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잘 놀 수 있을까.
다들 나보러 뭐 할 거냐고 묻는데, 실은, 답이 없다. 아니 답이 없다기보다, 내 답을 답으로들 안 봐준다. 놀아요하는 답은 답이 안된단다. 나는 소위 '일 할 팔자'로 보이는 타입이다. 20년 회사 다니는 동안, 이직 중에도 며칠 휴가를 두지 않았을 만큼, 부지런을 떨었다. (왜 그랬을까!) 이 나이가 되고도 회사 차리시는 선배들이 같이 하자고 연락을 하는 게 그래서 일거다. (선배님, 제가 회사 차릴 나이랍니다!) 내 업무 콸리티를 떠나 내 업무량 자체가 월급의 비용효율성을 높일 것이라는 확신들이 있으신 거다. (하하하 씁쓸하다)
놀아요하는 답은, 답이 안된다
그러니, 노는 나는 그들이 아는 내가 아니다. 놀겠다는 내 대답은 다들 웃어넘긴다. 아, 웃기 전에 두어 번 다시 묻는 게 일반적이다. '그러니까 뭐 할 거냐구.' '알았어, 알았어. 그래서, 뭐 할 거야?' 그러다, 내가 진짜 답이 궁하다는 걸 알게 되면, 그제서야 질문을 멈추고 의견을 준다. 얼마나 견디나 보자고 하는 사람도 있고, 일 할 사람이 안 하면 병나 라며 음울한 기운을 씌우는 사람도 있다. (웃자고들 하는 얘기겠지? 흠!) 술이 좀 과해서 말이 섞이면, 뭔데 말 못 하냐 핀잔을 먹을 수도 있다.
비슷한 기억으로, 한때 같이 일하던 선수랑 이런 경우가 있었다. '선배님은 뭘로 스트레스를 푸십니까?' '어? 음.. 딱히 풀자고 뭐 해본 적 없는데?' '그럴 리가요. 뭐 있겠지요.' '음.. 가만히 있는 것도 돼? 난 그냥 가만히 있는 듯.' '그럼 진짜 스트레스 때는요?' '그니까 그럴 때 그런다구.' '아니, 그래도 안 풀리면요?' '아씨, 짜식, 그래 술 마신다. 됐냐?' '그죠? 그렇구나. 선배님은 술로 푸는구나...'
믿어줘라, 나 논다, 놀 거다
(많은) 사람들은, 묻기 전에 답이 있다. 대화가 쉽고 간단하려면 답을 맞히는 것이 좋다. 나야 뭐, 그 방면에서는 썩 능숙하다 할 수 있다. 애초에 낮은 자존감으로 주변 눈치를 많이 보는데다가, 에이전시 경력이라, 맞추는 건 뭐 껌이다.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웃픈걸) 뭐할 거냐는 질문을 잘 받아넘겨 대화를 매끄럽게 하고, 모두가 내 상태를 맘 편히 내재화할 수 있게 하는 대답쯤은 잘 알고 있다. 노는 동안 저는 여행을 할 겁니다, 노는 김에 학교를 가볼까 합니다, 그런 거지. 한방에 끝내려면, 친구랑 대행사 차리려구요 같은 것이 젤 낫다. 납득이 되는 답. 묻기 전에 정해놓은 답.
하지만, 나의 현 상태에 대해서는, 대화가 꼬이든, 길어지든, 뭔데 말 못 해주냐며 삐지든, 저런 접대용 대답은 안 하고 싶다. 20년 만에 (혹은 거슬러 올라가 학교 때까지 치면 한.. 아, 씨...) 처음으로 놀자고 놀아보는 건데, 접대용 대답으로 이 시간을 욕되게 할 수 없기 때문이다. ㅎ
대신 준비했다, 나 노는 거 뭔지. 나 어떻게 놀 건지. 대화 길어지고, 뭔 소리냐 말 듣기 싫어서 선뜻 꺼내지 못한 설명을 여기다 하겠다. 그러니, 다들, 이거보고, 이제는 좀 믿어줘라. 나 논다. 놀 거다.
논다 함은 계획을 갖지 않는 것이다.
