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TI를 꽤 좋아한다.
물론 과학적인 근거가 빈약하기도 하고,
MBTI 틀에 가둬 사람을 섣불리 재단하는건 쫌 별로라고 생각하지만 말이다.
그럼에도 좋아하는 이유는
적어도 사람의 성격에는 '맞고 틀림'이 아니라
'다름과 다양성'이 존재한다는 걸 보여주기 때문이다.
타인을 이해하는 폭을 넓혀준다는 측면에서는 꽤 긍정적이라고 본다.
게다가 스몰톡에 젬병인 사람도
어색한 공기가 흐를 때 "MBTI가 어떻게 되세요?"
한마디면 쉽게 대화를 시작할 수 있는 '국룰' 질문이 되어주니까.
나의 MBTI를 밝히자면
'INFP'다
갑자기 이 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MBTI의 네 번째 지표인
'J(판단형)'와 'P(인식형)'에 대해 말하고 싶어서다.
일상 속의 나는 의심할 여지 없는 완벽한 'P'다.
무계획 속에서 마주하는 예기치 못한 소소한 이벤트들을 사랑하고,
상황에 따라 물 흐르듯 유연하게 움직이는 것을 좋아한다.
여행을 갈 때도 분 단위로 촘촘하게 짜인 계획표를 보면
오히려 숨이 턱 막혀오는 전형적인 P형 인간이다.
하지만 이렇게 즉흥성과 자유로움을 만끽하는 나조차도,
일터에 나가는 순간만큼은 완벽한 'J'로 무장해야만 한다.
앞선 포스팅에서 말했듯
AE는
그 프로젝트의 가장 처음을 열고 가장 마지막을 닫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모든 단계와 흐름이 유려하게 맞물려 돌아가도록
전체 판을 조율하는 컨트롤 타워가 되어야 한다.
광고주를 비롯해 내부의 기획팀, 제작팀, 매체팀, 그리고 외부 프로덕션과 수많은 협력업체까지.
이 모든 이해관계자의 시선이 오직 프로젝트의 중심인 AE만을 향해 있다.
사회초년생 시절,
내게 많은 것을 가르쳐주셨던 당시 팀장님이 해주신 말씀이 있다.
"
AE에게 가장 필요한 능력은 바로 '예지력'이야.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한 수 앞을 미리 내다보고 대처할 수 있는
예지력을 가져야 해.
"
스펀지처럼 모든 것을 흡수하던 그 시절,
팀장님의 이 한마디는 내 AE 인생을 관통하는 바이블이 되었다.
10년이 훌쩍 지난 지금 곱씹어 보아도,
정말이지 100% 완벽하게 맞는 말이다.
광고회사라는 거대한 유기체는
마치 꼬리에 꼬리를 물고 달리는
하나의 긴 기차처럼 움직인다.
정해진 궤도에서 이탈하지 않고
목적지까지 무사히 도달하려면,
각 칸들이 앞 칸의 꼬리를 단단히 물고 따라가야만 한다.
그렇기에 가장 맨 앞에서 기관차 역할을 하는
AE의 방향 지시는 그 무엇보다 중요하다.
뒤따라오는 수많은 꼬리들(유관 부서들)이
갑작스러운 상황에도 당황하지 않고 대처할 수 있도록,
가야 할 길을 미리 '예상'하고
그들이 감당할 수 있는 속도와 각도로 부드럽게 움직여야 한다.
만약 머리 칸이 이러한 고려 없이 즉흥적으로 휙- 하고
살짝만 방향을 틀어버리면 어떻게 될까?
물리학적으로 보아도,
머리가 갑자기 휙 하고 1도만 방향을 틀어버리면
맨 끝에 매달린 꼬리는 10도, 20도로 심하게 요동치며 휘청거린다.
그 휘청거림이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서면
결국 기차는 선로를 이탈하고 만다.
완전히 엎어져 목적지에 아예 도달하지 못하거나,
수많은 사람들의 진을 다 뺀 채
예상보다 훨씬 늦게 도착하는 대참사가 벌어지는 것이다.
그렇기에 AE라는 머리의 무게는 무겁고,
그들이 발휘해야 하는 예지력은 치명적으로 중요하다
결국 이 거대한 열차를 무사히 이끌기 위해,
AE는 수만 가지 변수를 예측하고 통제하는
지독한 '파워 J'가 되어야만 한다.
태생부터 철저한 계획형 J이든,
후천적으로 개조된 업무형 J이든
그건 상관없다.
내 뒤에 매달린 모든 이들이 불안함 없이 따라올 수 있도록,
머릿속에는 늘 거대한 숲을 조망하는 명확한 청사진이 펼쳐져 있어야 한다.
여기까지만해도
AE로서 완벽하다고 생각하지만,
여기에 연륜이 조금 더 쌓인 진정한 '고인물'들은 한 단계 더 나아간다.
아무리 철저히 대비해도 기어코 터지고야 마는
돌발 상황 앞에서도 당황하지 않는 유연함,
즉 '임기응변'이라는 필살기를 한 스푼 얹는 것이다.
탄탄한 J의 계획성이라는 뼈대 위에,
돌발 상황을 유연하게 넘기는 P의 임기응변까지 갖춘 사람.
그것이야말로 이 험난한 바닥에서 살아남은
진정한 '고단수 AE'의 모습이 아닐까 싶다.
고백하건대,
나 역시 아직 그 완벽한 '고단수'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는 없다.
매번 기가 막힌 예지력을 발휘해
모든 돌발 상황을 매끄럽게 통제하는 완벽한 사람도 아니다.
나 또한 매일 수많은 변수들과 부딪히고 깨지며,
그 경지를 향해 걸어가고 노력하는 현재 진행형의 AE일 뿐이다
.
그럼에도 이 험난한 길을 함께 걷고 있는,
혹은 이제 막 걷기 시작한 사람들에게
꼭 당부하고 싶은 것이 있다.
부디 AE라는 자리가 가지는
막중한 책임감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 길을 걸어가는 AE라면,
스스로가 견뎌야 하는 '머리 칸'의 막중한 무게를
반드시 이해해야만 한다
내 뒤에 꼬리를 물고 따라오는 수많은 동료들이
조금이라도 덜 휘청거리고 덜 혼란스러울 수 있도록..
길을 잃거나 다치지 않도록...
늘 한 수 앞을 먼저 내다보고 대비하는 사람.
그런 든든한 '예지력'을 갖춘 멋진 AE로 성장해 나가기를
진심으로 응원한다.