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세푸스
요세푸스는 열네 살의 어린 나이에 율법에 대해 잘 알았다고 한다. 열여섯이 되었을 때는 유대교의 주요 세 종파인 바리새파, 사두개파, 에세네파가 요구하는 과정을 모두 마쳤다고 하나 믿을 수 없고.^^ 에세네파 관련 공부는 한 것으로 보인다. 광야 생활을 하는 금욕주의자 바누스 밑에 있었고, <유대전쟁사>에서 에세네파 관련 글을 3쪽인가에 걸쳐서 언급하며 에세네파가 가장 고결하다고 평가했다.
요세푸스는 유대-로마 전쟁 이전 네로 통치 기간 중에 벨릭스 총독 재임 시절 로마로 압송된 제사장들의 석방을 청원하기 위한 사절단의 일원으로 로마에 파견되었다. 그때 그는 네로의 아내 폽페아와 친분을 맺었다. 2년 후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그는 예루살렘에서 반로마 저항운동이 일기 시작하자 로마에 맞선 전쟁은 무모하다고 역설했다. 그러나 저항군의 지휘관으로 추대되어 군대를 이끌고 갈릴리 지역을 담당하게 되었다. 결국, 그는 AD 66년 겨울부터 67년 여름까지 갈릴리에서 베스파시아누스가 이끄는 로마에 맞섰고, 결국 갈릴리 북서부의 요타파타 성에서 패배했다. 요세푸스는 요타파타가 점령되는 순간 동굴에 피신했는데, 동굴 안에는 이미 약 40명이 은신해 있었다. 그러나 로마인들은 은신처를 찾아냈고, 동료들은 자결을 선택했다. 그들은 자살의 죄악을 피하고자 제비를 뽑아 동료를 살해했는데, 요세푸스는 마지막 순서로 결정되었다. 요세푸스가 마지막 남은 한 사람을 죽여야 할 순서에 그는 동료를 죽이지 않고 설득하여 함께 투항했다.
결국 베스파시아누스 장군 앞에 끌려간 요세푸스는 베스파시아누스와 그 아들 티투스가 장차 로마의 황제가 될 것을 예언하였다. 베스파시아누스는 요세푸스를 신뢰하게 되었으며 그를 보호하게 되었다. 이때 요세푸스는 원래 요셉 벤 맛티아스라는 유대식 이름이었으나 플라비우스 요세푸스라는 로마식 이름을 사용하게 되었다.
케스티우스의 패배로 두려워진 네로가 전쟁의 모든 지휘권을 떠넘긴 사람이 베스파시아누스다. 베스파시아누스는 티투스와 함께 유대지역을 진격하여 정복한 인물이다.
석방된 요세푸스는 티투스가 예루살렘 정복 길에 올랐을 때 수행원으로 그를 따라갔다. 이 과정을 생생하게 목도한 그는 <유대 전쟁사>를 기록하게 되었다. 그러나 <유대 전쟁사>를 보면 요세푸스가 로마에 절대 충성한 인물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오히려 서문에서 로마에 아부하는 다른 역사가들을 비판하고 있다. 그렇다고 유대인의 입장에서 글을 쓴 것도 아니다. 로마는 너무 강하며, 심지어 로마의 지배는 하나님의 뜻이고(<유대 전쟁사2> p151), 로마는 이스라엘을 징벌하려는 하나님이 보내신 도구(<유대 전쟁사2> p155)라고 한다. 그러나 전쟁의 원인 제공자는 ‘소수’의 전쟁광들이었으며, 유대 일반 백성과 상류층 사람들은 로마에 우호적이고 평화를 사랑했지만, 소수의 폭군세력의 강요로 전쟁에 휘말렸다고 말한다.
유대 전쟁사 개요
요세푸스는 <유대 전쟁사>, <유대 고대사>, <요세푸스 자서전>, <아피온 반박문>을 남겼다. <유대 전쟁사>의 헬라어 사본들은 모두 10세기 이후의 것들이다. 특히 가장 중요한 사본인 P사본에는 <유대-로마 전쟁사>라는 제목이 붙었다. 요세푸스의 저작을 필사하고 보존한 주체는 로마의 국교가 된 기독교였다.
요세푸스의 작품을 체계적으로 정리하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후반부터였다. 최초 편집본은 1544년의 알레니우스의 편집본이고, 19세기 말까지 주로 사용된 이 최초 편집본은 단 한 개의 사본을 기초로 만들어졌다. 현재 가장 표준으로 삼는 편집본은 니이제의 요세푸스 전집이다. 참고로, 요세푸스는 헬라어판을 출판하기 얼마 전 파르티아인, 베벨론인, 아라비아인, 메소포타미아 너머의 유대인, 아디아베네인들에게 요세푸스의 모국어인 아람어로 기록된 글을 보냈다.
