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어떤 것을 떠올리느냐에 따라 그것이 '현재'가 된다. 라는 원형적인 형태로 인식하기 시작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삶을 대중적인 선형적인 시간인식의 흐름에서 벗어나
내가 선택하고 싶은
시간의 방식으로 인식하기 시작한 것은
엄청나게 많은 변화의 흐름을 인생에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나는 알 수 없는 소문으로3년을 매일 혼란 속에서 살았었다.
이름 모르는 처음보는 사람들이 지나갈 때마다
나를 보며 수근수근 대던 학창생활.
나는 그 힘들고 알 수 없는 상황을 못 견뎌 세상을 등질 생각으로 밤을 지새곤 했었다.
연예인도 아닌데 매일 악플에 시달리는 연예인이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 3년의 후유증은 그 시간이 끝난 뒤에도 이어질 수 밖에 없었고 그렇게 대략 7년 동안은 아픈 시간 동안 습관이 되어버린 부정적인 생각들에서 벗어나기 위해 더 부단히 열심히 살려고 노력했었다.
그때의 강박증과 사람들에 대한 거부감은 나의 기본 Defalt 상태였다.
그런 내가
집에 혼자 갑자기 가만히 있어도 편안한 상태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처음 느끼기 시작한 것은
세상을 원형적으로 인식한 이후부터였다.
"아니..이렇게 가만히 집에 있는 것이 이렇게 편안할 수 있구나"
나는 단 한번도 혼자 가만히 있을 때 편안함을 느낀 적이 없었던 것 같았다. 힘들었던 시간 동안 나의 마음에는 휴식의 공간이 없었다.
가만히 있으면 안될 것만 같은 강박증과 지나가는 사람들이 수근거릴 것만 같은 불안증세를 거부하기 위해 매 순간 올라오는 모든 감정의 느낌을 차갑게 저항했다. 그렇게 점점 살기 위해 소시오패스가 되었었다.
하지만 세상을 선형적인 것에서 원형의 구 형태로 인식하는 방법을 얻은 이후, 이 모든 나의 증세가 없어졌고
본래의 내 모습으로 극적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선으로 이어지는 모습으로 시간을 인식하는 사람들은
이미 지나간 '과거'와 아직 이어지지않은 선 '미래'를
동시에 만들어낸다. 이들에겐 그래서
그 과거가 이미 지나온 선이기에
'돌이킬 수 없는, 바꿀 수 없는' 것이 된다.
인생의 많은 부분들이 이렇게 '다시 갈 수 없는'의 느낌으로 다가오고 '통제불가능한' 느낌을 자주 받게 된다.
그에 반면
시간을 원형으로 인식하는 사람들은
과거와 미래는 내가 인식하고 싶을 때에만 선택할 수 있는 옵션의 개념이다.
마치 지구의 땅 위(현재)에서 살아가는 사람이 하늘을 가끔 올려다보고 달(과거/미래)을 더 자세히 들여다보며 그 달을 생생히 인식하는 것처럼 말이다.
이 둘 중에서 원형적인 형태로 세상을 인식하게 되고나서는
'과거라는 것은 지나간 것이 아니라, 선택하는 것이다'
를 알게된다.
현재를 가진 것은 '나'이며 결국 내가 '시간'을 꾸며가는 모든 힘을 가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자연스러워진다.
이미 지나온 과거들이 아니라
내가 떠올리지 않아도 괜찮은 존재하지 않는 시간이 되었다.
왜냐하면 지금 나의 피부에 와닿는 것만이 진짜이며 현실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세상을 원형적으로 인식하게 된 후
나는 다음과 같은 변화를 겪었다.
첫째, 불필요했던 부정적인 생각, 조급, 강박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마치 나의 신체 사이즈에 어긋난 잘못된 옷을 입으며 살아가면서 그것이 잘못된 건지도 모르는 채 살아온듯했다. 그럴만도한게 나의 주변 환경과 사람들 또한 나와 같이 '빨리 빨리'를 중요시했기 때문이다. 물론 그와 달리 '천천히'와 본연의 행복를 이미 찾아 떠난 지인들을 만나면 나는 그들이 낯설어보였다. 또한 그들의 새로운 일과 나에게 전해주는 이야기에 관심이 가지않았다.
왜냐하면 나의 세상을 관찰하는 크기가 그들보다 작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느 순간 이 시간의 흐름을 인식하는 방법이 매우 잘못되었으며 이 모든 것이 인간 사회의 어느 시점에서 갑자기 시작된 문화일 뿐임을 깨달았다.
즉, 과거-현재-미래는 그저 인간 사회의 어느 시점에서 갑자기 발생된 사회적 관념에 속해있을 뿐,
실제로 세상이 돌아가는 방식은 선형적인 것과는 전혀 무관하다는 것을 알았다.
이것을 알게된 것은 양자물리학에 대해 초집중을 하게되었을 때였다. 물리학에 관련된 책을 우연히 접하면서 원자와 관련된 과학적인 이야기를 더 흥미롭게 본 뒤부터였다. 그에 이어 무의식과 의식에 관한 서적을 보았는데, 마치 그 책 속의 작가들이
내가 앞서 흥미롭게 본 양자물리학 책의 작가들과 대화를 하는 듯 서로 아주 긴밀하게 연결되있음도 알게 되었다.
(설명이 더 길어질 것 같아 생략)
그렇게 읽은 내용을 토대로 알게 된 세상을 인식하는 방법의 본질, 내가 선택한 본질은
<관찰> 이었다.
즉, 내가 이 순간 관찰하기로 의도한 것이
곧 나의 현재가 된다.
