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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건축사 K Apr 24. 2024

배려를 당연하게 요구하는 사회

배려나 양해를 당당하게 요구하는 것이 맞는 걸까?

배려는 상호 간에 함께 가져야 할 덕목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함께 가져야 할 덕목이 어느 순간부터 일방적으로 강요받는 사회가 돼버렸다.



ª 배려를 당연하게 요구하는 게 맞는 걸까?


 며칠 전 현장을 다녀오는 길에 갑자기 내 차선으로 차량이 급하게 끼어들어와서 사고가 날 뻔한 적이 있다. 슬슬 우회전해야겠다며 우측 차선을 봐둔 상황이라 본능적으로 반대 차선으로 운전대를 돌려 다행히 사고는 막았지만 아무렇지 않은 듯 가고 있는 차가 멀어지기를 멍하니 쳐다보다 등짝에는 떡하니 초보운전이 붙어 있는  것을 보고 차 안에서 한숨을 한번 푹 쉬고 가던 길을 갔다.


 차를 운전하다 보면 차후면에 초보 운전을 붙여놓는 경우를 종종 본다. 언제부터였는지 모르겠다. 아이가 타고 있어요라는 스티커를 보면 `사고가 나면 뒷좌석에 아이가 있겠구나 그러면 아이부터 구하고 부모를 구하자` 라면서 혼자 상상을 할 때가 있지만 초보 운전 스티커는 조금 다르게 느껴진다.  '면허를 딴지 얼마 안 됐구나, 미리 조심해야겠다'라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들면서 방어운전을 위해 신경이 곤두세워지는데 가끔 의구심이 들 때가 있다.


 마치 통조림이나 뜨거운 음식 등 미리 조심하라고 경고문을 붙여놓은 것처럼 사용자를 위해서 조심하라고 붙여놨다기보다는 그로 인해 문제가 발생하면 미리 경고했기에 책임을 회피하는 것으로 밖에 안 보인다. "초보라고 붙여놨잖아요. 그럼 당연히 조심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 운전은 그러지 않아도 조심하면서 하는 게 맞는 것이지 초보라고 해서 뭔가 권리라고 된 것처럼 행동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오히려 문제를 일으켜 죄송한 마음을 가져야 하는 게 아닐까?


처음부터 그렇게 느꼈던 것은 아니다. 물론 내 마음의 여유가 없어서 그렇게 느꼈을 수도 있겠지만 웃으면서 넘어갈 일들이 자꾸 쌓이다 보니 상호 배려가 아니라 일방적으로 배려를 강요받는 기분이 자꾸 들었다. 운전만 그런 것이 아니다.



ª 건축 현장을 감독하다 보면 발생하는 요구사항들


 건축 현장도 마찬가지다. 현장은 현장마다 매번 개별적인 사항이기에 모든 게 처음부터 다시 시작이다. 이전에 사고가 발생하지 않았다고 해서 이번에 발생하지 않는다고 확신할 수 없다. 그렇기에 서로 크로스체크하여 예방하라고 법적으로도 역할을 다분화시켜놓은 것이다. 각자의 역할을 충실히 하면 사고는 줄어들게 되어있다. 그럼에도 예기치 않게 발생하는 게 현장이다. 그럴 때에는 상호 협력이 더없이 중요하기에 내가 할 수 있는 한에서 어떻게든 현장의 상황을 이해하고 해결해 주려고 노력한다. 이런 상황에서 양해는 어느 정도 수긍이 된다.


 그런데 그와 별개로 처음부터 양해를 구할 때가 있다. 감독(감리)을 하기 위해 현장을 방문하면 미리 협의는 되지 않은 채 설계 도서와 현장이 상이한 부분을 보면 솔직히 두렵기까지 한다. '하.. 또 이걸 지적하면 어떤 반응이 나올까' 벌써부터 예상되는 변명들이 머릿속을 지나간다. 물론 나보다 현장의 경험을 훨씬 더 많이 가졌기에 그들의 말을 무조건 적으로 반박하고 싶지는 않지만 사전에 협의하지 않고 임의대로 도서와 달리 시공했다는 점에서 비판하고 싶은 것이다. 게다가 왜 이렇게 시공했냐고 물으면 납득이 될만한 이유를 말하는 게 아니라 앓는 소리를 하기 시작한다. 아시겠지만...이라는 말을 시작으로


