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사논문에 갑자기 아브라함이?
[part 1. 석사논문주제 정하는 것이 이렇게 어려웠다니]
코로나로 인해 영국석사를 1년 미루고, 2021년 10월 4일 영국이 우리나라를 자가격리10일 해당국가에서 제외시킨 첫 날, 나는 영국에 도착했다. 당시 내가 타고 온 비행기는 자가격리를 해제함과 동시에 영국에 들어가기를 벼르고 있던 유학생들로 꽉 찼었고 그렇게 나는 아무 생각없이 호텔비를 아낀 것에 감사하며 영국 석사생활을 시작했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 당시에 나에게 논문이라는 것은 먼 훗날의 일이었고 머릿속에는 언제 영국에 박물관, 미술관, 갤러리들을 다 가볼까 하는 생각 뿐이었던 것 같다. 영국 석사 1년은 대체적으로 10월-12월 1학기, 12월 방학 및 1학기 에세이 제출, 1월-3월 2학기, 4월 방학 및 2학기 에세이 제출, 그리고 논문작성은5월-8월 이렇게 이루어진다. 과마다 논문에 부과하는 중요도가 다르기는 하나 우리 과는 전체 성적의 50%가 논문으로 평가되는 만큼 그 중요도가 컸다. 이를 알고는 있었으나 당장 도착해서는 수업을 따라가느라, 방학때는 에세이를 쓰느라, 논문에 대해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수업을 열심히 듣다 보면 무엇을 논문으로 쓰고 싶을 지 자연히 알게 되겠지 막연히 생각했다.
[처음 입학하여 이 정문샷을 찍을 때만 해도 걱정이 없었더랬지…]
1학기가 끝날 때 즈음이 되자 주변의 영국인 친구들은 이미 논문을 쓰고 있다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알고 보니 대부분의 영국친구들은 학부 때 이미 논문을 써본 친구들이 대부분이었으며, 나처럼 석사를 하면서 관심있는 분야 찾아야지 하는 무사태평한 석사생이 아닌 논문을 쓸 준비가 충분히 되어있는 친구들이 많았다. 많은 친구들이 자신이 무엇에 관심이 있는지, 어느 학교에 어느 교수님이 이미 자신의 관심분야를 연구하고 있는지를 석사시작 전에 이미 알고 시작했다. 이러한 주변친구들의 진행상황을 알고 나니 나와는 너무 대비되는 준비성에 초조함이 몰려왔지만 ‘아 뭐 2학기 있잖아. 2학기부터 시작해도 나는 8개월을 논문작성에 쓰는 거야’하며 2학기부터는 나도 저 친구들처럼 준비가 되어 있을 거라는 자기 암시를 걸어보았다. 하지만 2학기에도 아무 일은 일어나지 않았고 태평 성대하던 마음은 점점 초조함으로 바뀌어 갔다. 2학기 중반부터 점점 과에서 학생들이 논문을 쓸 준비가 되어있나 체크하기를 하기 시작했는데 이 때 논문 주제와, abstract, 지도교수 이 세가지를 적어서 내야했다. 나는 그제서야 논문을 쓰기위한 현실적인 고민들을 치열하게 하기 시작한 것 같다. 현실적인 고민이라 함은, 내가 공부하는 사회과학분야에서도 소위 말하는 trendy한 논문 주제들이 있다. 취업하기에 유리하고 발표된 저널도 많고 프로젝트 할 기회도 많은 주제들이다. 예를 들어, 기후변화나, 기본소득, 기본서비스, ESG 금융같은 것들이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겠다. 물론 trendy한 논문주제가 쓰기 쉽다는 것은 아니지만 이러한 주제들을 선택했을 시에 많은 현실적인 이점들이 있다.
