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말은 하지 않는 독일 사람들
Dear Eun,
얼마 전 기숙사 생활을 청산하고 이사를 준비하던 중 부엌에서 우연히 한국인 유학생을 마주쳤어. 한국인이 흔하지 않은 곳이라 서로의 얼굴을 알고 지내던 분이었는데 나의 이사소식을 들었는지 가기 전에 '밥 한번 먹자'라고 하더라. 이사까지 고작 3일여의 시간밖에 남지 않았던 나는 빠르게 스케줄표를 확인했고 도저히 시간을 내기가 어려울 것 같아 거절을 하려 그분을 바라보니 이미 부엌을 나가고 없었어. 그래. 밥 먹자는 그 말은 그저 '빈말'이었던 거야. 순간 나는 허탈한 마음이 들었지만 이전에 내가 내뱉은 수많은 빈말들을 생각하며 그저 웃고 넘겼어.
어느 순간부터 나는 진정 함께 밥 먹고 싶은 사람들에게만 식사 제안을 하게 되고, 함께 시간을 보내고픈 이들에게만 '한번 보자'는 말을 하게 돼. 우연히 반가운 누군가를 마주치더라도 불투명한 미래를 위한 '밥 먹자'는 말은 더 이상 내뱉지 않아. 글세. 반가운 마음이 만들어 낸 그 가벼운 약속들이 지켜지지 않는 게 불편해진 걸 보면 이제는 독일에 꽤나 적응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소개팅의 첫 만남에서도 '식사하셨어요?'로 질문을 던지는 한국에서 자란 나에게 '밥 먹자'와 '밥 먹었어?'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질문이었어. 어느 날 친구 J가 묻더라. 너는 왜 이렇게 밥 먹었는지를 궁금해하느냐고. 나의 인사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인 그 친구가 귀여워 한참을 웃다가 대한민국의 '밥 먹자' 문화에 대해 설명해주던 기억이 나. 그리고 그 날, 나 또한 우리가 얼마나 다른 문화 속에 살고 있는지 제대로 인지하기 시작했어.
'카르페 디엠: 현재를 즐기라'는 말처럼 때로는 그저 순간의 좋은 감정에 따라 미래를 약속하는 것도 나쁘지 않은 듯한데, 독일인들은 가끔 너무 딱딱한 원칙주의자처럼 행동할 때가 있어. 분위기가 한껏 달아오른 순간에도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에만 'OK'를 외치는 그들이 때로는 차가운 개인주의자처럼 느껴지다가도,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에는 100프로의 진심을 베푸는 그들에게서 오묘하게도 가끔은 뜨거운 인간미가 느껴지기도 해.
'빈말'은 물론 '애교'조차 찾아보기 힘든 그들에게 무엇을 기대할 수 있느냐고? 투박하지만 진심 어린 그들의 행동은 사람의 마음을 두드리는 감동을 이끌어 내더라. 한국어의 넓은 스펙트럼에 비해 독일어는 감정표현이 간단하고 단어의 수도 적어. 그래서 때로는 표현의 답답함을 느끼기도 하지만 빈말 대신 지킬 수 있는 말을 내뱉기 위해 애쓰고, 포옹으로 반가움을 표현하는 독일인들이 이제는 참 편하게 느껴져.
인생의 전반에 있어 '확실함'을 추구하는 독일인들의 성향이 잘 담긴 약속문화는 관공서 및 관청, 병원 등의 공적인 영역에서도 빛을 발해. 약속을 잡지 않은 방문은 불가하고, 아주 급한 일도 원칙에 따라 기다려야만 처리되는 경우가 많아. 처음에는 이와 같이 절대적인 약속만을 중요시하는 그들의 융통성 없는 대처에 화가 많이 났지만 이제는 무슨 일을 하기 전에 예약하는 것을 가장 우선으로 하고, 끝없는 기다림에 더 이상 화도 잘 나지 않는 것을 보면 꽤 적응이 된 것이 아닐까?
은, 혹시 언젠가 독일인들에게 '밥 먹자'라거나 '오늘 예쁘네'라는 말을 들으면 그 말은 100프로 진심이라는 것을 기억해둬. 친해지고 싶은 마음에 던지는 가벼운 말이 아닌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그린 라이트라는 사실! 표현이 많고 다정다감한 한국인들과는 다소 차이가 있지만 독일인들이 소소하게 내뱉는 단어에서 진심을 느끼는 순간 최고의 친구는 이미 얻었다고 봐도 좋아 :^)
그나저나, 우리 언제쯤 함께 밥 먹을 수 있을까? 사랑하는 은, 밥 한번 먹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