(*앞서 서론에서 말한 내용을 좀 더 세부적으로 말해보겠다)
내가 과거를 인식하지 않기로 결정하면 나의 인생에 과거는 없다.
대신 내가 관찰하기로 결정한 기억 속에 남아있는 그 상황과 사람, 말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것은 다시 나의 현재가 된다.
내가 지금 이 순간 일주일 전의 누군가와 나눈 대화를 머릿 속에서 관찰하고 있다면 그것이
일주일 전이었다한들 나의 현재를 이루게 된다는 이야기이다.
시간과 성과, 결과물들은 흘러가는 선 위가 아니라
내면에서 집중하고자 하는 '인식의 영역'안에 속해 있다.
이 말은 나의 인식이 모든 것이며
외부에서 떠드는 이야기들은 그들 만의 세상에 속한 이야기 일 뿐, 내가 인식하지 않으면 결코 그 어떠한 의미도 없음이다.
모든 세상의 힘은 내가 이 순간 어떤 것을 머릿 속에서 관찰하느냐에 모두 달려있음을,
그렇기에 내면에서 나는 무엇이든 나에 의해 기준을 세우고
이 세상을 나에 의해서 인식하는 것이
가장 정확하게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임을 알게 되었다.
그렇기에 행복과 성공을 얻기 위해 조급하게
/남들보다 빠르게/
/트렌드를 누구보다 잘 아는/
/남들보다 돈이 월등히 많은/
/누구나 다 아는 이름의 명예를 얻는/
것이 모두 나에겐 허상이었음도 알게 되었다.
왜냐하면 '나'라는 세계에서는
'남들보다 나은'이 중요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지구라는 '현재'에 살면서
'달(나와 다른 존재)'의 기준으로 세상을 인식했던 것이다.
시간의 흐름이 제한적으로 느껴졌던 것 또한
한국사회에서 태어나 내가 습득한 지식이 만든 '감정'이었다.
그 조급함은
나에게 세상을 인식할 수 있는 선택권이 없다고 느끼며 세상을 살아왔기에 가지게 된 것이었다.
세상을 인식하는 선택권은 그 어디에도 없다.
오직 내 안에 존재한다.
둘째, 물질중심주의와 정서가 비어있는 '무정서' 상태에서 삶의 본질과 행복과 가까운 영혼과 충만한 정서 상태로의 변화.
선형적으로 인식한다는 뜻은
인생을 대부분의 요소들을
유한한 자원으로 인식하기 쉽다는 뜻이다.
그래서 내면에 존재하는 사랑, 즐거움, 기쁨, 긍정과 같이 무한한 자원들도 물질과 같이 유한한 것처럼 인식하기 쉽다.
시간이 선처럼 점점 짧아지고 부족해지다고 느끼기에
주변의 가까운 이들에게도 관심을 주는 것이 나에게 손해를 주는 듯한 느낌을 준다.
그래서 대부분 물질적인 것들을 중요시하는 사람들은
가까운 가족이나 친구의 일상에 굉장히 무관심하다
혹은 그들의 일상에 관심이 있다하더라도 그것이 나에게 '필요'를 충족하기 때문에 관심이 가는 것이지
진짜로 그것이 순수하게 궁금해서 관심이 가는 경우는 적다는 것이다.
이런 무정서의 상태는 당연히 그 사람의 내면을 공허하고 점점 피폐하게 만든다.
한때 나도 이런 상태로 사람들을 대했던 사람으로서 많이 반성한다. 물론 오로지 나의 책임이라기엔 나의 부모님도 이런 경향이 있었다. 그리고 이런 성향은 나의 가족 뿐 아니라 한국에서 특히 짙게 나타난다. 어떤 상황에서도 학교, 학원, 회사를 가야만 하는 문화만 봐도 여실히 드러난다.
원형적으로 세상을 인식한 이후
나는 주변의 모든 환경, 사람, 동물, 자연들을
나와 같은 존재로 인식할 수 밖에 없게 되었다.
과거와 미래의 중요성이 사라졌기 때문에
평온하게 모든 나의 주변 요소를 사랑으로 인식하기도 쉬워진다.
나의 현재를 이루는 모든 것이 그러한 느낌으로 충만해진다.
내가 하는 일부터 대화하는 친구와 레스토랑 직원들까지
오롯이 이 순간에 나와 함께하는 모든 이들은
나의 유일한 시간 '현재'라는 원 안에 들어온 이들이다.
이런 관점이 매일
꾸준히 이어지고 이어진다면 어떻게 될까?
양자물리학과 과학책을 자주 접한 뒤로는 이 모든 것이 단순히 좋은 이야기가 아니라 실제 사실인 것임을 더 체감하였다.
내가 누군가에게 친절하기로 마음먹을 때, 어느날부터인가 나에게 친절한 일들이 많이 일어나기 시작하는 것을 이 글을 읽는 여러분들도 가끔 느꼈으리라 생각한다.
이런 현상이 결코 우연이 아니라는 말이다.
오늘은 문득 내가 살아오면서
내가 가지고 있는 행복들에 감사함을 느끼게 되며
이런 무겁다면 무거운 이야기를 적어보았다.
엊그제 나는
뒤에서 나를 보고 수근대던 학교 동기들이
갑자기 친절하게 나에게 친구처럼 대해주는 꿈을 꾸었다.
꿈이었지만 생생했고 마음 속 깊은 무언가가
치유가 된 느낌이었다
만약 그때의 내가 그저 유일하게 존재하는 '지금'의 가치를 깨닫고 그때의 나에게 더 사랑을 주는 방법을 공부했다면 주변의 상황을 과거에 두려고 잊으려고 저항하지않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