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나라 중 영국 석사를 선택한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짧은 기간이다. 한국에서 학부로 중국어를 전공 후, 콘텐츠 마케터로 첫 커리어 시작을 하고, 뒤늦게 VR/AR에 관심을 가져 개발 공부를 시작해 석사까지 결심했을 때 당시 나는 전공을 많은 길을 돌고 돌아 선택했다는 생각이 있었다. 따라서 최대한 짧고 굵게 공부를 끝내고 다시 빨리 사회로 나가고 싶었다. 학교와 전공마다 약간의 차이는 있겠지만, 대부분의 영국 대학교 석사 과정은 1년이다. 우리나라를 포함해 많은 나라에서 2년에 걸쳐 공부하는 석사 과정을 영국에서는 어떻게 1년 만에 끝낼 수 있을까 궁금했는데, 지난 1년간 직접 공부를 해보며 영국에서 짧은 기간 안에 학위를 얻을 수 있는 이유를 알게 되었다.
영국에서 석사 공부를 하며 가장 신기했던 부분은 내게 주어지는 선택지와 자유가 많다는 것이다. 수업 출석률도 중요하게 여겼던 우리나라 대학과 달리 이곳에서는 그 누구도 수업 출석에 연연하지 않았고, 심지어 출석률이 성적에 반영되지도 않았다. 또한, 과제를 제출할 때도 정당한 이유가 있다면 연장 신청을 할 수 있었다. 사람마다 다양한 이유가 있겠지만, 그 주에 제출해야 하는 과제가 너무 많다 싶으면 더 좋은 퀄리티의 과제를 위해 과제 기간을 연장하는 친구도 있었다. 이렇듯 그 무엇도 강요하지 않고 언뜻 자유로워 보이는 영국 학교 시스템이 마냥 좋아 보이지만, 모든 자유에는 책임이 따르는 법이다.
석사 초반에는 어떻게 공부해야 할지 갈피가 잘 안 잡혔었다. 교수님들께서는 정규 수업 외 추가로 정말 많은 리딩 리스트 및 공부할 자료들을 올려주신다. 한국의 주입식 교육에 너무 익숙해져 있던 탓일까? 석사 초반에는 이미 정규 수업만으로도 충분한 지식을 습득하고 있는데, 딱히 그 누구도 강요하지 않는 수많은 심화 자료들까지 다 봐야 할 필요성을 못 느꼈었다. 하지만 한 교수님께서 말씀하시길 진정한 공부는 수업이 끝나는 그 순간부터 시작된다고 한다. 이 석사 과정에서 무언가를 제대로 배워가고 싶은 사람들은 만약 3시간짜리 수업을 들었다면, 적어도 12시간 이상은 그 수업에 대한 추가 공부하라고 하셨다. 단순히 수업 복습 차원의 공부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교수님께서 수업 전후로 올려주시는 수많은 자료를 최대한 공부하려고 노력하라는 말씀을 하셨다. 영국 석사를 졸업하고 엄청나게 똑똑해지는 사람도 있지만, 반대로 무엇을 배웠는지 모르겠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 즉, 교수님께서 제공해주시는 모든 것을 열심히 소화하려고 노력한 사람은 똑똑이가 되는 것이고, 그것이 아니라면 무엇을 배웠는지도 모르게 1년이 빠르게 지나가는 것이다. 이는 각 과목 점수 채점 기준에도 잘 드러나는데, 남들이 하는 만큼만 하는 사람에게는 평균의 점수를, 남들이 하는 것 그 이상의 노력을 보여준 사람에게는 좋은 점수를 준다.
