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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즐란 Aug 10. 2024

90을 바라보는 친정부모님의 부부싸움

누구나 친정부모님에 대한 재미난 기억 하나쯤은 가지고 있을 것이다.

5년 전 소천하신 친정아버지는 가부장적이고 독불장군 같은 가장이었다.

반대로 친정엄마는 순종적이라  금방 지은 따뜻한 밥으로 아버지 식사를 책임지셨고 늙어서 제 몸 건사하기가 힘든  연세임에도 불구하고 늘 아버지 곁을 손발이 되어 모시고 살으셨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의 전화를 받았는데

"내일 너거 집에 기차 타고 갈 거니까 그리 알고 있어라 아무한테도 이야기하지 말고 특히 엄마한테는 절대 말하지 마라"

"예? 엄마하고 싸웠습니꺼?"

"그래 내 가출할끼다"

"알았습니더 오시이소 마중나가께예"

싸웠다는 소리에 두말 않고 기차 타는 방법을 알려드리고 기차역 대합실이 아닌 탑승장에서 내리실 호실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기차가 도착하고 문이 스르륵 열림과 동시에 열차계단 젤 아래칸에 서서  ㅇㅇ아!!! 하고 크게 내 이름을 부르시던 우리 아버지.

가출한 거 표시 낸다고 하늘색 가방하나 꼭 끌어안고 열심히 내 이름을 부르시던 그 모습을 보고 순간 웃음이 튀어나올 뻔했다.

도대체 어디를 봐서  부부싸움한 얼굴인가?

저 씩씩한 모습이?

구십을 바라보는 노인네가 부부싸움이 웬일인가 싶어 걱정만 잔뜩 끌어안고 있었는데

그 짧은 30분 기차 타고 오는 동안 친구도 만드셨던 우리 아버지,

그 뒤 007 첩보작전처럼 아버지 몰래 형제들과 통화질을 해대며 시시콜콜 상황을 알리고 집안이 발칵 뒤집어졌다.

엄마도 전화를 해서는

"영감쟁이 미쳤는갑다 그~가 어디라꼬 그기를 가노.

사위보기 창피하지도 않나!

당장 너그 아버지 보내라"

"고마 냅두소

엄마도 혼자 있으니까 좋제"

"그래 너~무 좋다

그래도 안된다 어서 보내라"

늘그막의 부부싸움으로 사위에게 창피한 것만 생각하곤 내내 아버지 보내라고 재촉하셨다.


마냥 순종적이던 엄마의 반란이 아버지에게는 무척이나 큰 충격으로 다가왔는지 부부싸움한 얘기는 입 꼭 다물고 일주일을 우리 집에서 지내셨지만 밥도 잘 못 드시고 사실 내 눈에는 지내시기보다는 버티고 계신 걸로 보였다.  

마당 이곳저곳 돌아다니시며  개는 무서워서 휘휘 손 저으며 "가까이 오지 마라"하며 내내 내 뒤만 쫄쫄 따라다니셨다.

엄마는 매일 전화해서 "아이고 혼자 있으니까 너무 좋다" 하시다간 전화를 끝낼 쯤엔" 니 고생한다 너그 아부지 빨리 보내라"며 속을 내비치던 엄마, 결국 일주일 후 오빠가 아버지를 모시러 오던 날

"너그 엄마하고 이 나이에 이혼은 못하고 따로 집구해서 살란다 니가 알아서 그리해라"

오빠는 "예 그라이소 지금 아파트 팔고 실버타운 두 개 구해서 살아보입시더"

그렇게 결정을 하고 오빠 손잡고 가시던 날 "니 이렇게 잘 사는 거 보니까 참 좋다" 하시던 우리 아부지,

" 예 다 아부지 덕분입니더 고맙습니다"

하고 대답했다.

항상 엄하기만 하셔서 자상 함이라곤 눈을 씻고 봐도 볼 수가 없었던 부모님이는데 따뜻한 말 한마디에 눈물이 핑 돌며 어느새 주름 자글한 얼굴에 구부정한 어깨가 잎떨어진 겨울나무처럼  추워보였다.

그렇게 집으로 돌아가신 뒤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 아무 일 없이 두 분이 지내시다 94세가  되신 어느 날 아버지는 갑자기 삼일을 못 먹고 누워계시다 집에서 자는 잠에 그대로 돌아가셨으니 우리 딸들은 참 복 많은 아버지였다고 늘 얘기하곤 한다.

어린 시절은 어린 시절대로 아버지가 무서워서 찍소리 한번 못하고 지냈던 큼큼한 시절이었다면

늙은 부모의 부부싸움 덕분에 아버지와 함께했던 그 일주일은 유쾌한 에피소드가 되어 지금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내겐 가끔씩 꺼내보는 아주 순수하고 고귀한 추억의 시간이 되어버렸다.


아부지 그래도 나는 그 모습에 늘 웃는답니다.

사실 그 모습을 영영 잊을 수가 없답니다.

오늘도 해는 저 붉은 노을을 예쁘게 남기고 멀어져 가는데 죽은 사람은 아무것도 볼 수가 없으니

때로는 별것 아닌 것들이 더 그리운가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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