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나무 이야기
만나고 헤어지는 뻔한 연애 패턴이 지루하고 부질없다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첫 번째 봄
어린 나무의 몸에 잎이 돋아났다. 나무는 자기 몸에 돋아난 연두빛 어린 잎이 너무 귀여웠다. 뿌리로 빨아들인 물과 영양분을 어린잎에게 정성껏 전달해줬다. 매일 아침 잘 잤느냐 물어봐주고, 찬바람 거센바람이 불면 괜찮으냐 걱정해주고, 밤이 되면 잘 자라고 인사해줬다.
여름
잎들은 초록빛이 되고 튼튼해졌다. 어린 나무는 자라난 초록잎도 예쁘고 매력 있다고 생각했다. 날씨는 무더웠고 때로는 태풍도 불었지만 어린 나무는 잎들을 끌어안고 버텨냈다.
가을
날씨가 쌀쌀해지기 시작하더니 잎들이 빨갛게 물들기 시작했다. 어린 나무는 어쩜 이렇게 색깔이 고울까 감탄했다. 하지만, 아름다움도 잠시, 잎들이 힘이 없어지고 쪼그라들기 시작했다. 아무리 정성을 들여도 잎들이 예전처럼 자기 몸에 힘있게 붙어있지 않다는 게 느껴졌다. 어린 나무는 너무 두렵고 무서웠다.
처음 난 잎이 몸에서 떨어져나간 순간, 나무는 온몸으로 울었다. 바람은 불고 더 많은 잎이 떨어져나갔다.
"이럴 거면 난 이때까지 뭐하러 잎들을 챙겨준 거야!"
자신을 떠난 나뭇잎에 대한 배신감과 그들을 지키지 못했다는 실패감에 더더더 큰 소리로 울었다.
슬픔에 축 쳐진 어린나무가 안타까웠던지,
옆에 있던 어른나무가 말을 꺼냈다.
원래 그런거야.
잎은 봄이 오면 다시 돋아나.
새로 오는 봄엔 네 마음을 잘 돌보아서 겨울이 다가와도 나뭇잎들이랑 사이좋게 인사하고 보내줘.
새로 날 잎에게 정성 들이지 말라는 게 아니고, 물과 영양분을 전달하지 말라는 게 아니고, '겨울이 오면 떠날 것'이라는 것만 알고 있으면 돼. 그럼 아쉽더라도 오늘처럼 힘들지는 않을 거야.
지금 너를 봐. 온몸으로 슬퍼하니까 힘을 잃어서 잎들도 나보다 훨씬 더 많이 떨어져나갔잖아.
원래 그런거야.
땅에 떨어진 잎들은 흙이 되고 영양분이 되어 다시 너에게 흡수되고, 다시 너를 이루게 될 거야.
어린나무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어떻게 헤어질 생각을 가지고 잎들을 대하는 거지?
그 생각을 가지고 어떻게 상대방 얼굴을 보는 거지?
잔인하기도 하다.
난 절대 저런 나무가 되지 말아야지.
내 순수한 마음을 잃지 않을 거야!'
어른나무는 미소를 머금은 채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린나무는 날짜를 세어가며 봄을 기다렸다.
"봄아 어서 와라! 이번엔 마음이 너무 커지지 않게, 상처 덜 받게 적당히만 좋아하면 되겠지?"
두 번째 봄
이번 봄은 유독 느리게 오는가 싶더니 그래도 햇빛이 많이 따스해졌다.
'드디어 새로운 아이들이 돋아나겠구나! 이번엔 진짜 잘해봐야지!'
어린나무는 나뭇잎에 대한 자신의 마음이 커지지 않도록 노력했다. 하지만 마음을 줄이려고 노력하는 것은 너무 힘들었다.
'마음이 이미 큰데 어떻게 그 마음을 줄이는 노력을 할 수 있을까? 마음이 큰 쪽이 마음을 줄이려고 노력할 게 아니라, 마음이 작은 쪽이 조금만 더 좋아해주면 균형이 딱 맞을 텐데...'
이번 가을에도 나무는 나뭇잎을 보내는 것이 너무 힘들었다.
"잎은 아무것도 몰라줘! 내가 이렇게 힘겹게 노력하는 것도 몰라주고... 다음 생에는 나무 말고 잎으로 태어나서 안 힘들게 살거야. 이런 걱정 안 하고 살 거야!"
나무는 엉엉 울었다.
세 번째 봄
세 번째 봄이 찾아왔다.
이번에는 나무의 마음가짐이 조금 달랐다.
가을이 오면 나뭇잎들은 또 자신을 떠나겠지만, 나무는 예쁜 잎들이 좋으니까 자기가 좋은만큼 진심을 다하고 정성을 다했다.
헤어질 걸 알기에 덜 정성껏, 소홀히 대한 것이 아니라
헤어질 걸 알지만 어차피 헤어질 거, 같이 있는 동안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나뭇잎을 챙겨주면서 행복을 느꼈고, 그걸로 나뭇잎이 행복해하면 그 자신도 행복했다.
그리고 쌀쌀한 가을이 다가오자, 보내줄 때가 되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나뭇잎들에게 인사를 해줬더니 나뭇잎들도 나무에게 손을 흔들며 마지막 인사를 해주었다.
나무는 그제서야 깨달았다.
내 마음을 억지로 줄이는 게 아니라 '보내준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는 것' 그걸로 되는 거구나.
나무는 나뭇잎들을 챙겨주던 시간이 힘겹지도 않았고, 함께한 시간들이 너무 행복하고 좋았다. 보내는 건 슬퍼서 여전히 눈물을 흘렸지만 더 이상 몸이 아플 정도로 힘들고 삶이 무너지는 것 같지는 않았다.
어린나무는 어른나무가 되어있었다.
더 이상 가슴 졸이며 봄, 여름, 가을을 보내지 않았고
내가 좋은 대로 정성껏 챙겨주고 가을의 끝이 오면 미련 없이 보내주었다.
나무는 지난번에 봤던 어른나무의 미소를 이제야 이해할 수 있었다.
[끝]
회자정리가 잔인하고 인정 없는 말이라고 생각했는데 나무를 보면서 처음으로 이해했다. 이별이든 사별이든 모든 만남의 끝에는 헤어짐이 있다. 만날 때 헤어질 것을 생각한다는 것은 결코 로맨틱하지 않다. 하지만 진짜 성숙한 연애의 시작은 거기서부터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서 마음을 나눈다.
마음이 맞으면 계속 사귀어나가고,
마음이 안 맞으면 돌아서기도 한다.
내 마음대로, 내가 원하는 대로 나에게 모두 맞춰주기를 강요할 수 없다.
연애뿐만이 아니라 모든 만남에 있어서 현명한 만남, 지혜로운 만남을 이어나가는 사람이 되고 싶다. 만남의 끝도 깔끔하게 맺을 줄 아는 그런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