이때가 되니 내가 왜 지금까지 논문주제를 잡지 못했는지 구체적으로 알게 되었던 것 같다. 나는 사실 현재 내가 몸담고 있는 사회과학 분야에서 보편적으로 인기 있는 주제가 아닌 다른 주제에 관심이 있었고, 마이너한 주제를 내가 선택하고 끌고 나가야 한다는 것에 대한 무언의 두려움이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이 고민은 쉽게 끝난 것이, 나는 내가 관심이 없는 주제로 12500자는 커녕 5000자도 못쓸 것을 알고 있었기에 반강제로 내가 관심이 있는 주제를 선택하기로 했다. 그럼 과연 내가 관심있는 주제가 무엇이었냐? 여기까지 오려고 글을 너무 끌었던 것 같다. 하지만 잠깐! 내가 관심있는 주제를 설명하기 전에 잠시 우리 과에 대한 설명이 간략하게 필요하겠다. 나는 University College London (UCL)의 유명 건축학부인 Bartlett Faculty 하의 Institute for Global Prosperity에 소속되어 국제 번영이라는 상당히 거시적인 학문을 석사로 전공했다. 한국에서도 영국에서도 우리 과는 상당히 낯선 전공이었다. 100명이나 되는 과에서 한국인은 나 한 명 뿐이었으며 영국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나에게 무엇을 전공 하냐고 물어봤을 때, Global Prosperity라고 답을 하면 이것은 국제 정책도 아니고 국제 경제도 아니고 국제 번영은 무엇이란 말이냐 하는 표정을 읽을 수 있었다. 그럴 때마다 항상 학교 홈페이지에 나와있는 연구소의 목적을 외워서 읽어주곤 했다. “우리 과는 지속가능하고 포괄적인 사회경제 패러다임을 연구하는 학과야. 기존의 부의 축적으로만 정의되었던 번영의 패러다임을 재고해 보는거지.”이렇게 이야기해주면 많은 사람들이 “와 너 지금 이때에 꼭 필요한걸 공부하는구나. 너가 정말 그 대안적인 패러다임을 꼭 연구해서 사회를 바꿨으면 좋겠다.”라며 나의 야심을 불러일으킬 만한 칭찬을 해주곤 했었다.
국제 번영이라는 거시적인 학문을 공부하는 것이 학부 때 경제학을 공부하면서는 알 수 없었던 시대의 큰 흐름들 그리고 그 안의 미시적인 다양한 흐름들을 동시에 볼 수 있어 매우 흥미로웠지만 구체적인 하나의 주제를 선정해야 하는 졸업논문에 있어서는 골치 아프게 다가왔다. 번영의 새로운 패러다임이라는 거시적인 주제가 얼마나 다양한 연구주제와 연관 지어질 수 있는지는 과거 졸업생들의 논문 주제가 가상화폐를 사용한 지역금융 활성화부터 채식주의에 대한 정신분석학적인 실증연구까지 매우 다양했음을 봐도 쉽게 알 수 있었다. 번영과 무한한 주제들이 접점을 가지고 있지만 결과적으로 그 중 나의 관심을 끌었던 것은 욕망과 번영에 관한 주제였다. 학과 수업중에 ‘욕망’이라는 주제가 따로 하나의 주제로 다루어진 적은 없다. 그러나 환경의 영역에서도, 금융의 영역에서도, 자본주의 비판에 있어서도 항상 욕망이라는 주제는 등장했는데 그때마다 항상 이 자본주의의 폐해에 가장 큰 비난을 받아야 마땅한 것, 더 나은 제도나 법에 의해서 통제되어야 하는 것으로 다루어졌었다. 인간의 욕망은 끝이 없으며 자본주의의 제도는 인간의 욕망을 끊임없이 부추겨 환경문제, 빈부격차, 공동체의 붕괴, 소비주의를 낳는다는 담화 하에서 욕망은 억제되고 통제되어야 하는 심리적 결핍으로 쉽게 환원되었다. 이렇듯 증명이 필요 없는 자명한 명제와 같이 여겨지는 사회과학의 욕망에 대한 비판적 담화는 나의 눈길을 끌었다. 과연 그러한가? 인간의 욕망은 보이는 많은 역사적 발전을 이루어 낸 토대가 아니던가? 욕망한다는 것은 인간이 살아있음을 증명하는 보이지 않는 힘 아니던가? 그렇다면 과연 욕망이 지나치다고 여겨지는 그 선은 어디서 그어져야 하는가? 이미 우리는 끊임없이 욕망을 부축이는 사회속에서 살고 있는데 어떠한 제도를 통해 욕망을 억제한단 말인가?
