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의상 던지는 말들
은아, 잘 지내고 있어? 어제 너의 목소리를 들으니 너무 반갑고, 보고 싶고 하더라.
참 오랜만에 쓰는 글이지? 우리 둘 다 너무 바쁜 시기를 지나고 있어서 글을 미처 쓸 시간이 없었다. 그래도 이렇게 다시 마음 잡고 컴퓨터 앞에 앉게 돼서 참 감사해.
어제 한국과 독일의 문화 중에 다른 게 뭐가 있을까 하다가 '약속' 문화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었지? 우리는 아무렇지 않게 하는 말인 '밥 먹자'가 독일 사람들에게는 당황스러운 말로 들릴 수 있다는 말이 참 흥미로웠어. 한국은 예의상 하는 말, 예의상 하는 약속이 있는데 말이야~
한국에서는 누군가와 친해졌을 때 혹은 누군가와 잠시 이별을 할 때 '우리 밥 한번 꼭 먹자'라는 말을 자주 하곤 해. 듣는 사람도 '그래'라고 대답하지만, 이 둘은 알고 있어. 밥을 진짜로 먹지 않는다는 사실을.
참 웃기지? 암묵적 동의 같은 걸까? '밥 먹자'는 말에 진짜로 밥을 먹진 않지만 그저 동의하는 일. 상대방이 베푼 호의에 그냥 대답만 하면 끝나는 말이 있다는 사실이 참 재밌는 것 같아.
'밥 먹자'는 말에 '그래. 언제?'라고 대답하는 순간... 분위기가 싸해지는 경우도 있어. 물어본 사람은 '아 진짜로 한 말은 아니었는데...'라고 말하며 당황스러워하겠지. '언젠가...?'라고 말하며 말끝을 흐릴지도 몰라.
그렇다면 우리는 왜 지키지 못할 약속을 하는 걸까? 어쩌면 서로에게 예의를 중시하는 한국의 문화 때문일 수도 있을 것 같아. 서로에게 좋아 보이고 싶은 마음 때문에 들으면 좋은 말들을 해주는 거지. 만날 때마다 '밥 먹자'라고 말하지만 몇 년째 깜깜무소식인 관계들도 있으니... 그런 관계들만 봐도 예의상 하는 말임이 분명해.
그리고 좀 더 생각해 보면 '상대방에게 좋은 사람으로 남고 싶어서... '일 수 있어. 사람 일은 정말 모르는 거잖아. 다시는 안 볼 것 같은 사람도 언젠가 만나게 돼있으니까. 나중에 만날 상황을 대비해 완충제를 넣어주는 거지. 마무리를 잘한다는 표현이 더 맞겠다.
예의상 하는 말들이 당황스러울 때도 있지만, 가끔은 좋은 것 같기도 해. 나는 이 경우를 구직 활동할 때 많이 느꼈는데, 불합격 메일을 받았을 때였어. 그냥 '귀사와 함께 하지 못하게 됐다'는 말만 적으면 될 것 같은데 '당신의 능력이 뛰어나지만, 우리 회사와 결이 잘 맞지 않는다. 다음에 좋은 기회로 만나게 됐으면 좋겠다.'는 식의 예의상 던지는 말들이 있거든. 이게 가끔은 위로가 될 때까 있더라. 냉정하게 선을 긋는 것이 아니라 이유를 구구절절 적어주는 게 타격이 적더라고. 정중한 거절을 받는 기분이야. 다음에 좋은 기회로 만나게 되지 않을 걸 알지만 마무리를 잘하는 기분이랄까.
우리는 심지어 이별을 하는 경우에도 '성격 차이'라고 말하곤 해. '걔가 정말 거지 같았다.', '성격 파탄자 같았다'며 구체적으로 말할 수 있겠지만, 예의상 '성격 차이'라는 단어로 마무리하는 거지. 더 이상 그 이별에 말이 나오지 않게 하는 말일 수 있어.
20년 넘게 한국 토박이인 나는 예의상 하는 약속에 많이 익숙해져 있어. 예의상 하는 말들에도 어느 정도 단련이 됐을지도 몰라. 나조차도 다른 사람에게 예의상 '밥 먹자'는 말을 건넬 때도 있지만. 그런데 나의 경우는 진짜 몇 년 뒤에 밥을 먹긴 하더라고.
언제 이뤄질지 모르는 약속이지만 그래도 따뜻한 말을 건네는 게 서로에 대한 예의인 것 같긴 해. 진짜 밥을 먹고 싶으면 내가 먼저 손을 내밀면 되니까. 그런 용기가 우리를 더 가깝게 만드는 거겠지?
은아, 너도 너무나 잘 아는 이야기를 내 관점에서 풀어봤는데 어땠어? 오랜만에 쓰는 글이라 제대로 썼는지도 모르겠네.
그래도 꾸준함이 가장 중요한 거니까. 계속 너와 글을 이어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