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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유자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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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정 Oct 02. 2015

B컷 전문 사진사의 목표

유자 앨범을 만들자

며칠 내내 산책길에 카메라를 들고 다녔다. 날이 맑아서 아무데서나 셔터를 누르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그렇다고 모든 사진이 작품처럼 나오지는 않는다. 거기다 난 사진을 참 못 찍어서 그럴듯한 사진 한 장을 건지려면 최소 열 번은 셔터를 눌러대야만 한다. 사진 찍을 일이 그다지 많지 않아서 사진 실력도 더디게 느는 건지 모르겠다. 마음이 내킬 때만 잠깐씩 찍어 보는 수준이니 언제나 고만고만이다. 렌즈에 담는 피사체도 유자 하나뿐이니 사진 실력에 발전이 있다면 그게 더 의문이겠다.     


지금 쓰는 DSLR은 사진이 취미인 친구가 빌려준 물건이다. 그 친구 앞에서 “사진 찍어보고 싶다”, “강아지 사진 찍어 놓고 싶다”는 얘기를 가끔씩 해서 그런지 한두 푼도 아닌 물건을 선뜻  장기임대해줬다. 말이 빌려주는 거지 몇 년째 내가 잘 쓰고 있다. 그 친구에게 고마워서라도 좋은 사진을 많이 찍어야 할 텐데. 지금까지는 그냥 기분 따라 막 찍었다면, 이젠 사진 구도에 대한 책 한두 권이라도 읽어봐야 하나 싶다.      


엉덩이가 제일 많이 찍힌다...

사실 카메라를 빌려올 때는 예쁜 유자 사진을 많이 찍어서 앨범을 만들어 놓자는 목표가 있었다. 특히 유자가 어릴 때는 하루가 다르게 크는 게 눈에 보여서 매일매일 사진을 찍어놓지 못해 안달이었다. 그 후로 몇 달은 열심히 카메라를 들고 동네를 누비며 닥치는 대로 유자 사진을 찍었다. 멀리까지 산책을 나가고 렌즈도 열심히 바꿔 끼워가며 ‘출사’를 나갔다. 유자노트 글에 곁들이는 사진들도  그때 찍어놓은 사진들이다. 하지만 배경이 비슷비슷해서 그런지 사진도 항상 비슷비슷하게 느껴졌다. 또 유자는 계속 움직이고, 말을 알아듣지도 못하니 내가 원하는 장면을 찍기도 어려웠다. 귀엽게 뛰어오는 사진을 찍으려고 셔터를 누르면, 유자 엉덩이만 찍혀 있는 식이었다. 아니면 초점이 잘 맞지 않거나. A컷은 없고 B컷만, 사실 B컷도 안 되는 사진만 넘쳐나니 금방 흥미를 잃었다.     


몇 달 정도 카메라는 장식품으로 전락했다. 최근에 다시 유자 사진을 찍기 시작한 건 전적으로 브런치 덕분이다. 글쓰기 플랫폼이라고는 하지만 아무래도 사진이 들어가야 더 보는 맛이 있어서 커버 사진 넣기를 포기할 수 없었다. 찍었던 사진 중엔 잘 나온 사진이 별로 없어 계속 새로운 사진을 찍어대고 있다. 여전히 마음에 드는 사진보단 B컷이 많다. 오늘도 풀밭에 가서 열심히 사진을 찍었는데 쓸 만한 사진은 다섯 장 정도였다. 또 엉덩이만 찍힌 사진이 많이 보였다.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처럼 사진을 찍으려면 대체 어떻게 해야 할까? 물론 그 수준을 바라는 건 아니지만 비결이 궁금하긴 하다.     

오늘의 '결정적 순간'

‘사진 찍기가 어렵다’는 건 한 번 외면했던 고민이다. 다시 카메라를 들고 유자를 찍기 시작한 이상 이번에는 다른 결론을 내고 싶다. 생각해보면 다른 많은 일들도 한 번에 즐거움을 발견하긴 힘들었다. 글쓰기, 책 읽기, 운동, 집안일, 공부, 악기 연주까지 다 마찬가지다. 좁쌀만 한 즐거움이라도 찾아내야 지루한 일도 계속할 수 있고,  계속해야 더 큰 즐거움을 느낄 수 있다. 다행히 사진 찍는 즐거움이 좁쌀보다는 크고, 나름의 목표도 유효하다. 이번에는 정말 멋진 유자 앨범을 만들고 말겠다. 잘 안되면 B컷 앨범이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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