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인들 사이에서 공통 분모를 만들고 싶었다. 유학 첫 해 영국 대학에서 외국인이 더 많다는 걸 체감하면서도 이상하게 우리 모두가 영국에 있는 이상 영국 문화를 표준으로 따를 수 있을 것 같았다. British 학생이 소수가 된 캠퍼스에서는 오히려 EDI(Equality, Diversity, and Inclusion; 다양성 포용)정책을 추구하고 있는데 무엇이 중심가치이고 무엇을 동등하게 두겠다는 건지 쉽게 보이지 않아서 나는 일단 영국스러워 보이는 걸 먼저 찾아 맞춰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면 무엇이 영국스러운 것인가?
차(茶)를 많이 마신다는 것 하나만큼은 머리속에 입력되어 있었다. 한국에서 어느 모임에 누가 무언가를 가져오면 자연스럽게 그 주제로 이야기도 하고 함께 나누며 같은 경험을 공유한 경험이 있다. 그래서 유학오던 날까지 여러 번 풀었다 싸던 짐 안에는 혹시라도 티타임으로 모일 때 나눠주면 좋을까봐 쟁여 온 오설록 티백들이 있었다. 긴장 속에 참여했던 학과 오리엔테이션 옆 자리에 앉은 누군가와 기숙사 공용 휴게실에서 차 한잔 하자는 약속을 만들었을 때 내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오설록 보관함으로 달려가 아주 신중하게 티백을 고르는 것이었다.
Personal tutor와 첫 만남에도, 친구의 집에 초대되었을 때도 나는 여러번 오설록을 찾아냈고 어느 순간 그것을 그만두게 되었다. 알록달록 종이 상자 안에 다시 낱개 포장된 티백은 일상적으로 소비하는 티백과 다르다는 걸 과시하는 것 같았고 나눠받는 사람들이 그 자리에서 편하게 뜯어 마시기보다 기념으로 가지고 있길 원했다. 내가 원하던 것은 다름이 아니라 같아지고 싶었던 건데 ... 여러 번 경험을 거치며 실패인 것이 점점 더 분명하게 드러났다.
영국에서 내가 차를 마시는 행위는 실제 체온을 올리는 방법이자 마음의 온도를 올리는 방법이기도 하다. 라디에이터 난방비가 비싸다보니 몸이 떨리게 추위를 타는 속을 달래기엔 차 한잔이 제일 가성비 좋은 선택이다.
딱히 할 말은 없고 하고 싶은 말도 없지만 뭔가 사람들 주변에서 얼쩡거리며 온기를 느끼기에도 찻잔만큼 유용한 가림막이 더 있을까 싶다. 다른 주변인들이 차를 마시는 행위는 조금 더 무의식적인 습관에 가까워 보인다. 마치 종교 의식처럼, 주기도문을 들으면 자연스럽게 두 손을 모으고 십자 성호를 긋는 것과 같은, 리츄얼(ritual) 행동 패턴이 차를 마신다는 형태로 형성되어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이것이 몸에 배지 않은 이방인을 구분하는게 더 쉬웠을까, 색감 있는 오설록 티는 전반적인 삶의 의식에 사용되던 종류가 아니라 따로 간직할 기념품으로 생각했던 것일까.
그런데 정말이지 차를 많이 마시긴 했다. 커피가 아니었다. 학교 수업으로 외출했다 돌아오면 항상 같은 기숙사 주방을 공유하던 플랏 메이트들과 차를 마시는게 흔한 일상이었다. 영국에서는 정말로, 마치 티를 마셔야 하루가 진행되는 루틴을 가진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지금은 이제 나도 회사에 출근하는 날이면 짧은 하루 일과 시간 중에도 네다섯번 티백을 갈며 뜨거운 물을 리필하고 있다. 아침 출근에 체크인하며 자신의 컵을 들어보이는 동료들이 친근하고, 회의실로 향하며 컵을 챙겨가는 뒷모습에는 한 자리에 모인 그들의 처음 10여분 스몰톡이 마치 눈 앞에 보일 것처럼 선명하게 이어지고, 집중이 힘든 시간에 주변을 둘러보다 눈이 마주치면 조용한 입모양으로 cuppa tea?를 말하며 컵을 들고 일어난다.
돌고돌아, 영국스러운 걸 찾으려다 한국과 다를게 없구나 하는 깨달음을 얻는다. 컵에 담긴 내용물이 차가 되었든 커피가 되었든 술이 되었든 ... 그 컵을 들고 나누는 행동들은 보편적으로 통하는구나. 서로 다른 내용으로 채워져 있지만 컵을 같이 들어올리는 것으로 마음을 연결하려는 의지를 표현하는구나. 오늘 기록을 마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