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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꽃바람 Feb 14. 2024

나의 재테크 이야기

 ' 지금 아이파크 계약해도 좋을지 몰라 문자 남겨봅니다.'

오랜만에 단골 미용실 원장님께 연락이 왔다. 통화 중이었던 나는 문자를 남겨달라고 메시지를 보냈더니 저런 문자를 남기셨다. 작년에도 사라 고할 때 안 사시더니 감나무골 분양 앞두고 이제야 사시려고 그러나? 언제부터였을까? 주변 사람들이 주택 구입에 앞서 먼저 내 의견을 물어보는 게......


  나의 투자 스토리는 결혼과 함께 시작되었다. 결혼 전 재건축 아파트에 투자했다가 재미를 못 본 남편은 투자에 대한 욕심이 남달랐다. 난 내 집 한 채는 필수라 생각했었고 결혼 전에도 투자로 아파트나 오피스텔을 사볼까 고민한 적은 있었으나 엄마의 만류로 실행에 옮기진 못했었다. 나중에 나를 말렸던 이유를 들으니 결혼할 때 엄마한테 손 벌릴까 봐 그랬다고 했다. 결혼 후 우연히 너나위의 '월급쟁이 부자로 은퇴하라'라는 책을 읽게 되었 부동산 투자를 하는 고등학교 동창을 만난 일은 머리를 망치로 얻어맞은 기분이 들게 였다.  일들은 투자에 대해 부정적이던 나의 마인드를 180도 변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결혼하며 신혼살림을 소도시에서 시작했다. 이미 결혼해서 육아를 해본 친구들은 그곳으로 간다는 나를 한사코 말렸다. 도와줄 사람 아무도 없는 곳에 가면 네가 고생한다는 게 그 이유였다. 그땐 육아의 고충이 뭔지도 몰랐기에 겁이 없었고 무엇보다 그 곳으로 갔던 단 하나의  이유는 깔고 앉는 돈을 줄여 그 돈을 불려보겠다는 마음 때문이었다. 남편 회사에서 지원해 주는 전세금 1억에 신랑돈 5천을 보태어 전셋집을 구했다. 거주지가 회사 근처 일 경우에만 그 돈을 지원받을 수 있었다. 어차피 우리 집도 아니니 신혼살림에도 돈을 아끼고자 붙박이장이 가장 많이 들어 있는 집으로 골랐고 혼수는 최소한만 했다. 그래서 내가 결혼 전에 모은 돈의 대부분은 투자의 종잣돈으로 사용할 수가 있었다. 허나 남편은 결혼 전 재건축아파트를 팔았다길래 현금으로 가지고 있는 줄 알았는데 결혼해서 까보니 그 돈은 전부 주식에 물려 있었다. 난 사기를 당한 듯한 큰 배신감을 느꼈고 내가 친정 옆에 살았다면 결혼 전에 그 사실을 알게 되었을 것 같아 신랑 회사가 있는 도시에 신혼살림을 차린 것을 땅을 치고 후회했다. 이미 큰 손해를 보고 있던 터라 남편의 주식은 정리할 수가 없었다. 결혼과 거의 동시에 임신을 했고 배불뚝이가 된 채 땅을 보러 다녔다. 시청에 도시계획을 확인하러 갔다가 동호회 지인을 만난 적도 있었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그때 보러 다녔던 토지 중엔 대학병원 부근과 관광지 근처 토지를 포함한 알짜 토지들도 있었다. 그때 가진 돈이 2억도 채 되지 않았는데 토지에 얼마 되지도 않는 전 재산을 묶어둘 자신은 없었다. 그러기엔 우리 집이 없었기 때문이다. 남편에게 우리 집을 사는 게 먼저인 것 같다고 얘기했고 남편은  살던 도시의 새 아파트를 추천했다. 난 그곳에 눌러살고 싶진 않았다. 거기에 집을 사면 영원히 살 것만 같았기에 우리 집은 전주에 사겠노라했다. 그 당시 전주는 만성지구와 에코시티 개발이 한창이었고 군산 출퇴근의 편리를 이유 삼아 남편은 만성지구를 원했다. 그렇게 우리는 분양권 상태의 첫 집을 장만했다.