[part 2. 석사논문주제에 갑자기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사실 나의 욕망에 대한 관심을 이야기하려면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등장해야 한다. 너무 뜬금없어 읽는 이로 하여금 이게 지금 영국석사를 하며 보고 배운 것에 대한 글을 읽는 것이 맞나 하는 의구심이 들게 하겠지만 그러하다. 교회를 다니지 않더라도 한번쯤 들어봤을 성경인물인 아브라함은 기독교에서 믿음의 조상이라는 계보에 올라가 있는 인물이다. 갈대아 우르라는 우상숭배가 성행했던 지역에서 태어난 아브라함에게는 자신이 계속 갈망해왔지만 현실에서 실현되지 않는 영역이 있었다. 바로 대를 이을 아들을 낳는 것이었다. 믿음의 조상 치고는 어찌 보면 초라한 갈망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고대 중동의 문화에서 아들을 낳는 것은 단순히 대를 잇는다는 의미 외에도 집안의 자산, 축복, 절대적 가치를 상징했다고 하니75세에도 아브라함이 아들을 보고자 하는 갈망이 사그라지지 않은 것을 이해할 만하다. 이런 아브라함을 하나님께서 75세에 부르신다. [1.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2.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 지라 (창세기 12장 1절, 2절)] 이 부분은 나를 의아하게 했다. 믿음의 조상이 되려면 단순히 자기 자신의 대를 잇기 위한 아브라함의 욕망이 좀 더 선한 욕망으로 발전시켜져야 되는 것 아닌가? 자기자신에서 벗어나 이타적인 욕망으로 되어야 하는게 아닌가?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아브라함에게 ‘아브라함아 너는 왜 너 욕망만 생각하니. 너 사실 아직까지 아들을 보고자 하는 마음 아직까지 포기 못 한거 사실 너 위한 욕심 때문이잖아. 너는 믿음의 조상이 될 사람이야. 75세까지 포기하지 못한 너의 욕심은 뒤로하고 떠나.’라고 해야하는 것 아닌가? 아니면 적어도 ‘지금 굶주리고 힘들어하는 많은 사람들이 있어. 그 사람들 도우면서 살아’ 라고 해야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선택한 하나님의 체면이 사는 것 아닌가? 하지만 하나님은 오히려 반대로 아브라함의 갈망을 알고 들어 주신다.
고흐는 만 27살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를 평생 이끌었을 그림에 대한 갈망이 27살부터 본격적으로 나타났다니 신기하다.
창세기 13장 14. 롯이 아브람을 떠난 후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동서남북을 바라보라 15.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 16. 내가 네 자손으로 땅의 티끌 같게 하리니 사람이 땅의 티끌을 능히 셀 수 있을찐대 네 자손도 세리라 (창세기 13장 14절, 15절, 16절). 실제로 이것은 아브라함에게 ‘너 자식 100명 낳게 될 거야.’ 하는 말씀이 아니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자식은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이삭 한명이였다. 아브라함이 당시에 어떻게 이를 받아들였는지는 몰라도 나였다면 마음속으로 자식이 100명쯤 생기는 상상을 하며 와 대박이다 하지 않았을까 싶다. 이는 아브라함을 ‘난 자식이 없으면 안돼. 지금 이 사회에서 자식이 없다는 건 아무리 다른 걸 다 가져도 실패한 삶이나 마찬가지야’ 라고 규정지었던, 떠나고 싶지만 떠날 수 없었던 옛 정체성에서 떠나게 하는 가장 큰 동기가 된다. 아브라함이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라는 부르심에 마음이 움직였던 것은 이제까지 현실화되지 않았던 갈망이 이루어질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감, 지금까지 반복됐던 무기력한 시간이 아니라 어쩌면 새로운 시간과 공간속에서 자신의 갈망이 펼쳐질지 모른다는 끌림이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지금까지 자식을 낳기 위해 써왔던 방식이 아닌 차원이 다른 시간과 공간이 침투해서 자신을 끌고가는 여호와의 부르심이 이미 75세에 모든 수단과 방법을 써보고 지칠 대로 지친 아브라함에게 허망하게 들린 것이 아니라 알 수 없는 끌림으로 다가온 것은 이 때문이었다. 이런 차원이 다른 시간과 공간이 침투하여 이끄는 삶은 아브라함 뿐만 아니라 나의 논문 여정에서도 일어났다. 지금까지 적은 것만 봐도 짐작 가능하겠지만 이런 나의 관심사를 나눌 교수님은 2학기가 되도록 찾을 수 없었다. 나의 관심사는 이 시대의 시간과 공간에 갇힌 욕망이 아닌 그것에서 벗어나 새로운 시간과 공간의 차원에서 능동적으로 내가 추구하지만 동시에 수동적으로 나를 이끄는 타자성이 개입된 욕망의 차원에 있었다.
