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침내 모든 가족이 잠든 지금은, 어둠이 집안 곳곳에 내려앉은 밤 11시 20분. 무언가를 해치우기에는 아주 좋은 밤이다. 고요한 집 안을 온통 채우는 것은 키보드와 마우스가 함께 하는 즐거운 난타 소리. 모처럼 책상 앞에 앉아 그동안 미뤄뒀던 글을 완성하겠다는 일념으로 글을 쓴다. 보채는 아이들이 이렇게 일찍 꿈나라에 가있는 것도 실로 오랜만이기에 집중력이 마구마구 샘솟는다. 이대로라면 네 번째 단편 소설을 오늘 밤에는 마무리할 수 있으리라. 한 편의 글에 마침표를 찍는 환희의 순간을 기대하며, 두 손은 마치 왈츠를 추는 무희처럼 사뿐사뿐 움직인다.
툭 툭 툭
현관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린다. 춤을 추던 무희는 순간 멈칫한다. 이 야심한 시각에, 미리 허락받지 못한 저 소리는 무엇일까. 지나가던 사람이 잘못 두드린 걸까. 어쩌면 술을 진탕 먹은 사람이 집을 착각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럼 적극적으로 반응해야 할까? 문 건너편에서 신경을 긁는 소리의 주인을 마주해야만 할까? 잠깐 고민하다가 이내 결론은 금방이다. 아무 반응하지 않으면 자는 줄 알고 가겠지. 괜히 문 열어줬다가 무슨 일을 당할지 모르니 숨 죽여 보자. 상황을 급히 종결하고픈 성급함과 희미한 두려움이 교차하는 머릿속에서, 여러 생각이 소곤소곤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몸은 그대로 멈춰 있다. 조용히, 가만가만, 석상처럼.
툭 툭 툭 툭
아까보다 조금 더 큰 소리가 현관문을 두들긴다. 온통 고요한 세상 속에서 문을 두드리는 소리는 유독 평소보다 더 크게 존재감을 드러낸다. 그러니 더욱 거슬릴 수밖에 없다. 어째서 안 가는 거지? 이 밤에 우리 집을 찾아올 사람은 전혀 없는데. 약간의 공황 상태에 빠지려고 한다. 아무리 생각해도 가능한 이유조차 추측할 수 없는 일이 지금 벌어지고 있다. 내가 사는 곳은 80년대에 지어진 3층 연립 아파트, 아주 옛날 아파트여서 단지 내에 비밀 번호를 누른다거나 문이 이중으로 되어 있는 등 보안 시설은 당연히 없다. 건물로 진입하는 현관문은 항시 열려 있는 상태이기에 언제든 원하는 사람은 자유롭게 들어와 각 세대의 개별 현관문까지 쉽게 접근할 수 있다. 그러니 낮에는 신천지나 다른 이단 종교의 전도자들이 자신들의 복음을 전하겠다며 현관문을 두들기는 일도 왕왕 발생한다. 보안이 정말 문제라고 생각해왔지만 오늘 밤 이런 일을 맞닥뜨릴 줄이야, 외면하고 싶었던 상황이 실제로 발생하니 지금은 난감할 따름이다. 그럼에도 한 번 더 참아보기로 한다. 문을 열어줌으로써 가늠할 수 없는 상황에 스스로를 휘말리게 둘 수는 없는 노릇. 그래, 한 번만 더 숨죽여 보면 곧 아까와 같은 기분 좋은 고요함이 다시 찾아오리라.
