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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OIU Jun 01. 2016

나와 타인의 취향

나의 홍대화실 정착기 2

화실을 두어 달 들낙거리다보니, 슬슬 내 본색(本色)이 드러난다. 문제는, 내가 드러낸 그 '본래의 色'이란 것이, '구정물의 色'이라는 데 있다.


어릴 때, 미술학원 선생님이 자주 그랬다, 물 좀 갈고 그리라고. 더러운 물로 그리면 그림이 더럽게 된다고, 구정물 색 그림 된다고. 나는, 게으름일 수도 있고, 무성의일 수도 있는 어떤 이유로, 그 지침을 대충 뭉개고 더러운 물로 그림을 계속 그렸었다. 이붓 저붓 다 담근 물에 이색 저색 다 섞여서, 퀴퀴하고 컴컴하고 음울한 구정물 색 그림


그렇게 된 구정물 색이 내 톤으로 굳은 건지, 혹은 애초에 내가 좋아하는 톤이 구정물 색이었는지 잘은 모르겠지만, 나는 대체로 그런 어두운 그림이 편코 좋다. 그야말로 내 본색인 것이다. 나는 고민 많은 사람이 그린 그림이 좋다. 머리로 그린 그림이 좋다. 다소 고지식하고 빡빡해 보여도 감정, 욕망 그런 거 꽉 눌러 그린 작품이 좋다. 후려쳐 얘기해도 된다면, 회화 쪽에서 그런 그림들은 종종 먹먹하니 심각하고 무겁고, 어떤 것들은 실제 어둡기도 하다. 구정물 색의 감성이 있다고 말해도 될까? 여튼 나는 그런 그림에 눈이 간다.


기성 그림 모사 숙제. 구정물 톤을 좋아하는 내 눈에 딱들었지만, 원안이 구정물 톤이라고 말할 순 없다. 뭐래는거냐... (오일을 많이 썼더니, 반사광이 좀 많이 잡혔다)


그렇다 보니, 내가 그리는 것들은 지금 다니는 화실의 주류와는 맥이 좀 다르다. (구정물 색의 선호도가 높을 리 없지!) 나를 한쪽에 두고, 색감을 기준으로 나머지를 죽 늘어놓으면, 내 반대쪽 끝에는 화사한 꽃밭이나, 유럽의 거리, 예쁜 아가씨가 등장하는, 르누아르식의 포슬대는 붓발의 그림들이 있다. 다들 그림들은 또 어찌나 잘 그려야지, 스스로 작심한 만큼의 아름다운 그림들이, 죽- 있다.


그런데, 그런 그림들을 보면서, 가끔 나는 '아.. 저 기술 저렇게 쓸 거면 나 주지' 같은 속말을 하는 것이다. 흘리는 속말이라 귀담을 건 아니지만, 꺼내 곱씹으면 꽤 편협한 생각이지 않나?


실력, 저렇게 쓸 거면 나 주지


편협이라... 언제 물어봐도, 내 대답은 한결같다. 취향에 우열이 어딨냐, 그저 다른 것이지, 취향은 하나의 척도로 위계화 할 수 없다. 차이로 인한 다양성은 문화적 풍요의 근원이다까지. 진짜, 정말, 진심,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고 생각했다! 근데, 보면, 그건 소화 안된 말대답이고. 내 진심은 그만큼이 안 된 모양이다. 아름다운 그림을 보고 저런 속말을 하는 건 양반인 것이고, 인테리어 그림 어쩌고 하는 표현으로 얍삽하게 씹기도 하고, 절친 앞이면 이발소 그림이네 어쩌네 하는 막말을 대놓고 하기도 한다. 그런데 그게 부적절하다는 것은 나도 안다. 속으로 말해도, 에둘러 말해도, 대놓고 말해도, 말 끝에 부끄러울 수밖에 없는, 저열한 태도라는 걸 안다. 알긴 안다.


타인의 취향에 대해, 나와 다른 가치에 대해, 내 본심은 꽤 편협하다. 나의 편협은 통제 안 되는 마음의 문제만은 아니다. 난 사실, 머리로도 잘 정립이 안된다. 나는, 내 취향과 가치를 자부하는 것과, 타인의 것을 존중하는 것을 어떻게 병립시켜야 할지 잘 모르겠다. 차이와 차별의 경계선이 어딘지 모르겠다. 경계가 애매하다고 양 극이 없는 것은 아닐 테니, 중간 어디에 멈춰 서야 할 텐데 말이다. 무슨 책에서 그랬었다. 차별이 아닌 것은 차이에 대한 무조건적 환대라고. 그렇지만 내 취향과 가치에 대한 확신이 있다면 그것과 상반되는 것에 대한 불호 또한 있어야 하지 않나?


애라, 모르겠다


그래서, 나는 결심했다. 나는 한동안 가식을 좀 떨어야겠다. 내 취향과 가치를 정립하고, 그것과 타인의 것의 차이를 이해하되, 차별하지 않는 법을 좀 알게 될 때까지, 나는 타인의 것에 대해 호의를 가식해 볼 생각이다. 호의를 가식하느라, 나는 타인의 것에 한번 더 눈길을 주고, 좀 더 찬찬이 들여다보게 될 것이다. 그러다, 간간이 공감하고, 얼껼에 마음을 열고, 어느새 좋아하게 될지도 모르지 않은가, 자세히 보면 예쁘다고. 차이와 차별의 경계는, 차이를 보고 고개를 돌릴 때 만들어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더불어, 타인의 것을 들여다보려는 동안, 나는 지속적으로 나의 편협함을 자각할 테고, 그래서 더 자주 경계하게 될 테고, 그 과정에서 나는, 타인의 취향과 가치에 대한 편협한 진심을 좀 걷어낼 수 있을지 모른다. 그 덕에, 내가, 취향을 넘어 신체적, 문화적, 계급적 차이를 대할 때도 적절한 균형감을 유지할 수 있도록 단련이 된다면 더 좋겠고.  


퀴퀴한 구정물 색 그림 하나를 두고, 생각이 너무 멀리 갔다. 고지식하고 심각한 게 내 본색 인가 보지. 남편은 이런 날 두고, FM이라고 '비하'하며 본인의 '편협함'을 고스란히 드러낸 바 있다. 성숙은 개나 줘버려의 그 남편이시다. 하하. 그러나 그의 조언도 일리 있으니, 이쯤에서 생각은 좀 털자. 좀 있다가 화실 가면 내 것과 다른 아름다운 그림들에게 고운 눈길을 한번 죽 돌려 봐야겠다. 아주 가식적으로.




pn. 내 회화 취향에 대해 쓰다 보니, 단정 짓기 정말 어렵다 싶다. '구정물 톤'에 들지 않는 선망의 작가들이 너무 많다. 작품으로 치면 더 많고. 얼마 전 오치균 최근작 앞에서 멈춰 섰던 적이 있었는데, 그게 이거다. 오치균은 탄광촌 연작들과 뉴욕의 눈진창 그림들, 그러니까 내 식으로 치자면, 구정물 색 감성의 그림들 때문에 팬이 되었었는데, 그의 최근 색감의 변절(?) 또한 감동이다. 에휴, 아마 나는, 이 어젠다에 대해 한동안 입 다무는 게 상책.


서울미술관 '봄여름가을겨울을 걷다' 전시에 오치균 작이 꽤 나와 있다. (근데 이 사진 어디서 났더라...레퍼런스 확인 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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