<유대 전쟁사>는 전쟁 이전의 역사적 배경, 헤롯 가문 이야기, 로마의 출현부터 시작하여, 전쟁 발발의 계기와 발단과정, 갈릴리 전투와 요타파타 함락, 예루살렘 성 건축, 예루살렘의 상황, 예루살렘 전투, 예루살렘 멸망, 마사다 정복, 전쟁의 종결과 직후 상황으로 이야기가 이루어져 있다.
유대 전쟁사에서 흥미로운 내용들
<유대 전쟁사>는 당시 여성을 어떤 시각으로 보는지 언급하고 있다.
“안티고누스가 성에서 내려와 소시우스의 발 앞에 엎드려 자비를 구했다. 그러나 소시우스는 그를 불쌍히 여기기는커녕, 그를 “힘없는 여자 같은 안티고나”라고 부르면서 그의 태도 변화를 비웃었다. 그렇다고 그를 여자와 같이 여겨 감옥에서 석방시킨 것은 아니었다.” - <유대 전쟁사1> p97
책에는 ‘힘없는 여자 같은’, ‘여자와 같이 여겨’ 등의 단어가 나온다. 또한 여자는 출입할 수 없는 곳이 있었으며, 생리 중일 때는 부정한 사람으로 취급받았다. 그러나 여성의 지위가 그리 낮은 것은 아니었다. 여성도 왕이 될 수 있었다. 심지어 로마의 알렉산드라 여왕의 집권기는 하스모니안 왕조의 최고 황금기였다.
도서는 헤롯의 건축 업적도 언급했다.
“헤롯은 자신의 재위 15년에 성전을 재건하였고(BC 20~1), 성벽을 확장하여 과거보다 두 배나 넓은 지역을 성벽으로 둘렀다. ... 성은 많은 비용을 들여 증축하였는데 왕궁을 본뜬 것은 조금도 없었다. 그는 그것을 안토니우스를 기리기 위해 안토니아 성이라고 이름 지었다. 그는 자신을 위한 왕궁을 도시의 북쪽에 세우고 성전과는 결코 비교할 수 없는 가장 크고 아름다운 두 건물을 자신의 고귀한 친구들의 이름을 따라서 케사레움과 아그립피움이라고 불렀다. (...) 그는 사마리아에 있는 가장 아름다운 도시 하나를 길이 20 스트디온의 성벽으로 둘러싸고, 6천 명의 주민을 이주시켰다. (...) 이밖에도 요단강 발원지로 파니아스(가이사랴 빌립보)라고 부르는 곳에 백색 대리석의 성전을 지어 그에게 헌정하였다. (...) 그는 또한 해안지역에 스트라토라고 불리는 망대가 완전히 폐허가 된 도시가 있는 것을 알았다. 그는 백색의 석조건물을 지어 찬란한 왕궁처럼 장식했다. (...) 항구에 인접한 건물들도 하얀 돌로 지었고, 도시의 거리들은 모두 동일한 간격을 유지하며 항구로 뻗어 있었다. 항만 입구 맞은편 언덕 위에는 뛰어난 아름다움과 장대함을 드러내는 황제의 신전이 서 있었다. (...) 헤롯은 이 도시를 ‘가이사랴’라고 명명했다. (...) 그런가 하면 부모에 대한 사랑은 누구보다도 대단하다. 그는 아버지를 기념하여 그의 왕국의 가장 아름다운 평원에 강과 나무가 풍부한 도시를 건설하고 안티파트리스(욥바의 북동쪽으로 가이사랴에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에 위치)라고 불렀다. 또한 여리고의 상부지역에 성을 건설하여 강력하고 매우 아름다운 요새를 만들어 그 이름을 키프론이라고 명하여 어머니에게 봉헌했다. 자기의 형제 파사엘에게도 그의 이름을 따서 지은 예루살렘에 있는 망대 하나를 지어 봉헌했다. (...) 이와 같은 건축물들을 지은 후에 그는 외부의 도시들에도 그의 대범함을 보여주었다. 트리폴리스, 다마스쿠스와 프톨레메우스에는 김나지움을 지어주고, 비블로스에는 성벽을, 베뤼투스와 두로에는 회관과 회랑뿐만 아니라 신전과 시장을, 또 시돈과 다마스쿠스에는 극장까지 건설했다. 라오디게아에는 해변가에 거주하는 사람들을 위해 수도를, 아스를론에는 목욕시설과 고급 우물뿐만 아니라 놀라운 예술성과 규모를 지닌 열주를 건설했다.” <유대 전쟁사1> p109~114
헤롯은 건축의 천재였다. 그가 지은 곳들이 아직도 이스라엘 곳곳에 남아있다.