석사 첫 번째 학기 첫 과제를 하면서 자유의 무게감을 더더욱 느꼈다. 당시 난 지금까지 내가 해왔듯이 적당히 점수를 잘 받을 수 있게 과제를 완성했다. 하지만, 과 친구들이 모두 모여 각자 만든 과제를 발표하는 자리에서 난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친구들의 과제 퀄리티가 정말 천차만별이었기 때문이다. 한 친구는 누가 봐도 정말 대충한 것 같았던 반면, 어떤 친구는 나랑 같은 수업을 듣고, 같은 시간 내에 만든 과제라는 것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퀄리티가 좋았다. 내가 회사 대표였다면 그 친구를 당장 스카웃하고 싶은 정도로 잘 만든 과제였다. 내가 그냥 적당히, 학교 내에서 졸업을 위한 점수만 잘 받으면 되겠다고 생각하며 만들었던 것과 달리, 실제 현업에서도 바로 사용될 수 있게 본인의 역량을 100% 이상을 발휘해 만들었다. 첫 번째 학기가 마무리되고, 교수님께서 런던 내 여러 기업들에게 우리가 만든 과제를 시연할 수 있는 자리를 만들어주셨다. 분명 적당히 잘 만들었다고 생각해 제출한 과제였지만, 스스로 100% 이상의 노력을 하지 않았음을 깨달았기에 당당하게 내가 만든 과제를 시연할 수 없었다. 후에 몇 명의 과제를 잘 마친 친구들이 이 기회를 통해 인턴십을 얻었다고 들었다. 이후로 난 그 어떤 작은 과제를 하더라도 그냥 성적을 받기 위한 제출용 과제가 아닌, 내 이름을 걸고 만드는 하나의 프로젝트라고 생각하고 만들었다. 이전에는 '이정도면 됐지'라고 마무리 짓던 것을 거듭하여 수정했고, 더 좋은 퀄리티의 프로젝트로 완성될 수 있도록 노력했다. 덕분에 모든 과제가 다 소중한 포트폴리오가 되었고, 후에 취업할 때도 좋은 영향을 주었으니 힘들었지만 소중한 깨달음이었다.
1년 동안 정말 치열하게 살았지만, 또 그렇다고 크나큰 정신적인 스트레스는 없었다. 분명 하루하루가 공부로 가득한 여유 없는 삶이었음에도 즐겁게 공부할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일까 생각해봤는데, 같이 공부하는 친구들이 가장 큰 힘이 되지 않았을까 싶다. 사실 개발 공부를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내가 영국행이 결정되고 가장 걱정했던 것은 언어의 장벽도 아니고, 타지 생활의 외로움도 아니었다. 다만, 과연 비전공자인 내가 개발 공부를 잘 해낼 수 있을까? 팀 프로젝트가 많은 과정이라고 들었는데, 내가 개발을 잘하지 못해 팀에 민폐가 되지 않을까? 이런 두려움이 가장 컸다. 아니나 다를까 첫 팀플에서 내가 맡은 파트에서 계속 오류가 났었다. 피해를 주고 싶지 않은 마음에 혼자 끙끙거리던 중에 같이 팀플을 하던 친구들이 도와줄까? 라고 물었다. 그렇게 나 포함 개발 담당하는 친구들 3명이 다 같이 온라인으로 화면 공유하면서 7~8시간 동안 라이브 코딩을 하며 내가 해결하지 못하던 오류도 해결하고, 프로젝트 전체를 훑으며 함께 개발했다. 내가 팀에 민폐가 되었다는 걱정보다는 서로 도우며 모르는 것을 배우는 즐거움이 더 컸다. 내가 부족한 부분을 친구들이 채워주고, 친구들이 모르는 부분은 내가 채워주고, 서로 윈윈하는 건강한 팀워크가 이런 것이겠다는 것을 배웠다.
마지막 학기 지도 교수님과 논문을 위한 미팅을 할 때, 교수님께서 제일 많이 쓰던 표현은 "너 덕분에 많이 배웠다" 였다. 교수님께서는 일방적으로 내게 지식을 전달해주거나 본인의 의견만 가득한 피드백을 주지 않으셨다. 기껏해야 이 분야에 발 조금 담근 햇병아리인 내게 많이 배웠다고 말씀하시면서, 본인이 읽거나 공부한 것을 공유해주셨고, 이는 곧 같이 고민해보자는 말을 이어졌다. 지도 교수님이 내 위에 있는, 나를 평가하기 위해 존재하는 사람이 아니라 나와 같이 XR 분야를 좋아해 함께 지식을 나누고 싶어 하는 동료라는 느낌을 많이 받았다. 같은 분야를 연구하고 공부하는 사람들이 좋은 팀워크를 바탕으로 힘을 뭉치면 어떤 시너지를 만들어내는지를 배울 수 있었다. 비전공자 출신으로 내가 영국에서 VR/AR 전공을 무사히 마치고, 취업까지 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함께 의지하며 공부했던 동료들에게 있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