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딩 1년 배운 척척석사가 런던 스마트시티 프로젝트에 곁다리 얹은 이야기
특별한 꿈이 없는 문과생들이 '취직이 잘된다'는 카더라로 우르르 갔던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4.5년 동안 컨설턴트로 일을 했다. 화장실에서 몰래 울던 시절을 지나 새벽 2시 퇴근이 고되지만 낯설지 않고, 고객들 앞에서 쫄지 않고 농담도 던지며 발표하는 시점이 되자 '고인물이 되었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외에 한 번쯤 유학을 가보고 싶었다던가, 일을 하면서 ad-hoc으로 배운 SQL이 생각보다 재밌었다던가, 전남자친구랑 헤어지고 부장님이랑 같이 술 마시고 울다가 더 나이 들어서 용기란 게 사라지기 전에 퇴사하고 유학 가라는 조언을 들었다던가 하는 다양한 이유가 있었지만 구체적인 계획이나 강력한 동기가 있었던 건 아니었다. 정리해보면 컨설팅을 하면서 자비로 유학을 갈 수 있을 만큼의 돈을 모았고, 한국에 부양해야 하는 가족이 없었으며, 회사에서 성장 속도가 더뎌지는 것이 체감되었고, 더 나이 들기 전에 다른 나라에서 일을 해보고 싶었다. 그래서 경영학과를 선택했듯 유망하다고들 하는 Business Analytics를 전공하기로 결정했다. 그렇다. 그냥 얼렁뚱땅 영국에 석사를 하러 왔다.
책도 많고, 강의도 많고, 부트캠프도 많고, 심지어 유튜브에 무료 강의도 많은 코딩을 굳이 잘 쌓아온 커리어를 그만두고 왜 큰돈과 시간을 들여가며 배우냐는 사람, 코로나가 창궐한 시점에 비교적 안전한 한국을 벗어나 굳이 코로나가 제일 심한 영국으로 가는 것을 반대하는 사람, 또 코딩이 하고 싶은 거면 코딩을 주야장천 할 수 있는 프로젝트로 배정해주겠다는 직장 상사도 있었다. 근데 사실 나는 '코딩'에 꽂힌 건 아녔는지 타인의 제안이나 조언은 그냥 한 귀로 흘려보내고 얼렁뚱땅 영국으로 날아왔다.
밤낮없이 일하면서 번 돈을 영국 유학에 다 쓰고 영국 통신사에 데이터 분석가로 취직한 지금, 영국 석사 결정을 후회하냐고 물어본다면 전혀! 1년 동안 얼마나 힘들었는지, 혼자서 이 결정이 옳았는지 의심하고 곱씹으며 맘고생했던 날들을 다 알고 1년 전으로 돌아간데도 나는 다시 영국 석사를 선택할 것이다.
직장인에서 다시 학생 신분으로 돌아간 자유로움, 다양한 국적의 친구들을 만나 넓어진 식견, 1년 동안 밤새가며 갈고닦은 코딩 실력 등 다양한 이유가 있겠지만 이 글에선 석사과정의 최종 보스 '졸업논문'을 통해 왜 영국 석사 결정을 후회하지 않는지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같은 과 친구들끼리 미국 대학원생들은 졸업논문이 아닌 프로젝트를 하면서 포트폴리오를 쌓아 취업 준비를 하는데, 우리는 졸업하려면 무조건 통과해야하는 졸업논문에 1년 석사 과정 중 2.5달을 쓰는 건 정말 실용적이지 않다고 투덜댔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졸업 논문을 통해 영국 직장 내 의사소통과 의사결정 과정 그리고 Business Analyst의 역할을 엿볼 수 있는 아주 실용적인 기회였다.
수년 전 지도교수님의 수업을 들었던 동문이 Westminster City council(이하 시의회)의 런던 스마트 시티 프로젝트 책임자 중 한 분이었고, 동문의 요청으로 프로젝트 고문이 된 지도교수님은 학생이 원한다면 프로젝트에 참여할 기회를 제공해 주셨다. 데이터 분석을 겨우 1년 배운 조무래기 학생이 런던 스마트 시티에 곁다리를 얹는 이런 말도 안 되는 기회를 놓칠 수 없어 제의를 받자마자 프로젝트 참여 의사를 전달했다.
물론, 석사 과정의 최종 보스답게 녹록지 않았다.
