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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현희 Mar 19. 2019

포도나무 길들이기

지난 주말 잠시 훈풍이 불었을 뿐, 봄방학이 끝나가는 오늘까지도 대기가 냉기를 품고 있는 것은 흔치 않은 행운이다.  대기는 정신을 상쾌하게 만드는 온도를 유지하고 가끔씩은 습기 머금은 바람이 멜랑콜리를 흩뿌리고 지나간다. 안개와 비로 적셔졌던 겨울을 막 빠져나온 대지는 촉촉하고 차가운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마당에서 시간을 보내기엔 최적의 조건이라, 체력의 한계를 느낄 때까지 소소한 일을 하면서 뒤마당에서 하루를 보낸다. 지쳐 들어와 샤워를 하고 에스프레소를 한잔 마시고 다리를 쭉 뻗을 때 카페인의 기운이 발끝까지 흘러간다. 오늘은 요기까지. “라며 흐뭇해하던 마음은 카페인의 취기에 거둬지고, 나는 슬그머니 뛰쳐나가 또다시 식물의 자리를 이리저리 바꾸어 앉힌다. 해가 완전히 진 후에야 실내로 들어와서는 문득 생각이 든다. 몸이 지쳐 쓰러질 때까지 내달리는 경향은 아무래도 문제가 있음이야.... 어린 시절에도 한 가지에 꽂히면 다른 것으로 주의 전환이 잘 안되는 성격이었지만, 젊은 시절에는 몰입의 가짓 수가 제한되어 있었다. 이쯤 살고 보니 일의 성격과 내용이 무엇이던 한번 시작을 하면 점점 더 저돌적이 되어간다. 세월과 맞바꾼 습성. 무엇을 하던 몸이 탈진을 할 때까지 돌진을 거듭하는 습성. 옳지 않아요....


밥 먹고 잠자는 시간 외에는 글을 쓰면서 지난 여름을 보냈고, 밥 먹고 잠자는 시간 외에는 그림을 그리면서 지난가을을 보냈다. 여름엔 구토가 나고 모니터가 완전히 흐릿해져 글씨를 분간할 수 없어질 때까지 글을 썼고, 가을엔 몸이 고꾸라지도록 새벽까지 이젤 앞에 앉아 있었다. 몸은 망가진 면역 체계로 대답을 해왔다. 신체의 동시다발적 기능 파산과 무력증에 망연자실한 마음은, 내일은 어떤 꼴을 보게 될지 몰라 오늘은 이만 항복 선언을 반복하며 겨울 한 철을 누워서 보냈다. 네 댓가지의 처방약과 부모님이 보내오신 보약이 효험을 보는 것인지. 어느덧 조심스레 움직이고 정상적인 활동을 하는 것이 가능해지는 것은 새삼 해방을 맛보는 기분이다.


방치해 두었던 포도나무엔 어느새 빨간 순이 돋아 났다. 드디어 가지를 양쪽으로 길게 늘인 T자 모양의 제대로 된 포도나무를 갖게 되었다. 3년 된 나무가 있고, 재작년에 세 그루를 더 심었는데 두 그루만 살아남았다. 한그루는 죽은 것이 확실하고 한 그루의 다른 종류는 아직까지 낮은 포복으로 엎드려 있다. 옮겨 심어 주어야 할 모양이다. 마음대로 자라난 가지들을 자르고 정리하여 양 옆으로 펼쳐 트렐리스에 고정시켜주었다. 2년 전엔 세 개의 트렐리스로 족했는데, 오늘은 트렐리스 두 개를 더 세워야 했다. 가지가 다치지 않게, 이미 돋아난 순이 부러지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작업을 하는 동안 작은 녀석은 커피를 뽑아 텀블러에 담아내다 주고, 포도가지를 고정시킬 왁스로 코팅이 된 스트링을 알맞은 길이로 잘라다 주었다. 그러고도 느릿느릿 내 옆을 맴돌며 엄마 또 뭘 도와드릴까요? 묻곤 했다.  응 이제 충분해 들어가서 너 할 일 해.라고 했을 때도 아쉬운 듯 마당을 한 바퀴 더 돌고는 내 머리에 챙모자를 푹 눌러 씌워주고는 들어갔다. 사랑이 넘치는 아들이다. 아이가 저러는 마음이 어떤 것인지 짐작이 된다. 어린 시절 방학 때는 늘 외가에서 지냈다. 할머니는 늘 집 안팎으로 분주히 움직이셨고, 나는 할머니가 힘드실까 봐 안절부절못하며 종종걸음으로 따라다니곤 했다. 할머니는 왜 그리 한사코 내가 아무것도 돕지 못하게 하셨는지 모를 일이다. 천천히 가르쳐 주시고 한번 해봐라 했더라면 그 시간에 대한 기억이 안타까움이 아니라 더 자랑스러운 것으로 남았을지 모르는데....

