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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묘 Mar 17. 2020

커피 마시려다 말고

아빠가 웃는 게 웃는 게 아닌 것 같기도 한데 그냥 웃어 버리지, 뭐. 

  한가로운 토요일 아침, 다른 식구의 계란밥을 챙겨준 엄마는 선약이 있어 외출했다. 엄마는 비록 없지만 아빠와 삼 남매가 샤방한 오전을 보낼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근거 없는 기대감을 품은 채, 아빠는 따뜻한 모닝커피로 아침을 산뜻하게 출발하고자 했다. 주방에 있는 커피 머신으로 한 잔 내리고 있는데 소파에 앉아 있던 첫째 랑이(59개월)가 쪼르르 와서 물었다. 

  "아빠, 뭐 마셔요?" 아빠가 대답했다.

  "따뜻한 커피 마시지."

  "그럼 나는 뭐 마셔요?"

  "랑이는 우유 줄까?"

  "아니요오, 우유 말고 요구르트 주세요."

  "알았어, 잠깐만."


  커피 마시려다 말고 요구르트를 꺼내 랑이의 분홍 플라스틱 전용컵에 따라줬다. 둘째 람이(34개월)가 공룡 장난감을 갖고 놀다가 아빠가 요구르트 따르는 것을 보고 쪼르르 달려왔다.

  "아~빠! 쿠트, 쿠트, 쭤, 쭤!"

  "람이도 요구르트 먹을 거야?"

  "네에~!"


  커피 마시려다 말고 다시 요구르트를 꺼내 람이의 파랑 플라스틱 전용컵에 따라줬다. 랑이와 람이가 요구르트를 마시느라 직사각형의 갈색 아일랜드 식탁 근처에 모여 있자 셋째 솔이(9개월)가 궁금했던지 아무 소리 없이 이쪽으로 슬금슬금 기어 왔다. 그러더니 마구 울기 시작했다.

  "우와아아앙, 카아앙!"

  "솔이 배고파? 우유 줄까?"

  "우앙, 카아앙, 우와앙, 카아앙."

  셋째는 주방 바닥에 엎드린 채로 서럽게 울 뿐이었다.


  커피 마시려다 말고 분유통에서 네 스푼 정도 퍼서 젖병에 넣었다. 보온병에 넣어놓은 물을 백육십 미리 정도 젖병에 담았다. 아무 생각 없이 확 부어버렸던 게 화근이었다. 다 붇고 나니 분유물이 너무 뜨거웠다. 이래서는 솔이가 먹을 수 없다. 그래서 식히느라 찬물에 담가 놓았더니, 그 틈을 기다리지 못하는 솔이는 계속 울어 댔다. 초조한 마음으로 솔이를 안아 든 채 순식간에 식기를 기원했다. 기다리면서 커피나 마셔야겠다 싶었다. 그때 랑이가 다가왔다.

  "아빠, TV 봐도 돼요?"

  "그래, 봐."

  "미니 특공대 틀어주세요."


  커피 마시려다 말고 TV 앞으로 가서 리모컨에 있는 유튜브 버튼을 눌렀다. 미니 특공대를 검색해 슈퍼 공룡 파워 시즌을 틀어줬다. 랑이와 람이는 소파에 앉아 TV를 보기 시작했을 때, 솔이 줄 분유가 드디어 식었다. 소파 옆에 앉아 솔이에게 젖병을 물렸다. 배고팠는지 두 손으로 젖병을 꽉 쥔 채 꿀꺽꿀꺽 잘만 빨아댔다. 젖병의 반 이상을 차지하던 분유가 사라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다 먹자마자 솔이를 다시 안아 들고 등을 두들겼다. 한창 두들기고 있는데 람이가 말했다.

  "아~아~빠, 쉬! 쉬, 쉬!"

  "화장실로 빨리! 빨리!"

  솔이를 내려놓고 람이와 함께 화장실로 갔다. 바지를 내리고 미니 소변기를 갖다 대니 오줌 줄기가 시원하게 나왔다. 곧 수도꼭지가 잠겼고 람이는 바지를 올린 뒤, 다시 TV를 보러 갔다. 화장실에서 뒷정리를 하고, 주방 의자에 앉았다. 커피는 아직 따뜻했다. 잔을 잡는 순간, 람이가 엉덩이를 두 손으로 붙잡고 뛰어왔다.

  "아~~~~빠, 똥, 똥!"

  아빠의 동작이 굼뜬 것을 보고 람이는 자기 엉덩이를 아빠에게 내밀면서 막 손가락질했다. 


  커피 마시려다 말고 람이를 데리고 화장실로 가 미니 소변기에게 앉혔다. 람이의 얼굴이 매운 고추를 먹은 만화 주인공처럼 새빨개졌다. 툭, 투둑. 첫 똥이었다. 생각보다 많이 안 쌌다. 엉덩이를 깨끗하게 씻겼다. 람이를 먼저 화장실 밖으로 보낸 후 똥을 변기에 넣고 물을 내린 다음, 소변기를 물로 헹궜다. 정리하고 뒤돌아 나왔는데 1분 뒤에 다시 람이가 똥똥한다. 동일한 장면이 펼쳐졌다. 두 번째 똥이었다. 아까보다 조금 많았다. 똑같이 정리하고 뒤돌아 나왔는데 2분 뒤에 다시 람이가 똥 또 오옹 하며 울부짖는다. 동일한 장면이 펼쳐졌지만 똥의 양은 장난 아니게 많았다. 세 번째 똥이었다.(아니, 왜 한 번에 못 싸냐고.) 깨끗이 씻기고 나왔다. 거실에서는 랑이가 다른 세상에 있는 것처럼 집중해서 TV를 보고, 솔이는 자지러지게 울고 있었다. 분유 먹고 배가 부르면 보통 졸려하는데 낌새가 그랬다. 솔이를 작은 방에 데리고 가서 함께 이불 덮고 누웠다. 눕자마자 솔이는 새근새근 잠들었다. 

  거실로 다시 나오니 랑이가 말했다.

  "아빠, 사탕 주세요."

  무시했다. 식탁에 다시 앉았다. 커피를 마시려고 잔을 드는데 랑이가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기 시작했다. 

  "아! 빠! 사탕! 달라고요!"

  한숨.


  커피 마시려다 말고 찬장에 있는 사탕 박스를 꺼내 랑이와 람이에게 내밀었다. 둘은 신나게 골라 사탕을 입에 넣었다. 시계를 보니 어느덧 점심 먹을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타놓은 커피를 마시려고 잔을 잡았다. 아까의 따뜻함은 온데간데없이, 커피는 이미 식어 있었다. 뭐지, 뭐한 거지 싶어 망연자실하게 앉아있는데 랑이가 오물오물 사탕을 먹다가 아빠를 보고 환하게 말했다.


  "아빠! 점심에 짜장면 끓여주세요!”


  정말 해맑아서, 그저 웃음만 나왔다. 랑아, 너는 왜 따라 웃니? 아빠 속도 모르면서.


관우처럼 보온병에 담아 놓았어야 했는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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