헤롯 가문은 너무 복잡하다. 헤롯도 몇 명이나 된다. 간단히 정리하면, 위에 언급한 헤롯성전을 지은 건축의 천재가 헤롯대왕이라고 부르는 사람이다. 헤롯대왕에게는 헤롯 안티파스와 헤롯 아켈로스가 있다. 세례 요한의 목을 자른 사람이 헤롯 안티파스이다. 그러나 헤롯의 가문을 자세히 묘사한 요세푸스는 헤롯의 유아 학살에 대한 언급이 없다. 그래서 성서 속의 유아 학살이 사실이 아니라는 주장도 있다.
헤롯은 죽기 전에 여러 질병이 발병하였다. 피부 전체에 가려움증이 나타났고, 내장에 통증이 심했으며, 발에는 수종이, 하체에는 염증이, 성기 부분은 종양으로 썩어가 벌레가 나오기도 하였다. 그는 칼리르호에라는 지역에 있는 온천을 이용하기 위해서 요단을 건너기도 하였다. 이 온천은 아스팔티티스 호수(사해)로 흘러들어갔는데, 담수를 포함하고 있어서 마실 수도 있었다. 지금은 유럽의 피부병을 앓는 부자들이 사해에 많이 가는데, 당시에는 사해보다는 온천을 이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요세푸스는 “플로루스는, 황제가 돈이 필요하다는 이유를 내세워 병사들을 성전 금고로 보내서 17달란트를 가져오게 했으며, 플로루스는 이렇게 전쟁발발의 원인을 제공했다(유대전쟁사1 p236)”라며 전쟁발발의 원인을 적어놓았다.
흥미로운 것은 유대인에게 존재하는 세 개의 철학집단을 언급한 것이다. 그는 바리새인, 사두개인, 에세네인을 말하며 에세네인들의 공동체 의식을 “경탄할 만하다(유대전쟁사1 p201)”라고 언급했다.
또한 요세푸스는 <유대 전쟁사>를 객관적인 입장에서 쓴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문체에 신경을 썼으나, 자신의 행동을 변호하는 느낌은 버릴 수가 없다.
“요세푸스 자신은 로마의 용서를 기대할 수도 있었지만 조국을 배반하고 적으로부터 요행을 바라면서 자신에게 맡겨진 군지휘권을 수치스럽게 만드는 것보다는 죽기를 간절히 원했다” 유대전쟁사1 p322
이쯤 되면, 요세푸스가 예수에 대해 언급한 곳이 있지 않을까 뒤적이게 된다. 당시 예수가 위대한 인물이었다면 분명 요세푸스가 다루지 않았을 리가 없다. 그러나 <유대 전쟁사>에는 우리가 아는 예수가 나오지 않는다. 대신 다른 여러 예수가 등장한다. 대제사장 예수, 나우에의 아들 예수, 데부티의 아들 예수, 사파스의 아들 예수, 아나니아의 아들 예수, 사밧의 아들 예수이다. 그중 아나니아의 아들 예수가 흥미롭다.
“전쟁이 시작되기 4년 전 예루살렘이 아주 평화롭고 번창하던 때에 아나니아의 아들 예수라는 자가 예루살렘에 등장했다. 그는 시골 출신의 평범한 사람이었는데 관습에 따라 모든 사람이 장막절을 준수하고 있던 때에 성전으로 들어와 갑자기 이렇게 소리치기 시작했다. “동쪽과 서쪽에서 한 음성이 들여오고 사방에서 한 음성이 들려오니, 예루살렘과 성전에 대한 말씀이며, 신랑과 신부에 대한 말씀이며, 온 백성에 대한 말씀이로다!” 예루살렘 주민의 지도층은 이 불길한 외침에 분노하여 그를 체포해 심하게 매질했다. 로마 총독에게 끌려간 그는 그곳에서 뼈가 드러날 정도로 심하게 채찍질을 당했으나 살려 달라고 빌지도 않고 울지도 않았으며, 채찍질이 가해질 때마다 애통한 목소리로 이렇게 소리쳤다. “화 있을 것이다, 예루살렘아!” (...)그는 절기 때가 되면 더 크게 소리쳤으며 7년 5개월 동안 쉬지 않고 외쳐댔다. 예루살렘이 포위되어 그의 외침이 현실로 나타났을 때 비로소 그의 목소리는 멈추었다. 그가 마지막으로 “예루살렘과 그 백성과 그 성전에 화 있으리라! 또한 내게도 화 있으리라!”고 말을 하는 순가, 로마군의 투석기에서 날아온 돌이 그에게 명중했고 그 자리에서 그는 즉사했다.” 유대 전쟁사2 p226~228
<유대 전쟁사>는 이스라엘 도서 작업을 위해 읽은 책이다. 확인할 것이 있었다. 그 와중 이 책에 오류가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헬라어는 볼 수 없기에 영문본을 봤더니 확실히 이 책에 숫자가 잘못 기재되어 있다.
