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민준이가 너 본다고 왔어!"
" 뭐? 오늘?? 아니 어떻게 왔어? 딸은 누가 보구?"
세상 피곤해서 운동하러 가기 싫고 누워 있고만 싶던 어느 날이었다. 운동을 갈까 말까 몇 번을 고민하다 꼬깃꼬깃 구겨진 운동복에 무거운 몸을 욱여넣었다. 입고 싶은 운동복은 세탁기에 들어간 건지 보이지도 않았고 해묵은 운동복만 눈에 보였다. 운동할 때는 기분전환을 위해 내 나름 갖춰 입는다고 레깅스에 탑 입고 운동을 하는데 그날은 예외였다.
'첫사랑'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다들 누군가 한 명씩은 떠오를 것이다. 그 첫사랑이 결실을 맺은 경우가 아니라면 대부분은 마음 깊은 곳 어딘가에 담아 두지 않았을까. 처음 했던 사랑을 첫사랑이라고 해야 할지 아니면 혼자 좋아했던 짝사랑도 그게 처음 누군가를 좋아했다면 첫사랑이라고 해야 할지 정의하기 나름이겠지만 나에게 첫사랑은 내가 처음으로 좋아했던 사람으로 정의되어 있다.
내 첫사랑은 초등학교 5학년 때 우리 반 친구였다. 그 친구는 까무잡잡한 피부에 축구 잘하고 공부도 잘하는 남자다운 아이였다. 그 당시 키도 상당히 컸던 것으로 기억한다. 학급 회장에 리더십도 있었고 여자 친구들에게도 인기가 많았다. 난 키가 매우 작았지만 그 당시 볼살이 통통하고 귀여운 이미지였고 나 역시도 남자아이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하교하는 나를 따라 집까지 쫓아오는 아이들이 있었다고 하면 믿을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암튼 그땐 그랬다.
그 친구는 나를 맨날 못살게 굴었다. 초등학교 때 짓궂은 남자애들이 다들 그렇긴 하지만 잊지 못할 사건이 몇 개 있다. 그 아이와는 초등학교 5학년 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같은 반이었는데 나에게 먼저 내기를 제안한 적도 여러 번이었다. 한 번은 남자 셋 vs 여자 셋으로 시험 성적 내기를 하자고 했다. 세 명 시험 성적 평균을 내서 진 팀이 이긴 팀에게 아이스크림을 사주자는 것이었다. 제안은 먼저 해놓고서는 여자 셋인 우리 팀이 이겼으나 아이스크림은 사주지도 않고 모른 척했다.
그 후엔 내가 바둑을 좀 두는 것을 알고는 바둑 진 사람이 아이스크림을 사주자고 또 내기를 제안했다. 본인은 나를 이겨서 내 코를 납작하게 해 주려는 의도임이 분명했다. 난 한번 당했으면서도 설마 이번에도 또 약속을 어길까 싶어 그 내기바둑 제안을 받아줬다. 반 친구들이 모두 몰려와 우리 둘을 둘러싸고 구경을 했고 승리가 코앞이었다. 그런데 그때 자기가 질 것 같으니 바둑판을 뒤집어엎어 버렸다. 난 좋아하는 마음이 다 없어져버릴 것처럼 화가 났다. 곧장 선생님께 가서 일렀고 선생님은 두고두고 그 녀석에게 뭐라고 하셨다.
" 사내자식이 아이스크림 하나 사주면 되지 그거 아까워서 바둑판을 엎냐!!! 쪼잔하게!"
중학교 때 학원도 같이 다녔는데 어느 날은 학원에서 반 친구들이 다 있는 강의실에서 모두 다 들을 수 있는 목소리로 뭐라고 해댔다.
" 야! 김○○! 넌 네 다리가 이쁜 줄 아냐? 공주병이냐? 왜 맨날 짧은 것만 입고 다녀. "
그러자 다른 남자아이들이 너 김○○ 좋아하는 거 아니냐? 왜 가만히 있는 애를 맨날 괴롭히고 못살게 트집 잡고 난리냐며 뭐라고 해줬다. 쌤통이었다. 내심 나를 좋아하는 걸까 궁금하기도 했다. 다른 남자아이들의 의심덕에 그 후론 나를 괴롭히지 않았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참 오랜 시간 그 친구를 좋아했다. 하지만 고등학교 땐 학원이라는 연결고리도 없었고 그땐 학교에 붙잡혀서 다들 야자를 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멀어졌고 볼 수도 없었다. 난 여고생이었고 그 아이는 남고생이었다. 졸업 후 그의 진로를 다른 남자 동창생들을 통해 수소문했더니 지방에 있는 특수대학에 진학할 거라고 했다. 6학년 때 같은 반이었던 남자친구들과는 결혼식도 오갈 정도로 친하게 지냈으면서 그와는 6학년때는 같은 반이 아니었기에 연결고리가 전혀 없었다.
몇 달 전 난 운동하다 여중 동창을 마주하고 그녀에게 먼저 인사를 했다. 그녀는 내 첫사랑과 6학년 때 같은 반이었고 성인이 돼서 만나 친구로 지내다 결혼까지 했다고 했다. 그녀는 내 첫사랑, 즉 자기 남편에게 내 얘기를 했다고 했다. 그러자 그가 내가 보고 싶다며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것이다. 아니 예고편이라도 해주던지.. 세상 젤로 꼬질할 때 거기다 땀까지 흘린 쌩얼을 30년 만에 만난 첫사랑에게 보여주는 이건 대체 무슨 상황이냐.
" 야 진짜 오랜만이다. 너 근데 그 귀엽던 모습 다 어디로 갔냐? 크크. 얼굴에 독기가 가득해졌는데?
장난치는 그를 와이프가 만류했다.
이 녀석 성격은 변함이 없었는데 애석하게도 키 역시도 변함이 없었다. 너 안 크고 뭐 했니? 아 달라진 건 키가 위로 안 크고 옆으로 컸다는 슬픈 사실이다. 하마터면 못 알아볼뻔했다.
어느 날은 그 녀석이 와이프를 시켜 나에게 물어보라고 했단다.
" 나 인기 많았었지?"라고...
난 근데 왜 그 말이 '나 너 좋아했었는데 너도 나 좋아했었니?'로 들린 걸까.
당신의 첫사랑은 어디에 있나요?
난 그와 같은 아파트 다른 지붕 아래에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