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화,권수진 <파인만, 과학을 웃겨 주세요>
1988년 2월 15일 밤 10시 43분에 리처드 파인만은 세상을 떠났다. 새벽 2시쯤 이 책을 읽고 있다 깜짝 놀랐다. 자정이 넘었기 때문에 오늘이 파인만이 세상을 떠난 날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1988년이면 나는 겨우 8살이었고, 우리나라 첫 올림픽이 개최된 것만 기억했는데(올림픽 보라고 학교를 빨리 파해주었던 게 기억난다) 파인만이 세상을 떠난 해였다니! 기분이 묘해졌다.
암 수술을 세 번 받았고, 고혈압, 심장부정맥에 시달렸으며 콩팥도 한 쪽 떼어냈어. 콩팥을 떼어내고 나니 갑자기 콩팥에 대해 궁금해지는 거야. 도서관에 가서 의학책을 뒤졌는데, 이 콩팥이란 것이 너무 재미있어서 시간 가는 줄 몰랐단다. 하하! 콩팥은 완전 미치광이더라고! 187쪽
나도 모르게 실소가 튀어나와 버렸다. 자신의 몸에서 떼어낸 콩팥이 궁금해서 의학책을 찾아보다 콩팥이 미치광이라고 결론짓다니. 유쾌하고 유머러스한 파인만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머니에게 물려받은 기질도 있다지만 세상을 저렇게 살아간다는 것도 축복인 것 같다. 모든 게 시들시들 색채를 잃어가는 삶보다 궁금하고, 알고싶고, 질문하고 싶어지는 삶이 훨씬 활력있어 보이기 때문이다. 무언가 깊이 생각하는 것에 나도 나름 뒤지지 않지만 파인만처럼 적극적으로, 추진력 있다기 보다는 겨우 이불속에서 핸드폰이나 책을 뒤적이는 것을 더 좋아하는 내가 좀 시들시들해 보였다. 그래서 그냥 사람마다 성격과 기질의 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어느 정도 인정하기로 했다.
아무리 그렇더라도 세계적인 과학자들 앞에서 세미나를 연 모습은 약간의 연민과 짜릿함이 공존했다. 20대 초반의 프린스턴 대학원생이 휠러 교수(블랙홀 용어를 처음 만든 분)의 제안으로 양자역학에서 전자들의 행동에 대한 아이디어를 발표하는 세미나를 열었다는 것도 놀라운데, 기꺼이 참여한 과학자들도 놀랍다. 흥미로운 주제라며 러셀, 노이만, 파울리, 아인슈타인을 초대한 휠러 교수의 태연함과 그 앞에서 오들오들 떨고 있던 파인만의 모습이 그려져 절로 웃음이 났다. 고작 파인만을 안심시킨다는 휠러 교수의 말이 “러셀 교수가 세미나 도중에 잠든다고 너무 실망하지 말게나. 그분은 아무 세미나에서나 잘 주무신다네. 파울리 교수는 내내 고개를 끄덕일 걸세. 그렇다고 자네 의견에 동의한다는 건 아니니 착각하지 말고. 근육에 마비 증세가 있으셔서 그러시는 거니까.” 였다. 하지만 파인만은 저명한 과학자들이 눈앞에 있다는 사실을 잊고 물리학에 푹 빠져 들었다. 무언가에 열정이 가득한 사람들이 모인 곳. 그리고 그곳에서 자신들의 의견을 스스럼없이 드러내고 토론하는 모습이 진심으로 멋져 보였다.
나는 책에서 어려운 말이 나올 때마다 내가 알 수 있는 말로 쉽게 바꾸어서 상상해보는 버릇이 생겼단다. 책에 씌여 있는 어렵고 딱딱한 말이 실제로는 그러니까 정말로 무슨 뜻인지 이해하려고 노력했어. 48쪽
과학을 쉽고 재밌게 설명하기로 유명한 파인만의 명성답게 이 책을 파인만이 직접 쓴 건 아니지만 파인만이 실제로 이렇게 했을 것 같은 착각이 일었다. 아무리 중요한 이론이더라도 파인만은 과학을 어렵게 설명하길 원하지 않았을 것 같다. 그래서 이 책에서도 중요하게 논쟁하는 부분에서도 ‘어쩌고저쩌고 저쩌고어쩌고’가 전부다. 과학을 어려워하고 포기해 버리는 사람들에게 선생님이 어렵게 가르쳐서라고 말하고, 그런 사람들에게 굳이 피로감을 주지 않는 ‘어쩌고저쩌고’ 식의 얼버무림이라니. 이런 센스가 유쾌하고, 파인만의 평소 지론과도 꼭 들어맞아 이 책을 읽는 내내 즐거웠다.
파인만은 ‘과학을 배운다는 건, 마침내 인간의 지혜로는 가늠할 수 없는 자연의 신비를 알게 되는 일이고 그 신비가 어디까지 뻗어 있을지를 겸허히 바라보게 되는 일’이라고 했다. 그래서 ‘과학자의 일은 자연에게 이래라저래라 하는 것이 아니고 자연이 하는 말을 자세히 듣는 거’라고 말이다. 과학자가 자연에게 하는 일은 우리 모두에게 해당되는 일 같다. 이래라저래라 하기 전에 누군가 하는 말을 자세히 들어준다면, 많은 갈등과 오해, 싸움이 상당히 줄어들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과학은 어떤 틀로 묶을 수 없는 분야인 것 같다. 이를테면 수학을 잘하는 사람들이 하는 학문, 똑똑해야만 이해할 수 있는 학문 같이 오해를 많이 받고 있는 분야 중 하나 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파인만에게 과학적 사고를 배웠다. 대상이 하는 말에 귀 기울이는 것. 어떤 것을 대입해도 벌써 마음이 너그러워지는 기분이 든다. 물론 아직까지는 결과를 생략한다는 전제하에는 가능하다. 그가 세상을 떠난 날짜에 우연히 이 책을 읽게 된 데에 조금이나마 인연으로 엮어보며 파인만을 추모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