  그 사이 난 출산 후 2년간 휴직을 했고 휴직 중 하늘이 무너지는 일이 생겼다. 남편이 나 몰래 추가로 또 주식을 매입한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처음에는 미웠지만 용서해 주었다. 내가 우려했던 것은 처음엔 얼마 되지 않는 돈을 대출받긴 했지만 수익을 냈다는 사실이었다. 그러면 또 손을 댈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나도 결혼 전 소액으로나마 주식을 해보았기에 주식을 하는 사람의 심리는 알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몇 달이 채 지나지도 않아 나 몰래 마이너스 통장을 이용해 두 번째 대출을 받아 주식을 산 것이 아닌가. 그런데 두 번째는 도저히 용서가 되지 않았다. 여기서 용서한다면 우리의 미래는 없을 거라 생각했다. 양가에 이 사실을 알렸고 결혼 전부터 가지고 있던 주식을 포함한 모든 주식을 당장 팔지 않으면 난 이혼할 거라 했다. 한다면 하고야 마는 내가 무서웠던지 남편은 크게 손해를 보고  손절했다. 그 금액은 당시 1억에 육박하는 금액으로 내가 결혼하기 전에 모아 온 종잣돈에 가까운 금액이었다. 군산을 신혼집으로 택했던 것을 또 후회하게 되었다. 전주로 갔다면 결혼 전 주식을 팔아서 집을 사든 전셋집을 구하는데 썼을 텐데 그마저도 다 날아간 꼴이 되었다.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였구나. 인생이 허무해졌다. 내가 직장 생활하며 열심히 모은 돈이 전부 날아간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렇게 주식을 팔고 남은 돈은 꼴랑 몇천만 원이었다. 돈도 날려먹은 주제에 주식해서 그 돈으로 새로 생기는 신도시에 집 사려고 했다는 남편의 말은 나를 분노케 했다. 그럼에도 그 돈에 빚을 내서 두 번째 집을 사게 되었다. 투자이기보다는 친정이 가까운 곳에 살고 싶어서였다. 처음 샀던 집이 몇 천 올라서 딱 그만큼의 프리미엄을 지불하고 두 번째 집을 장만했다. 아마 처음 집이 오르지 않았다면 그 돈도 손이 떨려서 사지 못했을 것이다. 열심히 중도금 대출을 갚았고 그 와중 남편은 전주에 생길 테라스 하우스를 광교 호수 공원을 빗대어 얘기하며 사고 싶다 하였다. 하지만 내 의견은 달랐고 동생이 소개해준 부동산 투자 단톡방에서 수도권 투자자들을 만나게 된다. 그들이 전주에 임장을 온다고 하였을 때 일부러 자진해서 라이딩을 하였고 투자자들이 어떤 관점으로 투자를 하는지 배웠다. 테라스 하우스에 대한 그들의 의견도 나와 같았다. 집을 빵사듯 사는 그들을 보면서 이런 세계가 있다는 게 너무나도 신기했다.


  임장 다음날 투자자들 중 한 분이 경기도 남부의 도시를 가보신다고 하였다. 공부 삼아 함께 가보고 싶었는데 하필 우리 아들이 폐렴으로 내가 돌봐야 하는 상황이었다. 아쉬움을 달래려고 그다음 날 혼자 차를 끌고 그곳에 가보았다. 가서 보니 경기 남부라 해도 인프라 대비 집값이 너무 싸보였고 부동산은 엄청 바쁜 것이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 사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여기서 3 주택으로 갈 것인가 비과세를 받을 것인가를 고민하며 계산기를 두드려보니 다주택인 게 이득이라는 결론이 나왔다. 이틀 만에 풀대출을 받아 집을 보지도 않고 세 번째 집을 장만했다. 가슴이 벌렁거려 며칠간은 잠도 오지 않았다. 망하면 어쩌나.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투자자들이 대거 몰려와 코브라 곡선을 그리며 집값은 상승했다. 사자마자 오르다니 참 운이 좋았다.


  2021년 1월 투자자들이 서울에서 모임을 한다길래 나도 올라갔다. 밥 먹는 자리에서 평택의 분양권 얘기가 나왔다. 여기까지 왔으니 가는 길에 분양권 하나 주워가라며 방장님이 내게 말씀하셨다. 우스갯 소리였지만 다들 진지했다. 모임 다음날 몇몇은 그곳의 모델하우스로 향했고 가지 못했던 나는 그분들께 소식을 전해 들었다. 벌써 프리미엄이 올라가고 있다는.... 1등 입지 아니면 거들떠도 안 보던 나는 일명 천띠기를 해보겠노라고 남편한테 말했더니 나답지 않아 의아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난 그다음 날 동생을 모델하우스로 불렀다. 불나방 같은 성격의 동생은 자기도 분양권을 한 개 사겠다는 것이었다. 내가 불렀다는 책임감에 난 우리 둘이 한 개를 같이 사자고 했고 의도치 않게 함께 공동투자를 하게 되었다. 우리가 산 그 분양권은 며칠 동안 미친 듯이 프리미엄이 올라서 내가 생각했던 천 띠기 이상의 수익을 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갑자기 중국에서 날아온 '우한 폐렴' 소식으로 인해 모델하우스는 문을 닫고 명의변경도 할 수가 없게 되었다. 당연히 프리미엄도 곤두박질쳤다. 힘들게 명변 날짜를 잡았는데 코로나도 무섭거니와 이걸 명변을 하는 게 맞는 건지 너무나도 불안했다. 공포는 극에 달했다. 결국 동생과 나는 분양권을 포기하고 다른 사람에게 팔기로 결정했다. 다행히 중개수수료 몇십만 원 정도의 손해로 분양권은 넘길 수 있었다. 여기서 공동투자는 절대 하지 말아야겠다는 큰 교훈을 얻었다. 피가 섞인 동생이어도 각자의 상황과 생각이 다른지라 의견이 맞지 않아 조율이 상당히 힘들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코로나가 왔고 경기를 부양하기 위해 정부는 저금리 정책을 펼치고 시중 통화량을 늘렸다. 자산에 돈이 몰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남편은 본인이 군인 일 때 평택에 있었다고 했다. 그곳의 미래를 내다보고 꼭 투자하고 싶어 했다. 우리는 아들을 데리고 평택을 여러 번 방문하였고 취득세 정책이 바뀌기 바로 직전에 4번째 주택을 평택에 장만하게 되었다. 이때 즈음부터 나는 몇 년간 아이를 재운다음 새벽까지 투자 공부를 했다. 다행히도 담임이 아니었던지라 고되지 않아 가능했던 것 같고 그조차도 운이 좋았다고 생각한다. 공모주 투자도 함께 병행하였다. 공모주는 엄마 덕에 친숙했던 지라 두렵지 않았고 공모주는 저위험에 중수익의 투자 루트였다. 다양한 재테크 책을 읽으며 금융 관련 투자도 해보는데 이때 시도했던 게 KRX 금, 달러, 채권이었다. 하지만 여전히 주식은 너무도 어려워서 손도 대지 않았다.