아이가 내미는 작은 정성들에 미소를 흘리며 또 그 옛날 할머니를 생각하며 포도나무 가지를 다듬는 동안에 가까운 새와 먼 새가 주고받는 노랫소리도 들렸다. 가까운 곳에서  분명한 곡조를 뽑는 또렷한 새소리가 들리면 약간의 시간을 두고 먼 숲 속에서 울리듯 아련한 새소리가 똑같은 리듬으로 대답하곤 했다. 두 마리의 새는 이렇게 주고받기를 꽤나 오랫동안 하고 있었는데, 어느새 나는 그 녀석들이 만들어 내는 독특한 리듬을 따라 흥얼거리고 있었다.



겨울 동안 멈추어 있던 생장이 기지개를 켜는 시간, 주민들은 이른 봄의 많은 날들을 땅 가까이 엎드려 보낸다. 잔디에서 잡초들을 속아내고 영양제를 뿌려주고 색색깔의 꽃을 심어 마당에 색을 입히고 나무로부터 웃자란 가지를 잘라내고 가지를 속아내느라..... 모두들 조용히 분주하다. 잔디 돌보기의 수고로움이다. 바오밥 나무를 돌보기 위해 잡초를 뽑아주면 또 어느새 홀씨가 날아와 또 잡초가 자라나고 또 뽑아주기를 무한 반복하는 수고로움은 어린 왕자도 겪었던 것이다. 누군가를, 또 무언가를 사랑한다는 건 그런 것이다. 사소하고 하잘것없는 일을 무한 반복하며 곁을 지키는 것. 북미인들을 그렇게 고생하게 만드는 식물과 관련된 다양한 엘러지를.... 나는 어느 것 하나 특별히 앓고 있지 않음을 다행하고 감사히 여기며, 꽃가루 알러지로 고생하는 남편을 대신해서 오늘도 열심히 마당쇠 노릇을 한다.

가든 센터는 판매를 위해 진열된 온갖 화초들로 장관을 이루었다. 꽃잎의 끝부분이 가벼운 털로 장식된 것 같은 화려한 튤립 코너는 축제 분위기를 띄고있다.


캐나다나 위도가 높은 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부드러운 풀잎 같은 잔디들과는 달리 남부 텍사스의 잔디는 너무 억세고 뻑뻑해 무슨 관리가 필요하랴 싶었다. 그 억센 잔디도 알고 보면 종류가 다양하고 세월과 함께 닳고 사라져 가기도 한다. 지난 주말 신나게 휘둘렀던 전기톱의 체인이 벌써 헐거워져 버렸다. 전기톱을 교환하고 잔디에 뿌릴 영양제와 잡초 제거제를 사러 갔다. 잔디의 엉성한 상태와 여기저기 패치가 까진 부분 때문에 마음이 따끔따끔하다. 옆에서 같이 잔디 영양제를 고르고 계시던 인상좋은 아저씨께 여쭈었다. 저 제품은 작년에 사용해 봤는데 영 효과가 없는 것 같더라 혹시 추천해 줄 것이 있느냐고... 이런 경우 맘 좋은 아저씨들은 대게 자신들의 지식과 경험을 100% 전달하고 싶어 하며 온갖 세세한 내용들을 덤으로 알려주기도 한다. 이야기를 마치고 나중에 야외의 조경 코너에서 다시 마주치자 아저씨는 아까 방금 말해주지 못한 내용이 있다며 또 다른 종류의 잡초 제거제를 직접 들고 와 권해 주셨다. 맘 좋은 아저씨 덕분에 두 종류의 잔디 영양제와 잡초 제거제를 혼합하여 특별한 잔디 영양제 레시피를 만들었다. 가끔 만나는 호의적인 타인들은 비타민 같은 사람들이다. 며칠 전엔 5갤런 짜리 생수 다섯통을 차의 트렁크에 옮겨 실어야 하는데, 뒤에서 봐도 내가 고민하는 빛이 역력했던지 뒤에서 따라오던 호의적인 타인이 “가만있어봐요. 내가 해주께요.” 이러고선 묵묵히 실어 옮겨주기도 했었다. 무지하게 고마웠다.


하루의 마무리는 나 홀로 자구찌. 겨울 내도록 야외 수영장에 딸린 자구찌는 조용했다. 사람들은 실내 사우나실의 그윽한 조명 속에서만 자구찌를 즐길 뿐, 머리는 싸아한 냉기 속에 몸은 뜨거운 물속에 있을 때 느낄 수 있는 별스런 기분에는 관심이 없는 듯했다. 노천탕의 일본원숭이와 친구가 되어보는 저녁.

마감 시간이 가까워오자 스태프 한 사람이 들어와 리모트 컨트롤러로 fire pit의 불꽃을 꺼뜨리는 신기를 선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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