나의 논다 함의 가장 핵심은 계획을 갖지 않는 것이다. 뭐라도 계획이 개입되면, 그건 노는 것이 아니라, '하는'것이다. 계획의 경중이 달라 그렇지, 결국 일신우일신을 외치며 정진하게 된다. 그러니 계획이 있는 건 노는 것이 아니다. 하여, 나는 아무 계획도 없다, 무작정이다. 계획 비슷한 궁리라도 생길라치면 얼른 싹을 밟겠다.
계획한 일이 없어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을 빈 시간이라고 생각하지도 않겠다. 나는 시간을 재지 않고 비었든 찼든 따지지 않고, 그저 서성이며 시간을 보낼 요량이다. 나른하니 빈둥거리는 휴일에 자책하며 발딱 일어나 앉곤 했는데, 그럴 때, 남편이 그랬었다. 왜? 나른하니 좋잖아? 아, 그렇지 싶었었다. 이제나 그거 하려고 한다. 그간의 강박을 좀 털고, 효율성과 생산성 같은 기준은 최대한 멀리하며, 효율적이지 않아서 나태이고, 생산하는 바 없어서 무위인 시간을 맘껏 누려볼 생각이다.
가물 해진 옛날 책도 다시 뒤적이고, 평생 쓸데없을 주제를 좀 파보고, 질릴 때까지 낙서나 하고, 바닥날 때까지 공상을 끌고 가고, 주변 사람들을 찬찬히 떠올려보고, 묵힌 감정들을 되짚어보고. 제목 모른 채 노래를 듣고, 기억 안나는 영화는 잊어주고, 사다 먹으면 될 장아찌를 담고, 별 것도 없을 먼 여행지를 돌아 돌아 가볼 생각이다. 그렇게, 난 진짜 놀 거다. 내가 지금 뭐 하고 있나, 할 게 얼마나 많은데, 이게 무슨 소용인가, 그런 생각 없이. 우리 아이 인생 기준처럼 (어쩌면 남편도?), 재밌으면 하고 재미없으며 안 하고. 그렇게 놀 거다.
좀 휘청이지만, 여튼 멈출 거다
바야흐로 잉여의 시대 아닌가. 잉여로 인해 오덕이 나고, 그 오덕이 파낸 영역이 산업적 문화적 대안이 되고 있지 않은가. 알려진 영역은 이미 자본이 모두 점유했고, 노동은 그 자본의 생산성을 따를 수 없어 배제된다. 계획하고 나아가는 부지런함으로 버틸 수 있는 자리는 이제 없다. 그러니, 나 노는 이 시간이 나에게 자양분이 되고 대안이 되어 줄 수도 있지 않을까.
(헐. 이거... 나 지금 계획 있는 건가? 아니다! 나 계획 없다! 나 노는 거다! 글 쓰다 보니 꼬였다. 그만 쓰자. 그만 말하고, 그만 생각해야겠다. 더 하면, 알파고마냥 떡수 둔다. 아, 당황스럽네.)
추스르고 다시 보니, 이렇게 쓰고 있는 거, 아마 내가 날 알아서이지 싶다. 내가 날 볼 때도 퍽이나 놀겠다 싶은 거지. 그게 불안해서 주먹 꽉 쥐고 논다고 선언하는 중인가 보다. 기운이 좀 빠지긴 하지만, 아, 뭐... 이게 어디냐.
관성이든 타성이든 멈출 때 휘청이는 거 어쩔 수 없다. 좀 휘청이지만, 여튼 멈출 거다. 노는 거 참.. 쉽지 않다. 노는 데도 노력이 필요한가 보다.
pn. 글을 등록하자고 보니, 매거진 제목이 '하루한그림'이다. 하하하하하하 정말 나 계획 없이 노는 거 맞냐? 하하하하하 낯을 들 수가 없이, 민망하다.
pn2. 민망한 매거진 제목을 말 되게 고쳤다 - 입장 정리. '하루한그림'이 택없어이기도 하지만, 보아하니 내가 그리고 쓰는 것이, 묵은 입장의 정리인 것 같다. 사람과, 세상과, 그에 얽힌 나에 대한 소소한 입장 정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