나의 관심사를 나눌 사람을 여기저기 물색하며 제일 처음 상대적으로 의견을 물어보기 쉬운 나의 튜터에게 내 관심사를 털어놓았던 것 같다. 하지만 튜터는 오히려 내가 좋은 점수를 받지 못할까 걱정하는 눈치였고 나에게 “근데 우리과는 실증적인 연구를 좋아해서 너가 지금 관심있는 걸 논문주제로 한다면 점수는 잘 받지 못할텐데? 차라리 다른 애들처럼 케이스 스터디를 하면 어떻겠니?”라고 조언해주었다. 튜터가 우려하는 바를 나 또한 분명히 잘 알고 있었다. 나 또한 내 관심사를 석사논문으로 발전시키기에는 뜬구름 잡는 소리라고 생각했고 이를 내가 주제로 삼는다고 해도 이 주제로 내 논문을 지도해줄 교수님이 없었기에 논문은 다른 주제로 쓰고 이것은 그냥 나의 개인적인 시간에 혼자 끄적여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겠다고 체념하고 있었다. 하지만 계속 나의 눈길을 끄는 논문들은 어쩔 수 없이 내 관심사에 관련된 주제였고 우연치 않게 Camillo Boano라는 분이 이탈리아 철학자 아감벤의 이론을 건축과 접목시켜 쓴 매우 흥미로운 책인 ‘The Ethics of a Potential Urbanism: Critical Encounters Between Giorgio Agamben and Architecture’를 발견하게 되었다. 여기서 굉장히 뜻밖의 수확을 거두게 된다. 이 분의 다른 저서를 더 읽어 보기 위해 구글에 Camillo Boano라는 이름을 검색해보니 바로 이 분이 내가 석사공부를 하고 있는 UCL Barttlet Faculty의 분과인 Development Planning의 교수로 계신 분이었던 것이다. 아직도 기억나는 것이 이때가 당장 다음주 월요일 지도교수를 제출하는 마감일을 앞둔 직전인 금요일이었는데 나는 사실 이미그냥 UCL에서 랜덤으로 정해주는 지도교수님을 배정받기로 포기한 상태였다. 다른 친구들은 이미 마감일 2-3주 전부터 10명 20명씩 조금이라도 자신의 연구주제와 접점이 있는 교수님에게 이메일을 뿌리고 답을 기다리는 상태였는데 아직 연구주제를 구체적으로 발전시키지 못한 나는 어떠한 교수님에게도 이메일을 보내지 못하고 있었기에 랜덤으로라도 배정받을 수 있는 것을 다행으로 여겼다. 하지만 이렇게 뜻하지 못한곳에서 나의 잠재적 지도교수님을 발견했고 이 기회를 놓치면 안되겠다 생각한 나는 매우 흥분한 상태로 내가 지금까지 얼마나 당신과 같은 지도교수를 만나기를 바라왔는지 한바탕 교수님에게 이메일을 보내고 초조하게 답변을 기다렸다. 지도교수를 제출해야 되는 마지막날인 월요일에 마치 영화의 한 장면같이 Camillo Boano교수님으로 부터 나의 논문을 지도하길 원하신다는 답변을 받고 나의 지도교수님은 이렇게 확정이 되었다.
[part 3.영국석사에서 논문 지도교수님을 잘 만나는 것이 이렇게 중요하다니!]