“유대인과 로마의 전쟁 기간 동안 포로로 잡힌 유대인 숫자는 모두 9만 7천 명이었고, 예루살렘 포위 기간 동안 사망한 유대인 수는 11만 명에 달했다. 이 중 대부분은 유대 동족이었지만 모두가 예루살렘 주민은 아니었다. 전국 각지에서 많은 유대인이 무교병 절기를 준행하려고 예루살렘에 모여 있다가 예기치 못하게 전쟁에 휩쓸리게 되었기 때문이다. (...) 혼자서 유월절 음식을 먹는 것은 금지되었기 때문에 희생제물 한 마리당 10명의 남자들이 모여 공동으로 제사를 드렸으며, 20명이 함께 모여 식사하는 경우도 많았다. 이때 희생제물로 바쳐진 동물의 수는 25만 5천 6백 마리였다. 이렇게 보면 각각의 희생동물당 10명만 계산해도 270만 명이 참여했다는 것이고 그것도 흠 없고 거룩한 사람의 수만 계산한 결과이다. 나병 환자, 정액이 흘러 더럽혀진 남자, 월경 중인 여자 등과 같이 부정한 사람은 희생제사에 참여할 수 없었으며, 또한 하나님을 경배하기 위해 예루살렘에 온 이방인들 역시 이 숫자에서 제외되어 있었다.” 유대 전쟁사2 p244~245
<유대 전쟁사>에는 예루살렘 포위 기간 사망한 유대인 수를 11만 명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영문본에서는 “Now the number of those that were carried captive during this whole war was collected to be ninety-seven thousand; as was the number of those that perished during the whole siege eleven hundred thousand,(...)”로 적혀있다. ‘11만 명’이 아니라 ‘110만 명’이 목숨을 잃은 것이다.
이 책은 마사다의 최후 저항과 그 후의 일들로 마무리를 한다. 사실 마사다에서의 집단 자결은 납득하기 어렵다. ‘그 힘으로 로마군인 한 명과 더 싸우지’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러나 책을 읽으니 이해가 된다. 이들의 정신세계와 상황을 몰라서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서둘러 명예로운 죽음을 맞이하자! 우리 자신과 아이들과 아내들을 불쌍하게 여긴다면 남아 있는 기회를 헛되이 만들지 말고 우리 손으로 자비로운 죽음을 맞이하자! 폭행을 당하고, 노예가 되고, 우리 아내들이 아이들과 함께 수치스러운 일을 당하는 것을 지켜보아야 한다면, 이것은 자연의 섭리에 주어지는 불가피한 불행이 아니라, 죽음을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아 스스로 죽을 수 있는 기회를 저버린 비겁한 자들이 마땅히 겪어야 할 일이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용기를 자랑스럽게 여겨 로마에 반기를 든 자들이며, 목숨을 구하기 위해 항복하라는 적의 마지막 회유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굴종을 거부한 자들이다. (...) 적의 노예가 되어 죽는 대신에 아직 자유를 누리고 있을 때 우리 아내와 아이들과 함께 삶과의 이별을 고하자! (...) 그들은 모든 소유물을 모아 한곳에 쌓아놓고 불을 질렀다. 그리고 그들 모두를 죽여줄 10명의 사람을 뽑았다. 각자 죽은 아내와 자식들 옆에 누워 그들을 감싸 안고서 비참한 임무를 맡은 자들에게 죽을 분비를 했다. 10명의 사람은 모든 사람을 죽인 후, 제비를 뽑아 선출된 한 사람이 나머지 9명을 죽이고 마침내 자기 스스로 목숨을 끊어 죽기로 했다. 마지막 한 사람은 모두가 숨을 거두었음을 확인하고 궁전에 큰불을 지른 후 자기 자신을 칼로 찌르고 가족 옆에 쓰러졌다. (...) 이들이 죽음을 결심하고 있을 때, 한 늙은 여인과 또 다른 여자 하나가 지하통로에 숨어 있었다. 엘르아살의 친척인 이 여자는 지혜롭고 많은 교육을 받은 자로, 5명의 자식과 함께 있었다. 죽은 사람의 숫자는 여자와 아이들을 포함해서 모두 960명이었다.” 유대 전쟁사2 p299~302
요세푸스는 “우리는, 로마와 유대인의 전쟁의 경과에 대해 알고 싶어하는 사람들을 위해 아주 정확한 보고를 주기로 약속하며 기록한 이 ‘유대 전쟁사’를 끝마친다. (...) 이 기록 전체를 통해서 나는 오직 진리만을 염두에 두었노라고 자신 있게 확언한다”며 글을 마쳤다.
일 덕분에 흥미로운 책을 읽었다. 아주 재미있었다. 이런 일만 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