첫 번 째 난관은 논문 주제 선정. 논문 제출 기한은 정해져 있는데, 스마트시티 프로젝트는 장기 프로젝트이다 보니 주제를 정하기 위한 미팅을 잡는 것조차 만만치 않았다. 눈에 보이는 진척이 없다 보니 괜히 프로젝트에 참여한다고 했나 싶고, 욕심이 과해서 졸업을 못하는 게 아닌가 정말 고민이 많았다. 또한 시의회에서 먼저 학생 참여를 원한 것이 아니라, 어쩌다 보니 협업을 하게 된 상황이라 나를 귀찮아하는 직원분들도 있어 초반에 커뮤니케이션이 더욱 어려웠다.
시의회에 제발 좀 만나 달라고 여러 번 요청하고, 지도교수님께는 이럴 거면 혼자 논문을 쓰겠다고 징징거린 끝에 7월 초 대기질 관리팀과 첫 미팅을 할 수 있었다. 학교에서 배포한 논문 가이드라인에 따르면 이미 선행연구 검토(Literature Review)와 연구방법론(Methodology) 파트를 끝내야 하는 시점이어서 빨리 주제 정해서 시작해버리자는 마음으로 첫 미팅에 참여했다. 안타깝게도 25분의 첫 미팅이 끝난 후 나는 기숙사 침대까지 거의 네발로 기어 들어가 하루 종일 끙끙 앓아야 했다. 두 학기를 수료한 상태여서 영국 생활에 나름 적응했다고 생각했는데, 직장 내에서 쓰는 줄임말이나 배경지식을 요하는 단어들이 끝도 없이 나와서 도저히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예를 들어 'AQI는 Defra를 그 외 지수는 LAQM을 확인하면 되고, Westminster에서 관리하는 AURN은 2개, 그 외에 장비는 10~12개가 있는데 자세한 건 리포트 A,B,C를 참조하라.'라는 식의 정보가 쏟아졌는데, 분명 영어인데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의 향연이었다. 적당히 몰라야 그때그때 질문을 할 텐데 알아듣는 게 없으니 하나하나 물어볼 수 도 없었다. 그저 영국인 2명이 하는 말을 들리는 대로 최대한 받아 적으면서 흐름을 따라가려고 애쓰다 미팅이 끝났고, 허무함과 자괴감에 뒤덮여 그대로 침대에 몸져누웠다.
그래도 내 논문이고 졸업은 해야 하기에 다음날부터 영국 내 다양한 기관에서 발표한 최근 10년 내 리포트를 구할 수 있는 대로 읽으며 영국 대기질 관리 및 개선 체계에 대한 기초적인 내용을 공부하고, 선행연구를 통해 이 주제에 Data Science를 어떻게 접목하고 있는지 알고리즘까지는 이해 못 하더라도 트렌드를 파악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 결과 시의회에서 실제로 하고 있는 프로젝트와 같은 주제로 논문을 써서는 그들이 얻을 인사이트가 없다는 결론을 냈다. 그도 그럴 것이 수많은 환경공학 박사들, 데이터 사이언티스트들, 그리고 영국 최고의 대학이 참여하는 장기 프로젝트를 졸업도 안 한 석사 나부랭이가 한 두 달 공부해서 유의미한 결과를 뽑을 수 없지 않겠는가. 그래서 석사 수업에서 배운 것을 최대한 활용해서, 시의회에도 도움이 될 인사이트를 도출할 수 있는 주제들을 찾아보았다. 세 가지 주제에 대하여 파일럿으로 4주 치 데이터를 뽑아 간단하게 분석한 결과와 선행연구를 정리해서 현실적으로 내가 시간 내에 분석할 수 있는 범위와 원한다면 시청에서 어떤 추가 분석을 수행할 수 있는지, 그리고 예상되는 인사이트가 무엇인지를 정리해서 발표했다. 세 가지 주제 중 조별과제와 트위터를 활용해 런던 대기질에 대한 대중들의 반응을 수집하고, 감성 분석(Sentiment Analysis)을 기반으로 대중들의 반응을 분석하는 주제가 가장 자신이 있었는데, 다행히 시의회에서도 해보지 않았으나 해보고 싶었던 연구 중 하나라며 대중 반응 분석을 가장 반가워했다.