하지만 교수님에게 논문주제와 초안을 제출한 것이 통과되기까지의 여정은 순탄치만은 않았다. 처음 논문 미팅을 했을 때, 교수님께서도 나의 두루뭉술함을 지적하시며 이것은 논문이기에 구체적이고 논리적으로 논개를 전개할 수 있는 명확한 연구 질문이 있어야한다고 말했다. 나는 지레 겁을 먹고 혹시 교수님에게 혹시 내가 제시한 관심사가 아카데믹하지 않다고 판단이 되시면 논문 몇개를 추천해 주셔서 그것을 바탕으로 논문 주제를 고르겠다고 제안했지만 교수님은 단호하게 “No. This is your dissertation. It should be a question you have about the world.”라고 말씀하시며 내 스스로 논문주제를 들고 올 것을 강조하셨다. 이것이 내가 영국에서의 석사공부를 하게 된 것을 가장 감사하게 느꼈던 순간 중 하나였다. 물론 영국에서도 개개인 교수님 마다 차이가 있으셔서 어떤 교수님은 그냥 논문 몇개를 주시고 그 안에서 학생 나름대로의 생각을 발전시키게 하는 교수님도 있으시다. 석사 논문 같은 경우는 교수님들도 학생들에게 기대하는 바가 크지 않고 그냥 논리적으로 research question을 써 내려가기만 한다면 괜찮다고 판단하기에 학생의 관심사를 논문주제로 꼭 쓸 것을 강조하지는 않으신다. 하지만 나의 지도교수님 같은 경우에는 아직 내 관심사가 논문주제로 발전시킬 만큼 구체적이고 아카데믹하지 못하다고 판단하셨더라도 나의 관심사를 아카데믹하게 발전시킬 것을 강조하셨으며 나의 관심사가 아닌 다른 것을 단순히 논문을 잘 쓰는 목적으로 선택하기를 원치 않으셨다. 만약 이러한 교수님의 적극적인 독려가 없었더라면 나는 여러 압박에 못 이겨 논문을 잘 쓸 수 있는 주제를 결국 택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교수님은 오히려 나의 관심사에 맞추어 자신의 관심사를 나누어 주셨고 예를 들어, 교수님이 최근 저널을 쓰시면서 본인이 흥미롭다고 생각한 ‘Messianism’이라는 개념에 대해 나누어 주셨다. ‘Messianism’은 단순히 얘기하면 우리가 먼 미래에 올 메시아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순간 시간과 공간의 차원을 뚫고 새로운 시간과 공간의 차원이 이미 여기 도래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씀하시며 나에게 “너가 배우는 국제 번영학에서 번영은 아직 오지 않은 것, 우리가 더 나은 제도와 기술과 시스템을 통해 이루어 나가야할 것이라는 전제를 통해서 세상을 바라보는데 이 ‘Messianism’이라는 개념은 그와 반대로 이미 새로운 시간과 공간의 차원이 여기 도래했다고 말함 단다. 그럼 이 Messianism을 통해서 본 번영이라는 개념은 어떻게 해석될 수 있을까?”라고 물어보셨다. 이 질문이 매우 섬세하고 정곡을 찌르는 질문이었던 것은 나의 흥미를 자극했을 뿐만 아니라 내 안에 감춰져 있던 잠재성을 건드리는 질문이었기 때문이다. 이 질문 덕분에 내가 지금까지는 훑어만 보았던 현대철학을 좀 더 심도 있게 알아보는 계기가 되었으며 나의 논문의 뼈대가 되는 들뢰즈와 가타리라는 철학자를 만나는 계기도 되었다.
열심히 도서관에서 고군분투하던 날 하늘
[part 4.구글 직원들의 불만]
질 들뢰즈와 펠릭스 가타리의 철학은 워낙 방대하고도 그 깊이가 깊어 철학을 전공하지 않은 내가 그 깊이를 다 헤아리면서 알기에 난해했던 것이 사실이다. 이 글에서도 내가 논문에 담은 들뢰즈 가타리의 철학을 상세히 설명하기에는 너무 길어질 것 같아 최대한 쉽고 간단하게 요약하고자 한다. 나의 논문 주제는 ‘Rethinking Prosperity with Deleuze and Guattari through cultural analysis of Google’로 쉽게 설명해 구글의 직원들의 번영을 중요시하는 문화를 비판적으로 살펴봄으로써 ‘과연 우리가 번영에 필수적이라고 하는 좋은 복지, 기술, 자유, 미래에 대한 보장, 자아실현을 적극적으로 실현하고 있는 구글의 문화는 인간의 번영을 가져다 주는가?’