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함을 만들어내는 것은 결핍에 대한 과잉반응, 과대해석이다.
처음으로 나에게 무엇인가를 가지고 싶다는 마음을 일으켰던 물건은 '미미의 집' 이었다. 대여섯살의 여자 아이에게 '미미인형'과 '쥬쥬인형'은 유일하지만 최고의 장난감이었다. 당시 나는 몇 개의 인형을 가지고 있었고, 그 중에는 미미의 남자친구도 있었다.
매일 인형으로만 하는 인형놀이가 질려서였을까, 텔레비전 광고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내집마련에 대한 본능적인 욕구였을까- 무엇 때문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언제부턴가 나는 '미미의 집'이 갖고 싶었다. 그냥 갖고 싶었던 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내가 기억하는 한) 엄마에게 사달라고 요구한 최초의 물건이다.
"엄마 나 미미의 집 사줘"
엄마의 정확한 대답은 기억나지 않지만, 곤란함 뒤에 감춰진 미안한 표정을 지었던 기억은 또렷하다. 당시 아빠는 이제 막 서울에서 자리를 잡기 시작할 시점이라, 빠듯한 생활비로 꽤나 고가의 장난감을 엄마가 마음대로 덜컥 사주기에는 빠듯한 형편이었던 것 같다.
내가 미미의 집을 요구한 그로부터 며칠 뒤, 엄마가 내게 조심스레 무언가를 건넸다. 아빠가 선물로 받은 나무로 된 와인기프트박스였다. 박스를 열어보니, 와인을 보호하기 위해 있는 금색 새틴 천을 바닥에서 띄워, 박스 테두리에 고정해놓은 것 같았다. 엄마는 물었다.
"이걸 인형침대로 해서 갖고 놀면 안될까?"
하지만 대여섯살 여자애에게 생긴 '첫 소유욕'은 그렇게 쉽게 꺾이지 않았다. 가내수공업으로 엄마가 만든 '미미의 침대'를 보자마자 실망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내 미미에게는 더 크고 넓은 '집'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나는 그 실망감을 엄마에게 감추지 않았고, 사달라는 요구를 꺾지 않았다. 며칠 뒤 결국 엄마는 미미의 집을 사주었다.
그 때 엄마가 사준 미미의 집이 어떻게 생겼는지 잘 기억도 나지 않는다. 하지만 '엄마표 미미의 침대'의 형상은 선명하게 기억난다. 마침내 '미미의 집'을 가지게 되었을 때의 감정도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엄마표 미미의 침대'를 보았을 때의 실망감은 기억난다.
하지만 가장 또렷하게 기억하는 것은, 처음 인형의 집을 사달라고 했었을 때 엄마의 곤란한 표정, 엄마표 '미미의 침대'를 내게 건넸을 때의 미안한 표정, 그리고 내가 다시한번 졸랐을 때의 엄마의 체념한 표정, 그리고 찰나에 그 표정을 본 어린 내가 가진 죄스러운 감정이다. 이 잔상은 이제 그 때의 내 나이보다 더 큰 딸을 키운 지금까지도 생생하다.
왜 이 경험이 나에게 이토록 각인되어 있는가를 최근에 들어서 곰곰히 생각해보았다. 과연 어렸을 때, 내가 갖고 싶은걸 못가진 게 이거 하나뿐이었을까? 내가 영영 '미미의 집' 을 못가졌더라도 이 기억이 이렇게 나에게 잔상으로 남아있을까?
사람의 내면에 어떤 사건이 깊게 각인되는 이유는 '사실'이 아니라, 그 때 가졌던 '감정' 때문이다.
부모가 사주고 못사주고, 내가 갖고 못갖고와 같은 '사실'이 아닌, 마음대로 사주지 못하는 사실을 '미안한 일'로 규정하여 자식에게 내비췄던 미안한 감정, 그리고 그런 엄마를 보며 내가 가졌던 스스로에 대한 자괴감. 결국 인간의 내면에 정신적인 흔적과 잠재된 인상을 만들어내는 것은, 사실이 아닌 사실에 대한 '반응'과 '해석'이다.
10여년 전쯤 다녔던 매체사는 여성 성비가 압도적이었다. 당연히 워킹맘도 많았다. 그 중에서 아이 둘을 낳고, 육아휴직까지 다 썼던 나보다 대략 15살 많은 선배가 있었다. 당시 결혼도 하지 않았던 20대 중반의 나는 그냥 막연히 워킹맘은 고달프다라는 인식이 있었다. 어느날 그 선배랑 밥을 먹고 나는, 회사와 육아 병행하는게 힘들지 않냐고, 아이들은 힘들어하지 않냐고 물어보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주제넘은 질문이었다) 선배는 1초의 망설임도 없이, 아주 심플하게 이렇게 말했다.
"응 그냥 우리 애들은 일하는 엄마 밑에서 클 운명이다~ 라고 생각하면 돼~!"
그 대답을 듣고 한대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아 그냥 사실을 사실로 받아들이면 되는거구나. 그 사실에 대해 개인적인 의미와 해석을 갖다 붙힐 필요 없는 거구나. 정말 산뜻하다. 나도 나중에 언젠가 엄마가 되면 저런 태도를 가져야지. 그렇게 다짐했었다.
개인적으로 나는 결핍 그 자체를 부정적으로 바라보지 않는다. 삶에 결핍이 없으면 동력도 없다. 모든게 다 정해진대로, 하고싶은 대로만 흘러가는 삶이 얼마나 시시하고 재미없을까? 결핍은 결함이 아니다. 결핍은 오히려 삶에 활동성을 부여한다. 내 인생책 로버트 맥기의 '시나리오 어떻게 쓸것인가' 에도 이런 구절이 나온다.
간극이 곧 동력이다.
자석의 극과 극을 오가면서 전기가 활동성을 얻는 것처럼 인생 또한 자아와 외부 현실 사이의 간극을 넘나드는 과정을 통해 활력을 얻게 된다. 순간순간 발생하는 이 에너지가 바로 작가가 이야기를 추진해나가고 그 결과 관객을 감동시키는 동력인 것이다.
모든 것이 과잉인 시대이다. 적은 것은 죄악시된다. 모두가 이런 '결핍 공포증'에 걸리다보니, 급기야 '결핍된 상태로 살바에야 차라리 없는 것이 않는 것이 낫다' 는 반출생주의가 많은 지지를 얻기도 한다.
하지만 인간에게 애초에 '완전함' 이라는 것이 존재할까? 아니, 인간에게 '완전함' 이라는 것이 중요한가? 애초에 뭔가 목적이 있어서 태어난 것이 아닌, 어느 날 세상에 던져진 우리는, 어떤 부분은 부족한 채로, 어떤 부분은 채워진채로 살아가다 어느 날 죽는다. 결국 나의 실존은, 내가 소유한 것으로 규정되는 것이 아닌, 내가 처한 상황과 속에서, 매 순간 내가 선택하는 반응과 태도로 채워지는 것 아닐까?
“모든 것을 빼앗길 수 있어도, 마지막 하나—자신의 태도를 선택하는 자유는 빼앗을 수 없다.” – 빅터 프랭클, 『죽음의 수용소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