"아시겠지만 여기는 도면처럼 안 넣어도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았다"

"아시겠지만 건축주한테 공사를 따내려면 견적을 초반에 낮게 잡기 때문에 이것까지 공사를 하게 되면 저희는 남는 게 없다"

"아시겠지만 관례적으로다가 그렇게 해왔는데 김건축사처럼 이걸 지적하는 사람은 처음 봤다"

"이런 건 좀 양해를 부탁한다." 등등


 공사가 문제없이 중간정도를 온 상황에서 구하는 게 아니라 말 그대로 첫 삽을 뜨자마자 양해를 구한다는 게 솔직히 화가 난다. 게다가 경제성이나 시공성 등을 고려해서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면서 사전에 양해를 구하는 게 아니라 해당 공정을 임의대로 하지 않으면서 현장에서 즉각적으로 답을 주기를 바라기에... (누가 보면 화를 못 참는 성격으로 보일 것 같지만.. 현장을 가면 웃고 오는 경우가 정말 적다..)


 여기에는 심리적인 요소가 다분하다고 생각되는데 미리 협의를 하게 되면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이 어느 정도 주어지기에 적절한 조치가 무엇인지를 검토할 수 있고 올바른 방향으로 갈 수 있지만 현장에서 지적하게 되면 다음 공정(공사)을 할 수가 없어서 여기저기서 곡소리가 나는 것을 참아내면서 즉각적으로 답을 줘야 하는 압박이 들어온다.  건축주와 시공자는 공사가 미루어지면서, 지적한 부분을 재시공하게 되면서 발생하는 비용 등을 예로 들면서 사람의 감정을 건든다.  법적 권한으로 문제가 있을 경우에는 공사를 중지할 수 있게 되어 있지만 사람이 하는 일이기에 기계처럼 칼 같이 하는 것은 오히려 좋은 것만은 아니라고 생각하기에 주저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온다. 즉 상대방을 배려해 주려다가 오히려 그들의 손아귀에 내가 놀아나는 경우가 아닐까?


ª 신뢰 없이 요구하는 양해는 더없이 철저한 감독자를 만들어낸다.


 지금 네 개의 현장을 감리를 하고 있는데 (비상주 감리로써 현장에 상주하여 감리를 보는 것이 아니다) 제대로 진행되고 있다고 느끼는 현장은 하나뿐이다. 시공하시는 분이 얼마나 심혈을 기울여 시공하고 계시는지 느껴질 정도이고 지적을 하더라도 실수로 놓친 것이라 보이는 부분들 그리고 지적사항에 대해서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적극적으로 조치를 취하려는 모습들에서 매번 감사함을 느낀다. 다른 현장에서 받은 스트레스를 이 현장을 방문하여 위로받는다.

 

 첫 미팅을 하고 나서 일을 하다 보면 간혹 이렇게 말하는 분들이 계신다. "건축사님이 깐깐하신 분이라서 저희가 더 문제없이 진행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기분 좋게 해 주시려고 하신 말씀 같지만 말은 그렇게 하면서 현장은 그러지 못할 때가 있고 마치 그 노력으로 지적받은 것은 좀 양해해 주십시오라고 말을 더할 때면 일에 대한 열정도 그 사람에 대한 신뢰도 증발해 버린다. 그리고 나는 기계가 된다.


  



 생각해 보면 건축사라는 역할이 과분할 때가 많다. 내가 알면 얼마나 더 안다고 그런 판단을 내리는 건지 자문할 때가 많다. 그렇기에 신뢰가 쌓인 시공자분들에게는 오히려 시공에 대한 물음을 많이 할 때가 많다. 비슷한 지적이 계속 나온다는 것은 현장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 설계라고 볼 수 있기 때문에 현장을 이해하려고 노력한다. 그런데 그런 신뢰를 쌓는 것이 왜 이리 어려운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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