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노르키 Dec 29. 2023

지우지 않은 사진

사진첩을 정리하면서 남겨둔 사진이 있다. 


눈을 뜨니 새벽 3시 반. 어젯밤 10시쯤엔 아기에게 동화책을 읽어주다가 잠든 기억도 없이 잠들었다. 새벽에 잠이 깼다. 이불 위의 아기는 내가 뉘어놓았던 방향과는 거꾸로 누워 있다. 나는 뭐라도 써야 할 것 같아서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충전해 둔 핸드폰을 뺐다. 무슨 글을 쓸까? 무슨 사진을 글에 넣을까? 생각하다 사진첩에 들어갔다. 얼마 전 핸드폰 용량이 부족해져서 사진첩을 싹 정리했다. 그래서 남겨둔 사진은 30장 정도다. 우리 결혼식에 와주신 분들의 명단이 적힌 방명록, 지난여름 출산할 때 남편이 탯줄을 자르던 사진, 살이 토실토실 오른 우리 아기 사진, 그리고 지난해 겨울 친구와 전남 구례를 여행했던 사진이다. 


지난해 크리스마스이브, 구례는 온통 눈길이었다. "도대체 왜 여기 온 거예요?"  오일장은 문 여는 날인데도 추워서 문을 닫았고, 상인들은 시장 중앙에서 모닥불을 피워놓고 고구마 같은 간식을 구워 먹고 있었다.  


구례를 여행할 때 나는 임신 3개월쯤이었다. 어디로든 여행하고 싶었다. 미끄러운 눈길을 살금살금 운전하던 친구가 애먹었다. 나는 동생의 커다란 패딩을 대충 걸치고 다녔다. 사진첩을 거의 다 비우고 도 저 사진을 남겨둔 이유는, 내가 저곳에 있었다는 비현실적인 사실을 계속 확인하고 싶어서인 것 같다. 


올해 여름, 나는 첫아기를 만났다. 아기를 낳기 전까지 내 인생은 단순한 것들로 다채롭게 채워져 있었다. 일하고, 운동하고, 책 읽고, 여행하고, 영어공부하고, 사람들을 만나는 것이 내게는 숨 쉬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돌이켜보니 감사히도 나는 내가 원하던 만큼 충분히, 30대 중반까지 나 자신에게 집중하며 살았다. 그래서 아기를 낳은 뒤 옴짝달싹할 수 없이 집에서 아기를 돌봐야 하는 일상이 처음엔 낯설었고 당황스럽기도 했다. 


어찌 보면 출산은 비합리적인 결정이다. 나는 그런 비합리적이고 비효율적인 소망을 품었다. 나를 닮은 아기를 만나고 싶다...라는 강렬한 열망.


기저귀도 갈아주는 방법도 몰랐던 내겐 아직도 어려운 게 많다. ‘아기의 웃는 얼굴로 모든 울화가 씻겨나갔다….’는 부정확한 말이다. 울화가 100만큼 있다면, 아기의 웃음이 내게 주는 행복이 1,000이어서 울화의 농도가 희석될 뿐이다. 


다만 아기를 안을 때의 구름 같은 감촉과 솜사탕 같은 냄새, 가끔씩 정수리에서 나는 따끈따끈한 쥐포 냄새, 내게 다가와 다리를 감싸 안고 안아달라는 듯이 울먹이는 아기의 얼굴. “음머~” 소 울음소리를 내면 입을 삐쭉거리며 울려는 아기. 모든 모습이 사랑스럽고 영원히 간직하고 싶어 사진을 찍다 보면 또 핸드폰 용량이 꽉 차고 만다. 

매거진의 이전글 오랜만에 만난 친구와의 5시간 수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