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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가책방 Oct 09. 2024

나를 찾는 길과 잃어버리는 갈림길에서

필요한 건 나에게 집중하는 시간

무언가를 굳이 하지 않는 만큼 어떤 일은 일부러 시간을 내기도 한다. 변명 같지만 고요한 호수 위를 헤엄치는 물새도 수면 아래에서는 분주한 법이니까.


 나를 찾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두고 오랜 시간, 여러 가지로 생각을 이어오고 있다. 어떤 방법은 그 시기에 적절해서 구원이 되고 또 어떤 방법은 오히려 무리하게 만들어서 실망하게도 한다. 하지만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시도조차 않는 것보다는 마음을 움직이는 데 도움이 되는 시도이므로 계속하는 것이다. 사람이 무슨 기계인가 묻기도 하지만 사람이란 몸이나 마음이나 쓰지 않고 움직이지 않으면 기계 부속과 다름없이 굳어지기 마련이다. 어린 날에 너무나 자연스럽게 할 수 있던 동작이나 떠올리던 생각이 어느 나이, 시기부터는 불가능해진 경험. 잠깐만 생각해도 서너 가지는 금세 떠올릴 수 있을 만큼 잃어버린 기능이 적지 않다. 반대로 어느 시기에 우연히 시작한 취미나 활동을 계기로 상상 못 했던 가능성과 연결되기도 한다. 내겐 그중 하나가 드로잉이었다.


 나에게 미술이나 그림은 교육 과정의 하나로 수우미양가로 나뉘는 과목 중 하나에 불과했다. 네모와 세모, 동그라미를 대충 합쳐서 뭔가를 끄적이거나 무수히 지우고 다시 그리기를 반복한 후 그 위에 덧칠하는 수채화나 유화를 평가의 결과물로 내놓으면 그만인 거였다. 고등학교 이후로는 시도할 이유나 계기도 없었고 그렇게 십수 년, 20년 가까운 시간이 지나갔다. 우연히 참여한 독서모임에서 드로잉 하는 회원을 만나고 다른 회원이 건넨 펜 하나와 노트 한 권이 내 근본 없는 드로잉의 시작이었다. 

 평가를 위해서도, 누군가의 칭찬이나 품평을 위해서도 아닌 그리고 싶은 걸 고르고 그릴 수 있는 걸 그리는 건 즐거웠다. 뭔가를 그렇게 오래 들여다보며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보이는 대로 선을 이어가는 게 재미는 웬만한 소설보다 신명 났다. 처음엔 스스로 답답할 만큼 서툴던 선 그리기에 익숙해지면서 조금은 봐줄 만한 게 되어가는 것도 의미가 있었다. 무엇보다 뭔가를 그리는 동안 나와 주변의 일을 잊게 되는 게 좋았다. 그림을 다 그리고 난 후에도 상황은 전혀 달라지지 않지만 뭔가 마음이 편안해졌다.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지만 때로는 몰두하고 있는 뭔가를 잊어버리는 게 내게도 도움이 됐다. 잊어버렸더니 오히려 알게 되는, 잃어버려야 찾는다는 식의 선문답 같은 체험이 거기 있었다. 


 천성이 조급하고 참을성이 적어서 복잡한 거나 처음 시도해 보는 대상을 그릴 때면 망쳐버리고 싶고 그만두고 싶고 어떻게 그려져도 마음에 안 들어서 싫은 마음이 되지만 '일단 끝까지만 그려보자'는 다독임이 그림을 그리는 시간에는 잘 통한다. 삶에서도 이렇게 잘 통하는 다독임이 하나 있으면 좋겠는데 아직 진정하게 하고 덜 슬프게 하고 무기력에서 끄집어내 주는 요령은 터득하지 못했다. 어느 날에 문득 스스로에게서든 밖에서든 상상 밖에 있던 어떤 가능성이 찾아오기를 가만히 기다릴 뿐이다. 


 가끔 욕심이 나지만 그림을 배우지 않는 건 그 배움을 향한 욕심이 어디에 있는지 아직 잘 몰라서다. 더 완벽한 그림을 그려서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건 아닐까, 그렇게 되면 잘못 그린 그림도 생기고 실패한 그림도 생기고 그러다가 보면 그만두는 그림도 생기고 마침내는 그리는 걸 그만두게 되지는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있다. 누군가는 그런 두려움은 이겨내야 하는 두려움이라며 다독일지 모르겠다. 물론 욕심이 나기도 한다. 더 잘할 수 있을 것 같고, 더 잘해야 할 것 같기도 하니까. 하지만 아직까지는 지금 이대로 충분히 즐겁고, 의미 있고 계속할 수 있으므로 조금 더 혼자 해보고 싶은 마음이랄까.


 다른 그림 그리는 사람들을 찾아볼 때가 있다. 쓱쓱 쉽게 정말 멋진 작품을 그려내는 사람도 정말 많아서 자주 놀란다. 하지만 그런 완전함이나 멋짐보다 그리는데 들어가는 시간과 쏟아낸 마음이 더 따뜻하게 느껴지는 그림이 더 좋다. 좋아하고, 기억하고 싶고, 사랑해서 남기는 그 마음이 한참은 서툴지만 내 마음을 닮았다고 느끼니까. 


  나를 찾는 길과 잃어버리는 길은 전혀 다른 곳에 있는 게 아니었다. 잊고 지낼 뿐, 나는 늘 여기 있다.


어느 여름의 애벌레_서동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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