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신묘 Feb 05. 2021

아저씨 아니거든요

말로라도 건드리지 말았어야 했다, 그 녀석을.

“크허헝, 크엉, 히끅, 히끅, 끄앙, 크으앙, 악! 악! 크아악, 캬아아앙!” 


둘째의 울음은 수문을 열어젖힌 댐에서 방류되는 거센 물살이었다. 둘째의 눈가에서 굵은 눈물이 흘러나왔고, 손과 발은 부들부들 떨렸다. 둘째의 주변에는 자기가 입어야 할 옷이 마구 내동댕이쳐진 채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었다. 한때 인터넷에서 패러디로 유행했었던 문장처럼 아빠는 작동이 정지되었다. 망연자실한 채 아빠는 진땀을 흘렸다. 

- 이, 이걸 어떻게 수습해야 하지?  

   



학교는 방학인지라 아이들 등원은 다시 아빠의 몫이다. 첫째는 좀 컸다고 알아서 잘한다. 둘째와 셋째만 잘 챙기면 등원 준비 끝! 아빠는 지난 방학 때에 비해 훨씬 수월해짐을 느끼며 오늘도 하던 대로 했을 터인데……. 역시 방심은 화를 부르는 법, 아빠의 입술이 방정맞았다.     


둘째의 자립성을 키우기 위해 입을 옷을 스스로 고르게 한 뒤 아빠는 그저 지켜본다. 아니, 눈만 그렇고 양손은 무릎 위에서 뒹굴뒹굴하는 셋째를 붙잡고 준비시킨다. 한데 오늘따라 둘째가 자꾸 장난을 치면서 옷을 이상하게 입는다.(거꾸로 입는다든지, 팔을 넣는 곳에 머리를 넣는다든지, 뭐, 굉장히 창의적인 방식으로 말이다)      


가만히 바라보고 있던 아빠가 결국 농담조로 한 마디 던진다.     


“아자씨~, 그렇게 입는 거 아니거든요?”     


아빠는 알 턱이 없다. 닥쳐올 폭풍 같은 상황을. 그 말을 들은 둘째의 반응이 예사롭지 않다. 눈매가 쳐지고 입술이 삐죽해진다. 점차 울먹울먹 하다가 이내 대성통곡한다. 소리도 막 지르면서 발버둥 친다. 아뿔싸. 내가 무심결에 판도라의 상자를 열었구나.   


“나아, 아저씨~, 아닌데요, 아저어씨~ 아니거든요~. 크아아앙~. 악! 악!”     


‘아저씨’라는 단어가 누군가에게 슬픔과 분노를 유발할 수 있다는 것을 아빠는 오늘에서야 알게 되었다. (앞에 있는 찐아저씨 무안하게)     


어린이집 차가 올 시간은 다가오는데, 이 사태는 진정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격언을 떠올리며 아빠는 이 상황을 수습하기 위해 무슨 일이라도 해야만 했다. 셋째의 등원 준비를 신속하게 마무리한 뒤, 둘째를 품에 안는다. 안는 와중에도 둘째는 몸을 비틀며 몸부림친다. 무슨 지혜로운 방법이 있냐고? 그런 것 없다. 아빠는 둘째를 꼭 안은 채 싹싹 빌뿐이다.     


“아이고, 우리 둘째가 속상했어. 속상했어. 아빠가, 어, 아저씨라고 말해서 속상했어. 미안해, 람아, 미안해, 아빠가 잘못했어. 우리 람이 같은 왕자님이 어디 있다고, 그래, 그래, 우리 람이 아저씨 당연히 아니지. 우리 람이는 왕자님이지. 왕자님. 아빠가 미안해, 정말, 아빠가 다시는 안 놀릴게요. 미안해. 미안합니다.” 


바로 사과하면서 어르고 달랬더니 조금씩 진정되는 기색이 보인다. 그래도 분함이 덜 풀렸는지 거친 호흡이나 신음과 울음소리가 완전히 가라앉지는 않았다. 결정타를 넣어야겠다.   


“람이, 파인애플 먹고 싶다고 했지? 아빠가 오늘 마트 가서 파인애플 사 갖고 올게. 아저씨라 불러서 미안하고, 파인애플 사서 이따 집에 오면 맛있게 먹자. 응, 응?”     


파인애플 먹고 싶다고 며칠 전부터 둘째가 노래를 했는데 오늘 사준다고 확답을 받아서인가, 드디어 둘째가 울음을 그친다. 소매로 눈물을 닦고 자기 옷을 주워 입는다. 하도 울어대 불그무레한 눈자위를 한 둘째가 아빠한테 양말을 신겨달라고 내민다. 나름 화해의 제스처 이리라. 아빠는 정성스럽게 양말을 신겨준다.      




셋 다 어린이집에 보낸 후 아빠는 노곤한 몸을 소파 위에 던진다. 엄마가 아빠에게 씩 미소를 던지며 수고했다고 치하한다. 아빠는 순전히 궁금해서 엄마에게 묻는다.     


“도대체 람이가 왜 그런 거야? 람이가 아저씨라는 단어에 왜 저렇게 민감하지?”     


엄마는 갸우뚱하다가 짚이는 것을 이야기한다.  


“생각해 보니까, 람이가 누나나 동생 놀릴 때 아저씨, 똥아저씨라고 불렀던 것 같은데? 그래서 랑이(첫째)가 막 화내기도 했어. 놀릴 때 쓰는 말을 정작 자기가 들으니까 기분이 나빴나?”  


그럴 수도 있겠다 싶다. 정확한 이유는 본인만 알겠지만, 그래, 아들을 아침부터 울려버린 아저씨가 다 잘못했다. 아침부터 너무 평화롭다, 하며 아빠는 이내 잠이 들어 버렸다. 

매거진의 이전글 해파리와 모차르트의 공통점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