툭 툭 툭 툭 툭
아까보다 더욱 거칠고 신경질적으로 누군가 문을 또 두드린다. 이 보세요, 정작 신경질 나는 사람은 나라고요. 아니, 이 오밤중에, 모두가 다 잠들어 있는 평범한 가정집에, 오래간만에 한가롭게 글 좀 써보려고 하는데, 도대체 왜, 당신은 누구신데 우리 집 문을 두들기고 있는 거예요, 좀 가시라고요 하며 쏟아내고 싶은 말을 꾹 눌러 참는다. 한편 미묘했던 두려움이 마음속에서 자기 지분을 더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음 또한 느낀다. 험악한 뉴스를 많이 접한 탓에 얼굴 보고 짜증을 분출하고 싶은 마음도, 혹시나 문 열자마자 칼로 날 쑤시고 도망가면 어쩌나 하는 생각에 움츠려 든다. 낮도 아닌 밤이니, 두려움의 근거는 더할 나위 없이 명백하다. 나만 잘못되는 것이 아니라 아무것도 모른 채 조용히 자고 있는 우리 아내는, 나의 세 아이들마저 그런 일을 당하게 되면 어쩌나. 여기까지 생각이 뻗어가니 불현듯 몸 전체를 휘감는 오한에 몸서리친다. 그러니, 내 짜증과 분노의 감정을 표출하는 것보다 이 상황을 아무 일 없이 넘어가도록 외면하는 것이 먼저다. 한 번 더 몸을 사려야 한다.
띵동 띠잉동 띵동
오싹하지만 확실하다. 이대로 가만히 있어도 이 사태가 해결되지 않을 것이다. 스치는 깨달음이 결국 나를 일으켜 세운다. 만약의 일을 대비하기 위해 몸에 잔뜩 힘을 준다. 문을 열기 전 최대한 상대방의 정체와 의도를 파악해야 하리라. 하나도 떨지 않는 목소리로 문 건너편에 있을 누군가에게 조심스럽게 말한다.
- 누구세요?
- 교촌 치킨이요~.
응? 교촌 치킨? 살짝 당황스럽다. 내가 이 시간에 나도 모르게 치킨을 시켰나? 기억을 더듬어봤지만 나에게 제 이의 자아가 있지 않는 이상 그럴 리는 없다.
- 치킨 시킨 적 없는데요.
그러자 상대방이 답답하다는 듯 말한다.
- 매화 O동 OOO호 아니에요?
- 아뇨. 여기는 이화 O동 OOO호예요.
- 아, 죄송해요~.
그렇게 문 건너편에 있던 불청객은 낭패한 발걸음으로 떠나가고, 그가 떠나간 바깥의 복도는 다시 조용해진다. 우리 집도 덩달아 고요한 여유를 되찾는다. 우려했던 일과는 달리 단순 해프닝으로 그쳐 다행이다. 아마도 그는 우리 아파트 위쪽에 있는 매화 아파트로 종종걸음 하고 있으리라. 배달이 늦어진 것에 한숨을 푹 쉬거나 성질을 내며 간절히 기다리고 있는 진짜 주인에게 달려가고 있으리라. 배달부 아저씨, 잠깐이었지만 이렇게 급작스럽게 만나지는 말아요. 다음번에는 꼭 정확하게 주소를 확인하여 우리 서로를 기쁘게 맞이할 수 있도록 해요. 치킨은 사랑이니까요. 나도 치킨 좋아해요.
그래요. 나도 치킨 많이 좋아해요.
그나저나 큰일이다. 불편하면서도 두려운 상황은 끝이 났는데, 이를 어쩌나. 다른 마음이 이 순간 꿈틀대며 요동치기 시작하니 과연 내가 자기 전까지 이 욕망을 참아낼 수 있을까. 이 시점에서 글쓰기는 이미 텄으니, 그저 굶주린 배를 달래는데 온 신경을 곤두세울 뿐이다. 치킨 먹고 싶다. 치킨을 먹고 싶은 열망이 뒤늦게 폭발해 버린 심야이다. 네 번째 단편 소설을 해치우는 대신 치킨 한 마리를 해치우기에 정말 좋은 밤인데 말이다. 하나의 상황이 끝남과 동시에 본능을 참고 잠에 들어야만 하는 인고의 과정이 새롭게 시작되었으니, 그런가 보다. 어떤 것의 끝은 결국 다른 것의 시작이라는 진리를, 새삼 몸으로 깨달은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