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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봄여기 Jul 02. 2024

지는 것에 익숙해지지 않아.

십 몇년동안 꾸준히 했던 수영을 관뒀다. 아직 수영을 대체할만한 다른 운동을 선택하진 못했다. 29살에 수영을 처음 배우고 꽤 열심히 다니면서 오랜 시간 애정했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지루하고 재미없어졌다.  50미터 기록이 48초를 넘어갔을 때부터였나, 1km 왕복도 숨이 차서 제대로 못했을 때부터였나, 오리발이 없으면 접영은 하지 못했을때부터였나, 앞줄에 서던 페이스가 점점 뒤로 밀리던 때부터였나 이 모든 순간들이 최근 3년안에 일어났는데 더이상 예전의 속도만큼 수영을 할 수 없고, 그만큼 체력도 따라주지 않는 걸 깨닫고 나서부터 더이상 열심히 하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예전보다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을 기울여야 내가 원하는 속도와 페이스가 나올 수 있었는데 그건 내게 더이상 ‘예전 같을 수 없다’는 직접적인 선고나 다름없었다. 그래서 더 노력하는 대신 포기했다. 나아지는게 보이지 않으니까 재미없었고, 내가 원하는 만큼 성과가 없으니 지루했다. 1시간의 노력을 기울여 1km를 갔다며 이젠 2시간을 기울여야 겨우 고작 그정도를 갈 수 있다는 것인데 그건 너무 비효율적인 일이었다.


지난 주말에 햇감자를 받으러 동인천 목사님네 갔다. 지금은 종교가 없지만 어린 시절 부모님의 선택으로 기독교의 영향아래 있었기 때문에 내가 존경하고 좋아하는 몇 몇 어른들이 교회에 있다. 그래서 나는 그 분들을 뵈러 일 년에 몇 번씩 교회에 간다. 지난 주말이 그런 날이었다. 목사님은 육십이 넘은 나이에도 탄탄한 몸매와 복근을 가지고 계시는데 목회만큼이나 좋아하는 운동 때문인 것 같았다. 아직도 축구를 꾸준히 하신다는 것이다. 사모님이 옆에서 이제 젊은 사람들 부담되니까 나가지 말라고 하는데 기어코 매주 참석한다고 핀잔을 주었다. 중학교시절 목사님이 우리의 담임목사님일 때 목사님은 예배가 끝나고 난 오후면 매주 운동장과 공원에 우리를 데리고 가서, 발야구며, 족구며, 축구며, 농구며 탁구까지 할 수 있는 모든 운동을 하게 했다. 처음엔 그게 싫었는데 나중엔 그것이 마치 당연한 일과가 되어서 우리는 산과 들로 다니며 여러가지 레크레이션과 운동을 접목한 놀이들을 했다. 그러면 우울했던 마음도 빗나간 공처럼 날아갔고, 억눌린 생각이나 감정들에서도 해방되는 기분을 느꼈다. 몸을 움직이고 사람들과 어울려서 하하호호 하던 그 시절은 목사님도 우리도 만날때마다 이야기 꽃을 피우는 강력한 공감의 테마가 되었다.


“목사님보다 어리고 젊은 사람들이 많을텐데 체력이 되세요?”

“당연히 안되지…그래서 나는 조금 달리다가 뭐 심판도 보고, 사람들 옆에서 다른 잡일도 해주지.“

“그러면 왠지 서글프고 그러지 않아요? 나도 저만큼 달리고 하던 때가 있는데…못 달리고 그러면 자존심상할 거 같은데…“

“이제 그런 시기는 지났지…내 나이정도 되면 자연스럽게 인정이 되는 순간이 온단다.“


자연스럽게 당연히 인정이 되는 순간이 나는 아직 덜 온거라고 목사님은 웃으면서 말했다. 서른 두살의 혈기왕성했던 목사님과 15살의 여리고 풋풋했던 우리는 어느덧 육십대와 사십대의 나이에 이르러 운동을 같이 하는 대신 운동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에 대해서 이야기 한다.


어렸을 때는 가진 게 없었고 나를 지키는 방법으로 “싸움”이라는 수단을 주로 사용했다. 단호하게 더 극단적으로 더 흥분한 목소리로 상대방을 제압하고, 모든 것을 내던질 것 같은 태도로 싸움에 임하면 지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손해는 많이 봤어도. 그래도 나는 이기는게 좋아서 나에게 불리한 순간이 오거나 불합리한 순간에 처하거나 저항이 필요한 순간에 늘 더 극단적이고 폭력적인 방법으로 상대와 싸움을 했다. 상대가 나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이든 권력기관이든 조직이든 물불 가리지 않았던 것 같다. 가족들은 시비에 휘말려 내게 안좋은 일이 생길까바 늘 전전긍긍했고, 제발 무슨 일이 생겨도 앞에 나서지 말라고 충고했다. 나를 지키고 안위하는 방법으로 “싸움”을 택한 사람들은 결이 전혀 다른 일에서도 ‘승부’에 기반을 두고 모든 것을 ‘이기고’ ‘지고’의 개념으로 바라본다는 문제점이 있었다.


수영을 할 때마다 진다는 기분이 들었던 것 같다. 예전에는 이정도의 노력만으로도 이만큼을 했었는데 이제는 이만큼의 노력을 기울여야 그만큼 한다는게 못견딜만큼 자존심상했던 것 같다.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야 한다는 일도 머리는 알면서도 가슴으로는 비겁하게 피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아직은 ‘지는 것’에 익숙하지 않다. 익숙하지 않은데 매순간 져줘야 하는 상황들은 왜 이렇게 많은 건지, 미안하지 않은 일인데 미안하다고 사과해야 하고, 불합리해도 ‘알겠습니다’라고 말해야 하는 순간은 왜 점점 많아지는지, 나는 아직 다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몸은 왜 계속 침대에 누워있고 싶어하는지 참말로 익숙해지지 않을 것 같은 ‘지는 삶‘에 대해서 인정하는 대신 아직 나는 툴툴 거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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