라는 질문을 탐구해보는 것이다. 모든 분석에는 무엇을 근거로 분석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방법론이 필수적이다. 내 논문의methodology는 욕망을 심리학적 결핍이 아닌 무의식적 에너지의 능동적 흐름으로 본 들뢰즈 가타리의 유물론적 욕망이론을 통해 구글의 문화를 비판적으로 살펴보는 것이었다. 그럼 간략히 나의 논문을 소개하겠다. 먼저 구글에서 구체적인 사건이 발생한다. 안 그래도 구글 직원들 사이에서 연봉에 대한 불만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던 차에 2021년 실시된 Googlegeist 라는 구글이 직원들을 대상으로 시행하는 연례설문조사에서 급여, 상여금, 개인의 역량 발전가능성의 영역에서 구글은 낮은 평가를 받은 것이 드러났다. 구글직원들의 46%만이 '자신의 연봉이 다른 기업의 유사 직무에 비해 경쟁력이 있다'고 답했는데 이는 작년에 비해 12%줄어든 수치였다. 더 나아가 구글이 자부하는 다양한 자기개발 프로그램에도 불구하고 61%의 직원들 만이 구글이 자신들이 요구하는 커리어 개발수준을 충족시킨다고 답했다. 이러한 직원들의 불만족에 대안을 마련하기 위해CEO인 선다피차이를 포함하여 고위임원진과 직원들이 진행한 회의에서 직원들에게 가장 많은 호응을 받았던 질문은 바로 다음 두 질문과 같았다. “아마존과 애플이 연봉을 올리는 동안 구글은 무엇을 하고 있는가? 어떻게 구글은 아마존과 애플사이에서 연봉으로 경쟁력을 갖출 것인가?”“구글은 상위 1%인재를 채용하면서 왜 연봉은 업계 상위 1%가 아니라 5~10%에 그치는가?”. 타인과 타 기업과의 정확한 비교를 바탕으로 구글이 왜 구글직원들의 능력에 비해 응당한 대우를 해주지 못하는지에 대해 날이 선 질문들이 오갔다. 이러한 사건은 분명히 우리가 막연히 생각했던 번영의 근간을 흔든다. 좋은 복지와 자아실현, 보장된 미래, 행복감을 중시하는 구글의 문화는 당연히 충만한 번영을 불러와야 하는 것이 아닌가? 왜 구글의 상위 1%직원들은 나머지 99%가 부러워하는 신의직장에 다니면서도 이미 주어진 번영을 누리는 것이 아니라 마치 번영은 유보된 듯, 아직 오지 않은 듯 사는 것일까? 애플과 아마존보다 더 많은 연봉과 개인에게 더욱 더 최적화된 자기개발 프로그램을 제공하면 그때에 번영은 오는 것인가? 이것이 단순히 구글직원의 예가 아니라 어쩌면 우리 시대를 비춰주는 거울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앞에서 말한 아브라함과 구글직원들과의 차이는 무엇일까? 단순히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믿었다는 것? 종교심이 더 투철했다는 것? 구글에 다니는 직원들은 자본주의 안에서 끊임없이 더 많은 물질을 추구하는 욕망의 노예이자 이기적인 인간이라는 것? 나는 이 흥미로운 사건을 들뢰즈와 가타리를 통해 해석해 볼 것이다. 따라서 나의 논문은 어떤 번영에 대한 객관적인 답을 준다고 하기보다 현실에서 일어나는 일을 새로운 방식으로 해석해 봄으로써 미세한 차이를 통해 들어오는 실상을 감지하는 것에 초점이 있다.
[part 5.들뢰즈와 가타리, 욕망]
논문의 모든 내용을 세세히 다루기는 어려워 인사이트가 있는 부분을 요악해서 적어보고자 한다. 우리는 보통 욕망하면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이 주장하는 ‘오이디푸스적 욕망’을 떠올리기 마련이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가 욕망의 주체이며 우리가 원하는 것이 욕망의 대상이라고 능히 생각한다. 이러한 욕망의 개념하에서 욕망은 항상 ‘결여’된 대상을 향하고 이성에 의해‘억압’ 되어있다는 것으로 특징지어진다. 이와 같이 ‘결여’ 된 대상에 대한 심리적 환상으로의 욕망에 대한 이해는 서구 형이상학안에서 계속되어 왔는데 들뢰즈와 가타리는 이러한 욕망에 대한 이해를 뒤엎는다. 