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2. 1. 16 - 2008. 8. 27
비가 온다.
한 주가 금방 흘러갔다.
휴가를 보내고 이틀간 다시 회사 일에 적응하느라 힘들었다.
엄마의 기일도 지났다.
엄마를 그리며 생각하는 일은 익숙한 일인데도
'8월 27일'
유독 이 날만 되면 갈 곳을 잃은 사람처럼 멍해진다.
오랜만에 엄마의 일기장을 펴보았다.
- 98년 7월 1일, 열 살 무렵의 나에게 남긴 편지
사랑한다. 내 딸
아마 세상에서 이 엄마만큼 널 사랑하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오늘 일을 내일로 미루지 말고,
정말 예쁘게, 현명하게, 멋지게 커주었으면 한다.
살아온 나날이 후회되지 않게...
대학을 가고, 직장인이 되고, 시집을 가고
무엇보다 긍정적으로 살고..
순수하게 모든 일을 받아들이자.
탓도 말고, 원망도 말고, 주어진 대로 현실에 열심히 살자.
엄마의 숙제는 내 딸을 잘 키우는 것이다.
많이 사랑한다.
우리 열심히 살자.
그 날은 내가 숙제를 미루고, 엄마에게 말대꾸를 해서 혼난 날로 짐작된다.
엄마는 나를 혼내고서 새벽녘 홀로 식탁에 앉아 일기장에 편지를 남겼을 것이다.
도무지 말을 듣지 않는 어린 딸을 향한 당부이자,
외로움을 이길 엄마의 다짐을 꾹꾹 눌러 담았을 것이다.
키가 크고 마른 체격
부산 사투리 억양
내성적이나 흥이 많고
웃을 땐 콧등을 찌푸리던 주름이 진했던
동네 친구와 목욕탕 가는 것이 유일한 취미였고
나를 혼낼 때면 세상에서 듣지 못한 욕들이 흘러나왔고
타지에 있던 아버지 소식이 잠잠해질 때면
베란다에서 홀로 담배를 쓸쓸히 피우던 엄마
엄마는 하고 싶었던 것이 많았으나, 하지 못한 것이 많았다.
일기장은 회한이 가득했다.
스스로를 무수히 탓했던 것과는 달리, 주변 사람들을 살뜰히 아끼던 마음.
그들을 향해 전하지 못한 편지들이 남아있었다.
아버지로부터 독립해서 처음으로 맞이한 엄마의 기일.
어느 가족은 기일이 되면 가족이 모인다지만,
우리는 함께 살 때도 엄마를 따로 기억했다.
여전히 엄마를 기억하는 일은
엄마가 남긴 말처럼 세상에 다시없을 사랑을 정처 없이 찾아 헤매는 일이다.
하지만 엄마의 남겨진 사랑은 헛걸음도 돌아오게 한다.
늘 다짐하며 살았던 당신의 그 길을 기억하며
나는 다시 걷는다.
엄마는 지금의 나를 보고 뭐라고 할까.
직접 전하지 못한 말을 품고 떠난 지 12년이나 흐른 지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