컨설턴트로 일을 할 때는 대개 클라이언트가 확실한 니즈를 가지고 프로젝트를 수주하면, 그 니즈를 세부적으로 분석하고 프로젝트 범위와 기한을 정하는 식으로 프로젝트를 진행했는데, 졸업 논문은 클라이언트가 얼떨결에 프로젝트를 수주하긴 했는데, 니즈가 명확하지 않아 내가 직접 니즈를 찾아야 하는 상황이어서 시간이 매우 오래 걸렸던 것 같다. 그래도 내 능력으로 가능한 범위와 불가능한 범위를 솔직하게 공유하고, 내 능력으로 할 수 있는 아이디어를 먼저 찾아 제시하다 보니 시청 직원분들도 점점 시간을 내서 내 논문을 리뷰해 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진부하지만 솔직함과 진심이 의사소통의 열쇠임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두 번째 난관은 넘치는 자율성에서 왔다. 한국에서는 직장을 다니며 파트타임으로 석사 과정을 밟지 않는 이상 풀타임 석사들은 랩실에 소속되어 지도교수님의 연구 및 프로젝트를 돕고, 논문을 쓰는 것으로 알고 있다. 또 만화 심슨에서 대학원생들은 '잘못된 선택을 한 것'뿐이라는 유머가 나온다.
전 세계적으로 대학원생은 밤낮없이 연구하고, 지도교수님이 명령(?)하면 냉장고에 코끼리를 집어넣기도 하는 이미지인가 본데, 나의 석사 경험과는 거리가 상당히 있다. 밤낮없이 공부하는 것은 같으나, 지도교수님은 논문을 쓸 때서야 정해졌고 내가 오히려 피드백을 받기 위해 여러 사람을 쫓아다녀야 했다. Westminster City Council과 일할 수 있는 말도 안 되는 기회를 주심에는 감사했지만, 논문 주제나 데이터 수집 요건, 사이즈, 방법론 등 세세한 부분에 대해서는 전혀 지도해주시지 않았다. 의견을 여쭤보면, 나의 논문이니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나의 의견을 관철시키라고만 하셨다. 피드백을 위한 초안 제출 역시 언급하지 않으셔서, 매주 진행 상황과 이슈 사항 그리고 차주 계획을 공유하며 피드백을 원한다는 의사를 계속해서 전달했다. 친구들의 얘기를 들어보니 파트별 데드라인을 사전에 정하여 공유하고, 데드라인 전에 제출하면 문장 문장 피드백을 주는 지도교수님들도 있어서 모든 걸 내가 다 알아서 해야 하는 상황이 버겁게 느껴질 때도 있었다. 정해진 일정이 없다 보니 기분이 좋지 않다는 핑계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 날도 있었고, 일정이 계속 늦춰지자 '에라 모르겠다' 싶은 마음에 일정 신경 안 쓰고 하루 동안 끝낼 계획이었던 파트를 나흘에 걸쳐 분석하기도 했다. 돌이켜보면 덕분에 무엇이 중요한지 판단하고, 더 중요한 파트에 추가 분석을 할 수 있었고, 피드백을 받기 위해 여러 사람들에게 내 주제를 설명하다 스스로 부족한 부분을 찾고, 논리가 부족한 부분을 찾을 수도 있었다. 지도교수님이 이것을 의도한 것인지는 확실치 않으나, 자율성에 따른 책임감과 효율성을 제대로 경험했다.
유튜브로 코딩을 배워서 구글에 취직한 사람도 있고, 몇 억씩 들여 Comupter Science를 졸업하고 나서야 자신의 길이 아니라는 것을 느끼는 사람도 있다. 좋은 회사에 취직하거나 돈을 많이 버는 것이 나에게 최우선의 가치가 아니기 때문일까? 나는 이번 한 해 동안 낯선 환경에 적응하고, 다 잊어버린 미적분을 다시 공부하고, 비협조적인 사람들을 협조적으로 변화시키고, 자율성과 책임감을 저울질하고, 시행착오를 통해 난관을 헤쳐 나온 이 과정만으로도 영국 석사가 옳은 결정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석사 유학을 통해 런던 스마트 시티라는 있어 보이는 프로젝트에 곁다리를 살짝 얹어본 것, Westminster City Council Analyst network에 초대되어 졸업논문을 발표하는 것, 학교 홍보용으로 영국 신문에 졸업 논문에서 발견한 인사이트가 실리는 것, 그리고 영국 대기업에 데이터 분석가로 취직한 결과들이 영국 석사가 옳았다는 결과에 힘을 실어 주긴 한다. 그렇지만 아마 제일 중요한 건 석사 유학에 대한 이 만족감이 앞으로 살아가다 지금 잘하고 있는지, 내가 한 결정이 옳은 결정인지 의문이 들 때마다 잘하고 있고, 잘할 수 있다고 말해주는 버팀목이 되어줄 것이기에, 유튜브로도 배울 수 있는 코딩을 배우러 온 영국 석사 유학이 옳은 결정이었다고 자부한다.
쑤
University of Warwick MSc Business Analytic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