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가방이 아닌 게이트키퍼

by For watermelon

예전에는 '광고' 일을 꿈꾸는 사람들이 참 많았다.

스마트폰도, 유튜브도 없던 시절,

잘 만들어진 15초짜리 광고는

그 자체로 대중이 즐기는 훌륭한 '콘텐츠'였다.


광고 카피 한 줄이 전 국민의 유행어가 되고,

개그 프로그램에서 패러디되는 일도 부지기수였다.

'콘텐츠 크리에이터'로서

광고인이 가지는 직업적 선망성과 매력도가

그야말로 하늘을 찌르던 낭만의 시대였다.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

매체는 셀 수 없이 다양화되었고,

인스타그램, 유튜브, 틱톡 등

손가락만 까딱하면 볼 수 있는

자극적이고 재미있는 콘텐츠가 차고 넘친다.

마음만 먹으면 일반인도 얼마든지

크리에이터가 되어 수백만의 구독자를 거느리는 세상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직업으로서 광고인이 가지는

매력도는 과거에 비해 확실히 떨어졌다.

새롭고 재미있는 것을 좇는 톡톡 튀는 인재들은

이미 다른 플랫폼이나 IT 업계로 넘어가고 있고,

순수하게 '이 일이 재미있어서'

광고판에 뛰어드는 사람도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이 길을 걷고 있고,

이 업에 짙은 애정과 미련이 남아있는 한 사람으로서,

우리 직업의 매력도를 다시 끌어올리는 일은

분명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AE로 일하면서 가장 힘 빠지고,

때로는 직업적 자존심마저 깎아내리는

비하의 단어가 하나 있다.


바로 "AE는 철가방이다"라는 말이다.


광고주가 던진 피드백을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유관부서에 배달하고,

내부에서 만든 시안을 또 그대로 포장해 광고주에게 배달하는 사람.

중간에서 아무 생각 없이 왔다 갔다 하며 앵무새처럼 말만 전하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물론 급할 때는 이런 수동적인 패스(Pass)가 유효할 때도 있고,

실제로 그렇게 일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AE의 업무 전체를

그저 '수동적인 배달부'로

일반화되는 것은 너무나도 안타까운 일이다.


나는 AE가 철가방이 아니라,

오히려 "게이트키퍼(Gatekeeper)"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원래 게이트키퍼란 뉴스나 미디어에서

'어떤 정보를 대중에게 전달할지 말지 선택하고 필터링하는 문지기'를 뜻한다.


광고회사에서의 AE가 딱 그렇다.

우리는 수많은 정보의 흐름 한가운데 서서 문을 열고 닫는다.


광고주의 날 것 그대로의 피드백 중

유관부서가 반드시 알아야 할 핵심은 뾰족하게 다듬어 전달하고,

불필요한 감정적 언어나 혼선을 줄 수 있는

TMI는 전략적으로 차단(필터링)한다.


반대로 제작팀의 크리에이티브한 고집을

광고주가 납득할 수 있는 논리와

비즈니스 언어로 번역해 내는 것 역시 우리의 몫이다.


어떤 정보를 넘기고 어떤 정보를 거를 것인가.

전체 흐름이 가장 유려하게 흘러가도록

매 순간 치열하게 판단하고 실행하는 것.


이것이 어떻게 수동적인 배달부의 일일 수 있겠는가.

AE는 정보의 문을 통제하며 프로젝트를 성공으로 이끄는,

그 누구보다 능동적인 기획자다.


더 나아가,

AE가 중간에서 정보를 어떤 방향으로 유도하느냐에 따라

우리가 그리는 전체 판의 성격과 밑그림 자체가 완전히 달라진다.


광고주의 "고급스러우면서도 빵 터지게 해주세요"라는

따뜻한 아이스 아메리카노 같은 요구를 받았다고 치자.

철가방처럼 이 말을 그대로 제작팀에 던지면 판은 산으로 간다.


하지만 게이트키퍼인 AE가 "톤앤매너는 프리미엄으로 가되,

카피 한 줄에만 확실한 위트를 주자"라고 정보를 해석하고 유도하는 순간,

엉망이 될 뻔했던 그림은 세련된 마스터피스로 방향을 튼다.


우리가 무심코 건네는 말 한마디, 의도적으로 조절한 정보의 양과

뉘앙스가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전체 캠페인의 운명을 결정짓는다.

그러니 AE는 그저 말을 옮기는 수동적인 존재가 결코 아니다.

수많은 변수 속에서 최적의 그림을 뽑아내기 위해

판을 조율하고 통제하는,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플레이어다.


이처럼 치열하고 주도적으로 판을 짜는

능동적인 플레이어라는 점을 알고 나면,

바닥까지 떨어졌던 AE라는 직업의 매력도가

아주 조금은 다시 올라가려나?


예전처럼 대중의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독점하는 자리는 내어주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수많은 사람과 정보 사이에서 팽팽하게 중심을 잡고,

무에서 유를 만들어가는 이 묵직한 짜릿함만큼은

여전히 AE만이 가질 수 있는 독보적인 매력이다.


부디 더 많은 사람들이 이 매력을 알아봐 주기를 진심으로 기대해 본다


그리고, 아직 스펀지처럼 많은 것을 흡수하며 고군분투하고 있을 주니어 AE들이

이 사실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우리는 단순히 말을 옮기는 사람이 아니라,

무에서 유를 만들어가는 과정의 중심을 잡는 조율자다.

그러니, 스스로 하는 일에 충분한 자부심을 갖고 당당하게 일하기를,

선배로서 진심으로 응원한다

일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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