  주식시장의 활황으로 남편은 다시 주식에 대한 욕심이 생겼다. 만약 다시 주식에 손을 대면 나랑 이혼할 줄 알라는 나의 엄포 탓에 주식은 함께 하기로 했다. 이미 주식시장은 오를 대로 오른 것 같았다. 근데 이 와중에 자기 회사 주식을 사라니... 나는 그럴 바엔 삼성전자를 사겠노라 했지만 자기 회사라 확실하다며 아주 확신에 차서 나에게 얘기를 했다. 자기 연봉만큼은 사야 한다나. 하지만 난 그 말을 신뢰할 수 없었고 사기 싫었다. 그래서 남편 연봉의 1/4 정도만 사겠노라 했고 만약 이번에도 당신 말이 틀리면 다시는 주식에 관해 왈가왈부하지 말라고 미리 못을 박아두었다. 그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 역시나 내 예상대로 그 주식은 반토막이 나서 내 계좌의 다른 주식의 수익을 다 까먹은 꼴이 되었다. 남편은 주식은 진짜 꽝이다. 대신 이제 주식에 관해 나에게 뭐라 얘기할 수는 없으니 장기적으로 보면 그게 낫다고 본다.   


  그 이후에도 2건의 부동산 투자를 강행하였고 그중 1건은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다. 그래도 그나마 나는 욕심을 덜 부린 덕에 부동산 하락기에도 잘 살아남았다고 할 수 있는데 함께 투자하던 수도권 투자자들 중에는 강남에 살고 있음에도 이자를 벌기 위해 다시 일터로 돌아간 사람들이 허다했다. 또한 그들은 보유했던 부동산을 급매로 손해 보더라도 던져야만 했다. 아직 해결되지 않은 나의 1건은 경남에 위치하고 있는데 그 당시 그 분양권을 사기 위해 어찌 그리도 열정적이었는지 하루 종일 일하고 온 사람이 무슨 각성이나 된 것처럼 새벽 3시까지 지도를 들여다 보고 분석을 했는가 싶다. 결국 내 투자의 대 원칙을 어긴 탓에 지금은 고생 중이지만 이 모든 것은 인플레이션과 시간이 해결해 주리라 믿는다.


  투자하며 만났던 지인과의 최근 통화가 참으로 인상 깊었다. 난 그 분과 친분도 두텁지 않아 전화조차 어색할 정도의 사이이다. 그분은 대출상담사로부터 사기를 당했는데 그것은 일종의 폰지사기였다. 규모가 어마어마해 신문에도 나올 정도였다. 난 그 대출상담사의 강의를 들은 적이 있는데 생긴 건 정말 착하게 생겨가지고 그런 사기를 칠 줄은 정말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렇게 말도 안 되는 이자를 준다면 의심부터 해보았어야 할 텐데 당한 사람들이 그렇게도 많은 것은 그들의 욕심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그놈이 나쁜 놈이었기 때문이었을까. 둘 다 맞겠지만 세상은 순리대로 살아야 하는 법이거늘. 뭐든 정상 범주를 넘어선다면 한 번쯤은 의심을 해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욕심은 화를 부른다. 내가 투자를 하며 깨달은 결론이다. 욕심부리지 말자. 천천히 가는 게 부자 되는 가장 빠른 길이라는 사실! 이게 진리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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