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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위밍 Nov 08. 2022

죄책감과 불만족의 바다에서 나를 지키기

대학원생... 원래 이런 건가요

요즘따라 부쩍 어느 것 하나도 제대로 해내지 못하고 있다는 기분에 사로잡힐 때가 많다. 공부를 안 하면 "관광대국" 태국에 사는 이점을 누리며 매주 놀러 다니기라도 해야 할 텐데, 공부를 잘하고 있는 것 같지도 않고, 그렇다고 태국 문화를 마음껏 경험하고 있는 것 같지도 않다. 태국어는 석 달째 제자리걸음이고 태국인 친구를 사귈 기회도 만들지 못하고 있다. 한국에서도 사교활동에 전혀 관심이 없었는데 태국에 왔다고 나라는 인간이 갑자기 바뀔 리가 있나... 내가 조금 더 활발한 사람이었다면 학교 체육관이나 자주 가는 식당에서도 얼마든지 서툰 태국어로 넉살 좋게 말을 건네고 친구를 만들 수 있었겠지? 하. 이렇게 생각하니까 갑자기 눈물이 날 것 같고 내가 똥멍청이 같다는 자기혐오의 거대한 수레바퀴 속으로 빨려 들어갈 것 같다. 하지만 이겨내야지. 


놀면서도 마음 한켠엔 과제와 리딩이 신경 쓰이기 때문에 죄책감이 있고, 설탕이 많이 들어간 태국의 달달~한 음식과 음료를 매일 먹으면서 죄책감을 느끼고(근데 또 안 먹기엔 입이 심심하다우), 주말이 끝나갈 때쯤엔 방콕 시내나 타 지역으로 짧은 여행이라도 다녀오지 못한 게으름을 탓하며 또 죄책감을 느낀다(근데 정말 과제하기도 바쁘다구...). 불만족스러운 것도 많다. 내가 다니는 학과는 개설된 지 5년 정도 됐는데, 협동과정의 특수성과 아직 역사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는 점 때문에 학과 운영이나 강의 구성에 허술한 지점이 자꾸 보인다. 석사과정에서 한 학기에 2학점짜리 수업을 여섯 과목이나 들어야 하는 것, 그중 두 과목 정도는 '이게 뭐지?'싶은 생각이 들게 할 정도로 당황스러운 수업 구성이라는 것, (한국도 마찬가지이긴 하겠지만) 교수님들 중 두어 분은 수업에 지장이 있을 정도로 영어가 능숙하지 않다는 것도.


이런 얘기를 유학 경험이 있는 언니들, 그리고 현재 유학 중인 친구들과 나누는 도중에 문득 한 가지를 깨달았는데, 바로 그건 내가 어느 곳에서든 만족을 모르는 인간이라는 것이다. 만족감을 잘 느끼는 것이 인생을 행복하게 만들어준다는 걸 알지만, 나는 누구보다 빠르게 남들과는 다르게 '구린 구석'을 잘 찾아내곤 했다. 달리 말하면 개선할 부분을 잘 발견하는 것이기 때문에 회사생활에서 장점으로 작용하기도 했다. 높은 기준을 세우고 그것을 맞추려고 나를 갈아 넣은 덕분에 인정을 받을 때도 있었다. 하지만 정신건강엔 좋지 않다. 한 5년 전쯤부터 그걸 인지하고 있었지만 스트레스 상황이 되자 또 나의 본성이 나왔다! 게으른 완벽주의자, 그게 바로 나야 나. 'All or Nothing'만 있다. 열개 중에 한 두 가지만 마음에 안 들어도 '전부 별로'인 걸로 인식해버린다. 나 자신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아니 더 혹독하다. 한두 가지만 잘 못해도 '엉망진창'이라고 판사봉을 땅땅땅 쳐버린다. 


어쩌면 종교적인 의미에서의 '감사함'이 부족했던 걸까? 한두 개의 불만족스러운 면을 파고들 것이 아니라 여러 개의 만족스러운 것들에 집중해야 한다. 저렴한 물가 덕분에 돈 걱정 없이 먹고 싶은 것, 맛있는 음식을 마음껏 먹을 수 있다. 등록금만 따졌을 때 (장학금을 받았기 때문에) 다른 영미권 학교의 1/10 비용으로 석사를 하고 있는 것도 큰 장점이다. 줄어가는 잔고를 보며 '빨리 일 해야겠다'라고 조바심을 느끼는 것만큼 정신건강에 해로운 것도 없는데, 아직은 돈 걱정을 하고 있지는 않으니 그것도 좋은 점이다. 학과 동기들 모두에게 영어가 모국어가 아니기 때문에 수업시간에 별생각 없이 의견을 말할 수 있는 것도 내게는 큰 발전이다. 업무에서 영어를 10년 동안 썼는데도 울렁증이 있었는데(완벽하지 않다는 강박 탓), 여기 와서 다양한 악센트로 말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내 영어 울렁증이 나았다. 저렴한 비용으로 인생에 없던 PT를, 아무리 피곤하고 바빠도 매주 2회씩 하고 있는 나 자신이 너무나 대견하다! 그리고 진짜 별거 아니긴 한데 집에서 망고랑 드래곤 프룻을 후식으로 먹을 때 진심으로 만족의 극치를 느낀다.(망고만 양껏 먹어도 본전 뽑지 않을까...?)


지난 3주 정도를 몰아치는 텀페이퍼와 과제로 정신없이 보내다가 오늘 모처럼 여유 있는 하루를 보내고 있다. 여유가 있다고 해도 놀 수 있는 건 아니고 텀페이퍼 주제를 정하기 위해 논문을 좀 보고 있는데, '써야만 하는 것'과 '읽어야만 하는 것'들 사이에서 오래간만에 내가 좋아하는 주제의 논문을 검색하고 있으니 그것만으로도 기분이 조금 좋아졌다. 아, 맞아, 내가 이런 걸 좋아했지! 내가 이런 걸 공부하고 싶어서 여기 온 거지! 아직은 내 흥미가 떨어지지 않았다는 것에 안도감이 든다. 그냥 조금 피곤했던 것뿐이고, 아직 내게 재밌는 것들이 많구나! '재밌다', '흥미롭다'는 이 감정이 너무 소중해서 유리구슬 같은 곳에다 봉인해두고 싶을 정도다. 


죄책감과 불만족의 바다에서 나를 지키는 방법은 내가 좋아하는 것을 잊지 않는 것, 그래서 나를 잃지 않는 것 아닐까? 못해낸 것보다는 해낸 것에 집중하고, 불만족스러운 것들 가운데에서 나를 충만하게 채우는 것들을 매분 매초 느끼며 살아가다 보면 또 어느새 모든 게 괜찮아지지 않을까? 만족의 역치를 낮추는 것이 대행복시대를 여는 비밀의 열쇠가 아닐까라는 생각을 하며 나는 이제 다시 논문을 찾으러 가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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