부분은 사람을 낙타, 사자, 어린아이로 분류한 겁니다.
낙타는 착한 동물입니다. 아무리 무거운 짐을 싣더라도 꿋꿋이 참고 견딥니다. 낙타와 같은 자가 있습니다. 자신의 삶을 고된 것으로 만들어 그 고통을 받아들이고 견뎌내는 자요. 니체는 낙타와 같은 정신을 지닌 사람은 자신의 삶을 더 높은 차원으로 이끌 수 없다고 하죠.
그렇다면 사자는 무엇일까요?
사자는 남의 말을 안 듣는 동물입니다. 사자는 자유를 향한 열망이 있습니다. 만약 낙타가 사자가 된다면 그는 어떠한 주인도 섬기지 않을 겁니다. 사자는 스스로 자신만의 욕망에 가치를 창조하고 그것을 세상에 당당히 내세웁니다. 사자는 신에게 순종하지 않습니다. 신의 품에서 안락하기보다는 기꺼이 고독과 굶주림을 선택합니다. 여기서 ‘신’은 ‘사회적 신’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사자는 저항 이후에 추구해야 할 것을 모릅니다. 사자는 질문하고 싸울 순 있지만 행복하지는 못합니다.
따라서 어린아이의 정신이 필요합니다. 어린아이는 천진난만, 망각, 새로운 시작, 놀이, 스스로의 힘으로 굴러가는 수레바퀴, 최초의 운동이자 신성한 긍정입니다. 어린아이는 사자와 마찬가지로 욕망에 충실합니다. 도덕이나 법률이나 제도는 아이의 행동을 심판할 수 없습니다. 아이에게는 세상의 모든 것이 하나의 놀이입니다. 낙타처럼 인생은 원래 고단한 것이라며 굴복하지도 않고, 사자처럼 자유를 위해 맹렬히 저항하지도 않습니다. 그냥 웃으며 지금을 즐길 뿐입니다. 아이는 자기 욕망에 대해 잘 알고 있습니다. 자기 욕망의 주인공입니다.
‘욕망’이라는 단어가 나왔네요. ‘오징어 게임’의 프론트맨 책상 위에 자크 라캉의 ‘욕망 이론’이 있었죠. 라캉은 “욕망은 죽음으로 끝나지만, 욕망이 없는 삶은 죽음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오징어 게임’ 속 인물들이 쭈욱 머리에 그려지죠?
이 이야기는 다음에 라캉의 ‘욕망 이론’ 책에서 말하겠습니다.
다시 니체로 돌아와서요. 니체가 말하는 어린아이가 바로 위버멘쉬입니다. 위버멘쉬는 긍정적으로 삶을 놀이로 파악하고 즐기는 사람, 지금의 인간을 넘어서는 새로운 인간형입니다.
음. 길어지더라도 니체의 여성 관련 글을 빼놓을 수 없겠네요. 정말 맘에 안 듭니다.
“여자 문제의 모든 것은 하나의 해결책을 갖고 있다. 그것은 바로 임신이다. 여자에게 남자란 수단이며, 목적은 언제나 아이에 있다. 그렇다면 남자에게 있어서 여자란 무엇인가? 참된 남자는 위험과 놀이를 원하고, 위험천만한 장난감으로서 여자를 원한다. 여자는 보석과도 같이 순수하고 섬세한 장난감이어야 한다.”
ㅎㅎ ~ 휴. 아무리 니체가 루 살로메에게 차였어도 이 내용은 좀 심해요.
니체는 작가이며 정신분석학자인 루 살로메에게 차인 후에 ‘자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썼죠. 참, 니체가 사랑했던 루 살로메는 당시 유명한 작가이고 사교계 명사였어요. 릴케, 프로이트가 사랑했던 여성이고요.
그런데요. 황동혁 감독이 왜 ‘자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책장에 꽂았을까요? 아까 말씀드린 ‘욕망’도 있지만, “신은 죽었다”라는 니체의 말 때문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게임을 보면 엄청 무섭잖아요. 사람의 죽음을 다른 사람이 쥐락펴락하잖아요. 사람의 생명을 갖고 놀 수 있는 권리는 대체 누가 부여해준 걸까요? 누구는 금수저라서 사람의 목숨 갖고 놀고, 누구는 희생당하고요. 태어나면서부터 금수저와 흙수저로 분류되는데, 신은 왜 이렇게 불공평하게 태어나게 했을까요?
몇 년 전에 엄청 슬픈 일을 당한 친구에게 한 지인이 이런 말을 했어요.
“하나님이 너를 엄청 많이 사랑해서, 더 큰 것을 주시려고 짝지기를 하늘로 데려갔다.”
그 말 듣고 제가 막 울분을 토했어요. 이 친구에게는 짝지기가 전부이고 가장 큰 존재였는데, 더 큰 것을 준다는 게 말이 되나요? 그리고.. 죽은 짝지기는 뭐지요? 누군가에게 더 큰 것을 주려고 누군가를 죽인다는 것이 말이 되나요?
물론, 니체가 말한 “신은 죽었다”는 의미는 이런 것과는 다르죠? 그간 인류가 떠받들던 진리와 가치체계를 부정한 것이죠. 구원이라는 명분으로 사람을 나약화하고 노예화하는 것을 타파하자는 말이죠.
오늘도 ‘오징어 게임’ 속의 책 덕분에 오랜만에 ‘자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살짝 펼쳐봤습니다~ 고마운 ‘오징어 게임’ 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