욕망을 결코 도달할 수 없는 환상적 대상으로 환원시키는 프로이트적 정신분석하의 욕망의 개념을 비판하며 욕망 그 자체가 힘이고 생산이라고 주장한다. 마치 우리가 신체적 에너지를 투자해 사회적 생산을 이루듯이 욕망은 어떠한 지향성을 갖고 뻗어 나가는 의지나 힘이며 따라서 욕망은 신기루 같은 환상이 아니라 실재를 생산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욕망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생산되는가? 욕망의 생산은 공장에서 기계가 돌아가며 생산이 이루어지듯 기계적인데, 쉽게 예를 들어, 입이 식도를 만나면 먹는 기계가 되고, 입이 기도를 만나면 호흡하는 기계가 되듯이 어떠한 것과 배치를 이루느냐에 따라 각기 다른 기계가 되는 것이다. 이러한 욕망의 기계적인 정의는 오이디 푸스적 욕망의 개념하에서 팽배해왔던 욕망의 인격화를 철폐 시킨다. 이와 동시에 ‘나’ 에 갇혀 있는 욕망의 주관적 개념보다 어떻게 외부의 타자성과 결합되는 지가 더 중요해 진다고 할 수 있겠다. 입이 기도와 만나면 식도와 만났을 때와 다르게 새로운 기계가 되듯, 욕망은 이례적인 항들과 접속하면서 다른 결과물을 도출한다. 이러한 배치를 이루는 모든 기계를 일컬어 들뢰즈와 가타리는 <욕망하는 기계> 라고 명명하는데 이러한 욕망하는 기계는 무엇이든지 될 수 있는 무한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사회는 우발적이고 조직화되지 않은 욕망의 흐름에 코드화와 영토화를 통해 일정한 방향성을 부여하여 이러한 무한한 가능성을 통제하고자 하는데, 이러한 욕망의 흐름을 일정한 방향으로 고정시키려는 사회의 고정성에도 불구하고 그와 동시에 기존의 조직화된 체계를 빠져나가는 흐름들 또한 존재한다. 들뢰즈와 가타리가 가장 눈여겨 보는것은 이러한 탈영토화된 흐름들이었다. 탈영토화되고 탈코드화된 흐름들의 우발적인 만남을 통해 역사의 발전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이를 구체적 예시를 들어 설명하자면, 전제군주 사회에서 봉건적 통제하에서 전제군주를 향해 초코드화되었던 흐름들 사이에서도 여기서 벗어나는 탈코드화된 흐름들이 존재하였는데 이 탈코드화된 흐름들의 만남이 바로 자본주의 사회의 근간이 되었다고 할 수 있겠다. 봉건사회 유지를 위한 흐름에서 벗어난 자본가, 기술 수단, 노동자들의 유목하던 흐름들의 우발적 만남은 자본주의 성립을 가능하게 했다. 여기서 내가 주목했던 점은 기존의 조직화된 체계를 빠져나가는 욕망의 자유로운 잠재적인 힘의 분출 이었다. 외부의 타자, 형식, 접속면과 접속하여 변모할 수 있는 욕망의 흐름은 시대가 포획할 수 없으며 단순한 법과 제도 외부권력에 포섭되지 않고 오히려 이로부터 탈주하는 무한한 잠재성이다. 믿음의 조상이라 일컫는 아브라함은 본래 시대 속에 갇혀 시대가 원하는 욕망을 자신도 욕망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모두가 자본증식을 욕망하는 것처럼 아브라함 또한 그 시대 번영의 축복의 상징인 자손을 낳아 이를 누기를 욕망했다. 하지만 아브라함의 욕망은 여호와라는 대타자를 만나 그 시대의 패턴화 된 욕망의 흐름을 빠져나가는 탈주선을 계속 그린다. 아브라함 자신 또한 그 순간에는 알지 못하였겠지만 대타자에 반응하는 아브라함의 삶은 어느 새 시대의 욕망을 무화시키는 잠재력을 계속 발전시키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능동적으로 시대의 욕망을 탈주하는 탈주선을 그리게 된다. 이러한 면에서 아브라함이 복의 근원이 될것이라는 성경의 구절은 의미심장하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창세기 12장 2절)] 구글의 뛰어난 복지와 자기계발 프로그램, 업계최고의 연봉은 구글 직원들이 탈주선을 그려 복은 근원이 되기보다 어찌보면 구글이 욕망하는 것을 구글의 직원들도 욕망하게 하기위해 섬세하게 제도화되어 펼쳐진 장이라 할 수 있겠다. 