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자궁의 크기는 대략 계란 크기만하고 80g 정도의 무게라고 한다. 모든 인간은 그렇게 작은 공간에서 태어났다. 태고의 기억을 떠올릴 수 있다면 말랑하고 촉촉한 자궁의 촉감일까, 비릿하고 짭짤한 양수 맛일까, 자궁안에서 유영하던 원초적 몸짓일까. 인간의 입장이 아닌 자궁의 입장에서 자궁은 어떤 단어로 기억되고 싶은지 생각해 본적이 있나. 태아를 품고 낳는 것 외에는 그 역할이 거의 없는 달걀사이즈만한 자궁은 태아를 품고 있을 때의 풍만한 느낌 보다도, 양수로 부푼 배의 불편함 보다도, 자궁의 일부였다가 떨어져 나간 태아에 대한 ‘상실’을 가장 먼저 떠올린다. 생명의 가능성을 품고 있으면서 그 생명과 결국에는 이별해야만 하는 상실된 가능성을 지닌 존재로서 자궁은 자신의 처지에 대해서 비관하는 대신 수긍한다. 그것이 존재 가치의 이유라면 마땅히 받아들이겠다는 듯이.
나의 몸에서 분리된 자궁의 크기는 400g이었고, 그 안에는 온기가 전혀 없는 크고 작은 혹들이 가득했다고 복강경으로 촬영된 사진을 보여주며 주치의가 말했다. 나의 몸과 분리되기 전 자궁의 마지막 모습은 못생기게 울퉁불퉁했고, 배꼽안으로 찢은 직경 5센치의 구멍을 통해 조각조각 분리된채 밖으로 나왔다고 한다. 의사는 사진들 하나하나를 상세히 보여주고 설명하면서 마지막에 수술하기를 정말 잘했다고 덧붙여 말했다. 애를 낳을 것이 아니라면 역시나 그 역할이 없는 자궁이므로 장기를 압박하고 갯수가 너무 많아서 다출혈을 유발하는 근종으로 가득 찬 자궁은 아주 빠르게 제거 수순에 들어갔다. 평생 아이를 가져보겠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어서 수술의 결정은 어렵지 않았지만 자궁과 완벽하게 이별할 준비는 하지 못했다. 생명을 품지 않아도 ‘언젠가는 품을지도 모르는’ 가능성이 존재했던 시간에서 이젠 그런 상상도, 생각도 거세된 현실은 상실감으로 채워졌다. 돌아간다고 해도 똑같은 선택을 했을 것이고, 아이가 갖고 싶은 것도 아닌데 중요한 무언가를 잃어버린 것처럼 헛헛하고 공허한 이 기분의 근원은 상실된 가능성에 대한 슬픔이었다. 그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만족했던 시절이 지나가고 있음을 알게 된 슬픔. 상상 마저도 거세된 현실의 적나라함을 인정해야 한다는 듯이.
2.
애플TV의 <30일의 밤>은 다중우주에 대한 내용을 다룬 미국 드라마이다. 주인공은 행복한 가정을 이루고 있는 한 중년 남성으로 어느 날 자신과 똑같은 모습을 한 의문의 사내에게 납치되어 자신이 속한 세계가 아닌 다른 세계로 강제 이동 당한다. 그 세계에서는 아내도 아들도 없지만 유명한 과학자로써 성공한 자신이 있다. 반면 남자를 납치한 괴한은 남자의 세계의 남아 사랑하는 이와 가정을 이루고 아들도 있는 그러나 과자학로서는 성공하지 못한 그 남자의 삶을 훔친다. 다중우주는 ‘만약에, 내가 이런 선택을 했다면’ 이라는 갈래에서 벗어난 다양한 선택을 한 내가 다중차원에서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에서 봤던 수많은 다른 존재의 양자경의 모습이 떠올랐다. 몇 십,몇 백,몇 천 혹은 몇 만 몇 억개의 수많은 내가 세세하게 다른 선택과 다른 결정을 통해 각기 다른 삶을 살고 있는 세계에 대한 생각으로 며칠간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눈만 감으면 다른 모습으로 살고 있는 내가 다양한 모습으로 떠올랐다. 한 날은 어떤 크고 캄캄한 구멍으로 나를 끌어 넣으려고 하는 어떤 이의 손을 발로 뿌리치며 잠에서 깼다. 내 발목을 잡고 블랙홀 같은 검은 곳으로 나를 끌고 들어가려고 했던 그 손의 촉감이 아직도 생생하다. 어떤 날은 붉은 벽돌로 지어진 이층자리 주택 정원에서 나를 엄마라고 부르는 두 아이와 키우는 고양이가 죽어 정원에 묻는 장면이 꿈처럼 떠오르기도 했다. 완전히 잠든 것은 아니었는데 상상인지 꿈인지 모를 그런 순간에 스며든 이미지였다. 퇴근하고 돌아온 동거인과 해질녁 산책을 하는데 불현듯 옆에 이 사람이 아닌 다른 연인과 이 시간을 함께 하는 장면이 떠오르기도 하고, 매 순간 문득 내가 이 사람을 선택하지 않았다면, 지금 내가 이 곳에 없었다면 하는 가정은 무한한 상상의 가능성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멀티버스는 완전히 열려있는 가능성의 세계를 시사한다. 그럼으로써 어떤 선택으로 인한 과중한 압박도, 후회도, 상실감도 열린 가능성으로 대체한다. 사십대에 들어서면 열린 가능성의 세계 보다는 상실된 가능성의 세계를 더 많이 경험하게 된다. 세세한 목표의 희망은 있지만 무엇이든 할 수 있고 될 수 있는 가능성의 시기라기 보다는 무엇이 이미 되어있고 그것을 유지하고 지키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일이 많아진다. 그래서 가장 그리운 건 나에게 언제나 열려있던 ‘가능성의 세계‘다. 언제든 생명을 품을 수 있고, 언제든 떠날 수 있고, 다른 사람을 만날 수 있고, 어떤 공부를 할지 선택할 수 있었던 그런 가능성과 점점 멀어지는 것. 앞으로 더욱 멀어질 것. 그래서 멀티버스 속의 다양한 나를 생각하면 조금 위안이 됐다. 없어진 자궁도 그곳에선 건강하게 존재할지 또 모르는 일이다.
3.
덜 찌질하고 덜 우울하게 사라지는 것들에 대한 상실을 담담히 받아들이고 싶었다. 그런 준비가 되어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는데, 애초에 ‘그런 준비’란 없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 준비가 되어 있어서 받아들이는게 아니라 저절로 그렇게 되는 것이라고, 삶이 보통 그렇다고 단순하게 웃어 넘기는 것이라고 다른 차원의 나는 그렇게 살아갈 수도 있다. 대학원 시절 공부할 때 잠시 알던 영화전공 지인과 얼마전 새벽에 잠시 대화를 나눈적이 있다. 대학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며 영화비평 인문학 강의를 하시는 분이었다. 영화 <가여운 것>에 대해서 이야기 하다가 요즘 ‘상실된 가능성’에 대한 것으로 우울하다라고 심경을 고백했더니 그 분이 말했다. ‘아직 사십대 초면 젊고 어린데…그런건 지금 내가 더 많이 느끼지 않겠냐고…’ 지인은 오십대 중반이었다. 새벽에 소소하게 웃었다. 육십대 선배가 보면 또 얼마나 웃긴 말이겠나 싶어서. 여러모로 위로가 되는 것들, 마음을 건강하게 만드는 것들을 계속 찾으면서 ‘상실된 가능성’에 함몰되지 않도록 나이들어가는 나를 지킬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