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가가책방 Dec 08. 2023

소설 속 이야기가 내 삶으로 들어오는 순간의 실감

가가책방 고전 읽기 『도련님』 후기

사람들은 떠나고 나만 홀로 남아

 2023년 마지막이었을지 모를 가가책방 고전읽기 『도련님』편을 끝내고 정리하다 '또 사진을 안 남겼네'하고 3초 정도 아쉬워했다. 어디에 쓰기 위해서보다는 '기록이 없으면 기억도 없다'는 생각에서다. 굳이 사진첩을 들춰 이날의 모임을 되새기는 일은 없겠지만 다 잊고 있다가 어느 날 우연히 사진을 보고 그날 오갔던 대화나 분위기의 일부라도 떠올리면 흐뭇할 것 같은데. 

 어제로 돌아가 사진을 찍을 수는 없으니 오늘이라도 기억에 남아 있는 생각들을 적는다.


 소도시, 이름 없는 책방의 평일 저녁 독서 모임은 언뜻 생각해도 활성화가 어려울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스스로 운영하고 있으면서도 놀라는 날이 많았던 이유도 거기에 있다. 

 "신청자가 없어도 어쩔 수 없지, 뭐." 

"이번 기회에 한 번 더 읽으니 좋네."

이런 마음으로, 되면 하고 안 되면 만다는 식이 아니면 실망하고 지칠까 봐 무서운 건지도 모르겠다.


 다섯이 함께 할 예정이었지만 한 분이 일정을 착각해 넷이 모였다. 참석하고 싶어서 신청했다가 참여하지 못하게 돼도 어쩔 수 없다. 다음에 함께 할 수 있으면 그때 오면 되는 거니까. 책을 다 읽고 모인다는 책임감 말고 다른 부담은 덜어두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독서모임을 연다. 열린 마음과 이야기와 이어진 나의 이야기만 있다면 가가책방 고전읽기는 결코 지루하지 않을 테니까.


 나쓰메 소세키는 소설 전작을 모두 읽은 몇 안 되는 작가 중 하나다. 미완성 작품인 『명암』까지 모두 읽었다. 그중 『도련님』은 소재가 무겁지 않고 친근하며 분량에도 부담이 없어서 여러 번 읽은 소설이다. 고전의 매력이 읽을 때마다 다른 느낌, 생각, 깨달음을 준다는 건데 역시나 이번에도 새로웠다.


 소설을 읽으며 새삼 나쓰메 소세키가 얼마나 작정하고 이야기를 지었는지 생각하게 됐다. 당시의 세태, 사람들, 교육, 처세를 두루 꼬집는 문장이 많았는데 그 문장들이 지금 우리에게도 너무 유효해서 유쾌했다. 이 문장은 누구에게 주고 싶다거나 이 얘기는 이 사람한테 전해주면 잘 쓰겠다는 식으로 떠오르는 사람들도 있었다. 소설 속에 박제되어 죽어있는 문장이 아니라 살아 숨 쉬는 사람에게 잘 맞는, 잘 어울리는 살아있는 문장들이 거기 있었다.

오래 방치되어 있던 극장을 리노베이션 하면서 굳이 벽화를 남겨두었다_호서극장

다른 부분들도 새삼 흥미로웠지만 가장 새로웠던 부분은 인물보다 이야기의 배경이었다. 세상물정 모르는 철부지, 경험은 없고 정의감만 앞선 천둥벌거숭이 같은 인물에 이입해서 닮은 점과 다른 점을 찾으며 읽던 전과 가장 다른 부분이었다. 도쿄 토박이였다가 생각하지도 않았던 시골 학교 수학 선생으로 부임한 도련님이 겪는 사건들이 철부지 같은 도련님의 성격이나 성향 탓이 크다고 믿고 있었다. 시골 사람들의 의뭉스러움과 선생을 놀리고 괴롭히는 학생들의 장난이 단지 지역과 경험의 차이일 거라고 단순하게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 생각에서 전에는 처세에 능숙해지지 못하는 도련님의 세상 물정 모르는 치기가 낫기를 바랐다. 강하게 자기 생각만 고집할 게 아니라 속으로는 그렇게 생각하더라도 겉으로는 웃을 수 있어야 살아남는 거라며 나름의 조언도 늘어놓았다. 인물들의 갈등과 사건들이 결국 모두 개인의 문제라고 생각했던 거다.