개인의 자유와 자아 실현의 욕망을 긍정하는 구글의 문화 속에서 욕망의 흐름은 탈영토화되지만 곧 다양한 메타모델링을 통한 성과지표, 생산성의 지표로 재영토화 된다. 그렇게 펼쳐진 장 안에서 개개인은 점차 능동적으로 시대의 욕망을 탈주하는 탈주선을 그리는 감각을 잃게 되고 시대의 욕망을 무화시키는 잠재력을 개발하지 못하게 된다. 지금 여기 이미 있는 복의 근원인 자신은 유보되며 번영은 마치 먼 미래에 성취될 유토피아처럼 보이게 된다. 그럼 어떻게 우리가 시대의 욕망을 욕망하게 만드는 그 장안에서 탈주선을 그린다는 말인가? 자기개발서처럼 정해진 루트나 전략이 있지 않기에 답은 명증하지 않다. 어쩌면 우리의 손에 명확하게 잡히는 답이 아니기에 우리는 너무 쉽게 그 길이 보이지 않는지도 모르겠다. 들뢰즈는 잠재성이라는 개념을 아직 현행화되지 않았지만 가능성과는 다르게 충분히 현행화 될 것이라고 예상되는 능력이나 자질이라고 규정하며 가능성과 차이를 강조한다. 예를 들어, 수박 씨는 때와 조건만 갖춰지면 수박이 될 것이기에 이미 그 안에 수박이 될 잠재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가능성으로 따지자면 과학기술이 발달하여 수박씨에서 딸기가 나오는 가능성도 있겠지만 이 경우 충분히 현행화 될 것이라고 예상되는 능력이나 자질에서는 벗어나기에 잠재성이라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 또 다른 특이한 점은 수박씨에게는 어찌보면 수박이 되지 않을 미래를 택할 기회는 없지만 인간의 경우 ~를 하지 않을 잠재성을 항상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어떻게 우리가 많은 가능성의 홍수에 휩쓸리지 않고 이미 가지고 있는 잠재성을 현실화 시킬 수 있을까? 이에 대해 아감벤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항상 우리가 습관적으로 몰두해 있는 잠재성을 현실화시키려는 힘을 무화시키고 새로운 사용용도에 내맡김으로서 무엇이든지 될 수 있는 변용가능성을 갖추라고. 사회체의 상징질서에 우리를 기입하려는 힘을 무화시키는 우발적인 만남을 통해 주체성은 기존의 배열에서 벗어나려는 새로운 가능성을 담지한 탈주선을 탈 수 있을 것이다.
[part 6. 영국이라서 특별한거야?]
이러한 틀을 깨는 상상을 할 수 있었던 밑바탕에는 지도교수님의 학생에 대한 세밀한 관심과 더 나아가 거시적인 주제를 다루었던 우리 과의 특성상 자유롭게 내가 선택한 주제를 논문으로 끌고 갈 수 있었던 것이 한 몫 한다. 이 에세이의 초점이 영국석사를 통해 배우는 것인 만큼 누군가 영국이라서 특별한 점이 있었냐고 묻는다면 답은 Yes 이면서 No 이다. 영국이라고 해도 정말 열려 있는 배움이 이루어지는 것만은 아니며 다른 나라에서는 배울 수 없는 귀중한 가치를 꼭 영국에서만 배울 수 있는 것 또한 아니다. 하지만 자신의 관심분야가 비록 대중적이지 않더라도, 지금 당장 돈벌이가 되는 관심사가 아니더라도 그런 학생의 잠재성과 눈에 보이지 않는 자질을 알아봐 줄 수 있는 지도교수가 있다면 영국에서의 석사는 매우 특별 해진다. 나의 영국 석사 논문기행에서 읽을 수 있듯 나에게는 수업을 듣는 기간보다 논문을 쓰는 과정이 더욱 더 내가 이 시대에 대해서도 알고 왜 사람들이 이렇게 살 수 밖에 없는지 이해할 수 있는 기간이었다. 어떻게 보면 폐쇄적이기도 하고 자본과도 뒤얽혀 있기도 한 학계라는 장 속에서 내면화되어 일정한 방향으로 흐르는 흐름들은 미국이든 영국이든 한국이든 어디든 존재한다. 하지만 이러한 장안에서 새로운 패턴과 형식을 생성하고 창조할 수 있는 잠재력은 우리 모두에게 지금 여기 있다. 어떠한 타자와 우발적인 조우가 이를 가능하게 할 것인가? 그것을 갈망하는가? 라는 질문이 영국이라서 특별한가라는 질문을 대체할 수 있겠다. 나의 짧은 논문제출기행이 조금이라도 자신이 갈망하는 것이 이 시대에서 당장 눈에 보이는 이득이 되지 않아 망설이는 이들에게 우발적인 마주침이 되기를 바라며 이 글을 끝맺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