 이번에 다시 읽고 사람들과 이야기 나누며 문득 나쓰메 소세키가 그 시대에 굳이 도련님 같은 성향의 인물을 도쿄에서 시골로 내려보낸 이유가 뭘까 생각하게 됐다. 다른 이유나 계기가 있어서라기보다 지금 내가 사는 곳이 소도시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대도시, 서울에서 읽을 때는 도무지 생각해 본 적 없는 지점이었으니 가장 설득력 있는 가설이다. 


 지금 사는 소도시는 작고, 사람은 적다. 인구 10만 명 남짓에 원도심에는 1만 명 미만이 거주한다. 어디서 뭘 하는 누구라는 걸 나만 모를 뿐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나를 안다. 몇 번 만난 적 있는 사람과 함께 걷던 한 번도 본 적 없는 사람과 인사를 나누며 생각보다 나를 잘 알고 있어서 깜짝 놀라며 자연스레 경계한 마음을 품은 적이 몇 번쯤 있다. 그런 경험을 하고 소설을 보니 또 달라졌을 것이다.


 거의 모든 소설에는 의도가 있다. 이야기를 쓴 의도, 읽었으면 하는 사람들, 그들에게 전해졌으면 하는 메시지가 숨어 있거나 노골적으로 드러나 있는 것이다. 나쓰메 소세키가 살던 100년 전 일본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밖으로는 거의 늘 전쟁 중이었고 이길 수 있을 거라 생각해 본 적 없는 러시아라는 세계를 꺾으며 기세등등했을 것이다. 동시에 계급 사회에 큰 변화를 겪으며 혼란스러웠을 것이고 경제 시스템과 출세의 기준이 바뀌면서 무엇이 옳은가 판단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전통적인 유지나 귀족보다 신흥 부호와 신지식인들이 득세했을 것이다. 옳은 말을 하는 사람보다 옳다고 믿게 만들거나 옳은 듯 보이는 사람들이 성공하는 일도 늘었을 것이다. 신뢰를 바탕으로 하던 관계는 계약 관계로 바뀌었을 것이고 상대의 성공이 나의 실패라는 경쟁 심리를 부추기는 일도 잦아졌을 것이다. 겉으로 웃으면서 약속하고 뒤에서 꼼수나 사기를 꾸미는 식의 일에 배웠다는 사람들이 앞장섰을 것이다. 순진한 사람들은 좋은 먹잇감이 되어 거듭 피해를 봤을 것이고 나중에는 사람을 믿지 못하게 됐을 것이다. 나쓰메 소세키의 눈에도 그런 모습이 보였을 것이고 그것이 그리 좋아 보이지 않았던 게 아닐까. 순박하고 순진하던 사람들이 사회의 변화와 경제 구조, 출세의 방식에 맞춰 거짓말과 속임수를 일삼는 모습에 한 마디 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도련님은 생각 끝마다 자신이 도쿄 토박이라는 자부심을 붙여 시골 사람들을 무시하는 마음을 먹지만 사실 도련님과 시골 사람들 중 누가 더 잘했다고 하기는 어렵다. 양쪽 모두 잘못한 일들이 있지만 그게 도련님이라는 인간의 모든 생각과 마음이라거나 시골 사람들 모두가 나쁘다고 볼 수 없어서다. 오기를 부리며 근거 없는 자신감을 내세우는 도련님의 면모는 분명 고쳐볼 부분이지만 솔직해서 속셈을 감추거나 속이지 않는 부분, 잘못을 인정하고 바로잡으려는 성격은 지켜가면 좋을 미덕이다. 시골 사람들 중에서도 선생들을 노골적으로 조롱하는 몇몇 학생들과 자신의 처세를 위해 음모를 꾸미는 몇몇 선생을 제외하면 비교적 순박하고 꾸밈없는 푸근함이 있다. 다만 세태가 각박해지는 쪽으로 흐르는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 '깍두기'가 사라진 것처럼 당시 일본에서도 조금 느리고 뒤떨어지는 듯 보이는 사람을 수용하거나 가르치기보다 이용하거나 배제하는 쪽으로 나아간 것이 아닐까.


 어린 시절 놀이를 할 때면 숫자가 맞지 않을 때가 드물지 않았다. 그럴 때면 어느 한 편 혹은 돌아가며 어리거나 잘 모르는 인원을 끼워주었다. 김치 이름이지만 낯설지 않은 '깍두기'가 받아들여질 수 있던 이유는 놀이의 목적이 노는 데에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게임이나 경기에 이기는 것이 아닌 같이 노는 것이었기에 약하고 못하는 이들도 어울릴 수 있는 여지가 생겼던 거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지지 말아야 하는', '질 수 없는', '져서는 안 되는' 식으로 놀이의 목표가 달라져버린 듯하다. 끼워주지 않는 게 너무 당연해진 세상. 끼고 싶으면 스스로 능력을 키워서 와야 하는 세상. 속이려는 사람의 의도를 간파하고 스스로 사기당하지 않아야 하는 세상. 100년 전 소세키가 『도련님』에서 그려낸 세계의 모습과 별반 달라 보이지 않는 것이다.


 어제 모임 내내 내 입에 붙어 있던 말이 '각박해졌다'다. 인심도 사람들도 조직도 나라도 예전보다 더 각박해진 기분에 사로잡혔기 때문이다. 

 조직의 목표는 성과를 내는 것이고 부서가 성과를 내지 못하게 하는 직원은 제재하거나 배제하는 게 자연스럽고 직장 안에서만큼은 사람보다는 능력이나 기능으로 보는 일들이 뉴스 속에 자꾸 등장한다. 사람들의 생각이 잘못되고, 사람이 나쁜 경우도 적지 않다는 걸 경험으로 안다. 내가 속한 조직에 그런 사람이 있다면 나부터 그를 배제하고 싶어질 것이다. 그러나 그런 마음은 그 마음이고 안타까움은 안타까움이다. 


 소설 『도련님』속에서 직장과 지역 사회에서 정치질을 잘하는 사람들이 잘 되는 게 꼴 보기 싫었다. 착한 사람, 좋은 사람들이 그들과 맞서지 않고 조용히 받아들여 물러나는 모습도 곱게 보이지 않았다. 정치질 잘하는 사람에게 알랑 거리며 부역하는 사람들은 더 싫었다. 그런 변화를 어쩔 수 없는 시대의 흐름, 대세라고 받아들여야 하는 사회도 유쾌하지 않다. 그래서 점점 더 각박해지고 있다고 느꼈다. 나쓰메 소세키도 그런 세태가 안타까웠을 거라고 상상했다. 그러면서 나는 그러지 말아야지 아니라 그런 사람들을 만나지 않았으면 하고 바라는 나를 깨달으며 깜짝 놀라는 것이다. 이래서 도망칠 수밖에 없다. 


후기를 끝내며 이런 생각을 했다.

이래서 도망칠 수밖에 없다.

세상 끝까지.


거짓말을 하고 벌을 피할 생각이라면 처음부터 장난 같은 건 아예 하지 말아야 한다. 거짓말과 벌은 붙어 다니기 마련이다._도련님/현암사
초등학교나 중학교에서 윤리 선생님이 거짓말을 하지 마라, 정직하라고 가르치지 않는 편이 낫다. 차라리 큰맘 먹고 학교에서 거짓말하는 법이라든가 사람을 믿지 않는 비법, 또는 사람을 이용하는 술책 등을 가르치는 것이 이 세상을 위해서도, 당사자를 위해서도 좋을 것이다._도련님/현암사


매거진의 이전글 문해력보다 이해력 문제 아닐까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